두고 온 것들

    - 황지우, <창작과 비평> 2004, 봄호에서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시인은 역시 위대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니.
두고 온 것들이 유독 생각나는 2004년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라 당직 순서를 바꿔 내가 사무실에 홀로 나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 정도밖에 없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아내도 이해하니 오늘 같은 날 사무실을 지킨다.

크리스마스라 전화도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을 크게 틀어 놓고 들었다.

새벽 노동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듯한 목소리로 장사익이 <노동의 새벽>을 불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입에서 '개X끼'라는 발음을 하도록 만든 노래 <대결>은 노동자 노래패 억새풀과 소리여울이 불렀다. "너흰 돈과 무력 권력만이 전지전능함을 믿지만~ 우린 온 세상이 평등과 사랑 일치될 것을 믿는다~" 정말 그랬다.
김현성이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를 흥겨운듯 슬픈듯 불렀고, <가리봉 시장>은 모던 록밴드 언니네 이발관이 불렀다.
이런 노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싸이가 N.E.X.T와 함께 <하늘>을 불렀고, <손무덤>은 이주 노동자 밴드 Stop Crackdown이 불렀다. 하드 락인지 메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시끄럽다. 잘린 손을 묻는 참혹한 풍경을 미친 듯한 음악에 맞춰 비교적 덜 라커적인 음색의 보컬이 부른다.
정태춘은 그만의 '전통적 민중가요(?)'다운 창법으로 <바겐 세일>을 불렀고,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은 <시다의 꿈>을 눈물나게 불렀다. 가수가 아니라서 더 슬프다.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시다였던 적도, 공순이 공돌이였던 적도 없는데 왜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은 곧 실천임을 일깨워줬던 <사랑>을 '조국과 청춘' 출신 가수 겸 라디오 DJ 손병휘가 불렀고, 인디밴드 Ynot은 <아름다운 고백>을 불렀다. 학교 다닐 때 <노동의 새벽>에 <아름다운 고백> 가사를 이어서 마치 한 곡처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와 명창 전인삼이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를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불렀고, 테크노전자음악 뮤지션 모하비의 마치 LP 판 돌아가는 듯한 배경 음악에 노래패 '메아리' 출신 민중가수 윤선애가 <민들레처럼>을 불렀다. 윤선애의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떨린다. 벌써 십 수 년도 넘은 때에 들었던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저 평등의 땅에>를 다시 듣고 싶어진다.
윤도현이 <이 땅에 살기 위하여>를 불렀고, <겨울새를 본다>는 한대수가 불렀다. 한대수의 목소리를 듣자니 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갑자기 물이 마시고 싶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할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으로 바"친다며 박노해가 세상에 내놓은 시집을, 80년대적 치열함과 90년대적 해체의 사이에서 듣고 따라 불렀다. 그 때, 그랬다.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따뜻했고, 확률은 낮았지만 거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 때, 나 역시 그러했다.

십 수년이 지났다.
싸울 대상을 바꾼채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투쟁의 상대를 바꾼채 여전히 나는 투쟁하고 있다. 싸우고 투쟁하는 이유는 사라지고, 관성의 법칙 탓인지 그 행동만 아직 남아, 대상을 바꿔가며 스스로 전장에 선 것처럼 나를 이끌고 있다. 바깥 세상에 대해 아무런 적의(敵意)도 없이 오로지 나와 싸울 뿐이다.

옛 사람이 찾아와 누구를 위한 싸움이고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 물으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첫째는 나를 위함이요, 둘째는 나의 가족을 위함이요, 그 셋째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함이나, 그 때처럼 세상을 바꿀만한 기백은 남아있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스스로 위로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 것 마냥 때때로 허전하다.

윤선애의 <민들레처럼>은 언제나 들어도 멋있는 노래다.
혼자 있으니 목청껏 노래 부를 수 있어 더 좋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대도 /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 민들레의 투혼으로

*
오늘 저녁에는 대학 때 만난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 모임에 나가려 한다. 그동안 참 많이 바빴다.

**
윤선애의 음원을 구할 수 없어, 꽃다지가 부른 <민들레처럼>을 링크합니다.
☞ 민들레처럼 - 꽃다지  [출처 : PL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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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프면 모든 것이 중지된다. 엄마 아빠의 식욕이 떨어지고, 평소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며, 혹시 아이가 열이라도 있을라치면 영점 몇 도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것에 마음을 졸인다. 겨우 잠이 들면 혹 잠이 깰까봐 걸음걸이 문 여닫는 행동 하나하나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이 없다. 자다깨다 반복하는 아이로 인해 밤잠을 못 이루는 건 당연지사이고, 아침에 어린이 집에 가는 것도 중지된다. 아이 보랴 일하랴 평소 나보다 더 바쁜 아내의 일도 일단 중지된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깊은 잠에 든 듯한 아이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 없고, 애처롭고 평화롭고 가슴 짠한 그 기분은, 오로지 느낄 뿐 표현할 길이 막막하다.
이제 아이가 잠 깨면 아침밥 먹고 병원에 가야한다. 늘 다니던 병원이 있지만 너무 멀어, 이제는 가까운 병원으로 바꾸자고 말하지만 아내에게는 통할 리가 없다. 나고 자라면서 큰일 작은일 모두 겪은, 무엇보다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의사 선생님이 계시니, 거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를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아내는 아이가 더 걱정이다. 맞다. 아내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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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선배가 그러더군요. 리뷰는 참 어정쩡한 글쓰기다 - 이런 문장은 아니었는데, 하여튼 이런 뜻이었습니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완전히 소화하여 글을 쓸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로 전해야할지, 아니면 그 책을 읽고난 후의 내 생각을 더 많이 담아야할지, 늘 쓸 때마다 그 경계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저자의 말에 내 생각을 얹는 것도 참 위험스럽습니다. 저자가 책 한 권을 만들기까지의 고민의 십분의 일이라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틈새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어정쩡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반면 제가 리뷰를 쓰는 목적은 매우 단순합니다.
내가 읽은 책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손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규칙적인 글쓰기 연습이기도 합니다.
리뷰를 웹 사이트에 올리고 아는 분들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연습을 보다 공고히 하는 방법 중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아는 것을 뱉어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리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제 웹 사이트의 모든 글들이 다 이러한 생각으로 쓴 것들입니다.

이런 연습을 하는 것은 '나의 글'을 쓰기에는 아직 내 앎의 깊이와 표현의 기술이 얕고도 천박함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표는 '10년 후'입니다. 그러니까 2013~4년 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1,200~1,500 여권의 책을 더 읽고 쓰고 나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 때까지 어정쩡한 글쓰기가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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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결 하나를 소개하자면, 집중(concerntration)을 들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결하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수행한다." (피터드러커 《자기경영노트》p.129)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도 일을 '싸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의 일이 나열되어 있고 어느 것을 먼저 해야할지를 결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지식사회에서 지식노동자에게는 가용시간보다는 이룩해야하는 '공헌(또는 업무)'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 지식노동자의 도움 없이도 회사가 매우 잘 돌아가는 최정점의 성장 상태에 있는 기업일 것입니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수행한다.」

저는 아직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쾌한 방법론을 알지 못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 너무 많고,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고 싶은데 위에서 시키는 게 너무 많다."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지식노동자의 근본적인 가치는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또는 '해야할'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 많은 방법들 중에 으뜸은 바로 "한 번에 한 가지씩 집중"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욕심을 부려봐야 어차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욕심이 아니라 책임 방기입니다.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니까요.

사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수행'하는 원칙을 제대로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위 말의 핵심은, 오로지 '한 가지 일만'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하더라도 "집중"하라는 의미이니,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전형적인(즉 다소간 성과가 떨어지는) 지식근로자들은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늦어지고 만다. 반면에 목표를 달성하는 지식근로자는 시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편안한 속도를 유지하지만 쉬지 않고 나아간다." (피터드러커 《자기경영노트》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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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학생회 사무실 벽에 이런 글을 써붙였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은 제게 가르쳐 주세요."
                                                       - 손병목

이른 세 시다. 늦은 밤과 새벽의 경계다. 왜 이 시간에 14년 전의 일이 생각이 날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을까.

몇몇 선배들이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저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학생회관 3층 창틀에 걸터 앉아 진지하게 그 말을 들었던 정황만은 또렷하다.

짜라투스트라는 나이가 서른이 되자 고향과 호수를 등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그의 고독을 즐겼으며 10년 동안 권태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드디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어느 날 아침 동녘이 밝아올 때 일어나 태양 앞으로 걸어 나가서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너 위대한 천재여 만일 네가 햇살을 비추지 않았던들 너의 행복이란 무엇이겠는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전부다. 나는 선배들과 니체에 대해, 짜라투스트라에 대해 얘기했다.

2004년 오늘, 나는 더 이상 니체에 대해, 짜라투스트라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벽 세 시 - 밤인가, 새벽인가?
아직까지 잠 못 든 자에게는 밤이요, 벌써 눈 뜬 자에게는 새벽이다.
죽음은 무엇이고, 죽음이 주는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허튼 소리 그만하고 자고 나서 생각해 보라. 그때까지 이 질문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글입니다. 읽은 이로 하여금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순간의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 써봤습니다. (개인 홈페이지입니다.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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