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텔라라고도 불리우는 스폰지 케이크를 만들어 봤다. 결론은 실패!

책을 보고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계량 저울이 없어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버터 등의 비율이 엉망이었다.

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만들면 된다. (아래에서 제시된 양은 케이크 두 개 기준인데, 나는 하나만 만들 생각으로 모든 양을 반으로 줄였다.)

준비물 : 설탕 120g, 달걀 6개, 물엿 1 1/2큰술, 물 2 1/3큰술, 박력분 180g, 베이킹 파우더 5g, 버터 40g

설탕과 달걀을 섞는다.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채에 걸러 섞는다. 물엿과 물을 넣고 완전히 섞는다. 박력분과 베이킹 파우더는 조금씩 섞는다. 고무주걱으로 골고루 섞는다. 버터를 중탕에 녹여 조금씩 흘려 넣는다. 고무주걱으로 반죽을 완성한다.
빵 굽는 틀의 바닥과 옆면에 유산지를 깔고, 틀의 2/3만큼 반죽을 붓는다. 고무주걱으로 반죽 윗면을 고르개 편다.
18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10~15분간 굽는다. 꺼내서 식힘망 위에 뒤집어서 식힌다.

실패 원인 분석 (아마도...)
박력분과 베이킹 파우더, 설탕, 물엿의 양이 전혀 맞지 않았다. 눈짐작으로 대~충 섞었는데,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그 양을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외에 고무주걱 대신 플라스틱 밥주걱을 사용한 것, 버터를 중탕에 녹이는 대신 대충 국자 위에 놓고 불에 녹인 것, 식힘망이 없어서 그냥 둔 것 등등. 그러나 이건 부차적인 문제일 뿐 재료의 배합을 잘못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거 참 통쾌하고 시원하다.
현실이 이렇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비록 현실이 이러지 못하더라도 설경구의 그 사실감 넘치는 연기에 피로가 풀릴 지경이다.



"세상에 다른 출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난 어른이 되었다."
뭐, 이런 비슷한 말로 영화는 시작된다. 안 보아도 결말이 예상되는 그런 영화라고 안 보면 후회한다. 좀 심한 비유이긴 하지만, 어차피 죽는 인생 안 살아봐도 다 안다는 말과 비슷한 이치이다. 설경구표니까 가능한 비유다.

"나쁜놈 잡을 수 없는 검찰이면 다시는 안 돌아온다."
말만 들으면 바른생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참 유치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설경구가 하니까 다르다.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공공의 적 한상우(정준호)를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 나도 어느 순간 강철중(설경구)이 되어 그렇게 다짐한다.

공공의 적은 다름 아닌 사학재단 이사장이다. 그리고 모 정당의 부총재. 기타 줄줄이 사탕.
어찌 보면 한국 영화 중에서 정치적 '까발림'의 수위가 가장 높은 편이 아닌가 싶다.
현실과 같은 이야기여서 재미있고, 현실과 같지 않은 엔딩으로 인해 속이 후련하다.

1편을 보지 않았으나, 아니, 보지 않은 덕택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봤다.

* 메모
감독 : 강우석
주연 : 설경구(강철중 역), 정준호(한상우 역), 강신일(김부장 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쟁과 학교 - 학교는 어떻게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나
이치석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경희대학교가 있는 서울 회기동에 늘 쓰레기를 줍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지금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본 기사가 2002년 2월자인데, 그 때 그 분의 나이가 여든 둘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서울 청량초등학교(옛날에는 청량국민학교)에서 평교사로 정년 퇴임을 하신 김남식 선생님이신데,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저는 일제시대 때 우리 한글을 말하지 말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쳤고,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러고도 이제까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반민족 처벌이 있었다면 저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여러분은 자랑스런 교사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이 부끄러워, '내가 버린 쓰레기를 내가 줍기' 위해 30여 년 동안 쓰레기를 주우면서 사신 분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김남식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 김남식 선생님 기사 읽기 ("나는 벌받아 마땅한 친일 반역자" - 오마이뉴스 2002.2.11) 클릭

이치석 선생님이 쓴 《전쟁과 학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 머리말에 "자칭 민족 반역자라면서 벌써 45년간 시대의 넝마를 줍고 계신 김남식 선생님"이라는 말이 있어, 책을 다 읽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다행히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김남식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 이치석 선생님도 머리말에서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빌었다. 새봄이 돌아온 날 늦은 저녁, 퇴직금으로 산 술을 앞에 놓고 나는 내가 가르친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빌었다.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 '빨갱이'를 증오하라고 웅변하던 아이들 앞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가르친 모든 아이들을 불러내서 깊이 속죄하고 싶었다."

이 책은 학교사(學校史), 특히 양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학교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글이 학교사가 아니라 학교사를 반성한 조그만 에세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모기만 한 목소리라도 과거에 학교가 저지른 전쟁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학교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뿐인데도, 그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남식 선생님의 기사 중에 '국민학교'라는 명칭의 연원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국어 상용패'에 대한 아픈 기억을 언급하면서 '어찌 민족반역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과 학교》는 '국민학교'의 연원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민학교'의 '국민'이라는 단어의 뜻과 '국민교육'의 유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김남식 선생님의 말을 빌어 '국어상용패'를 나눠줬던 '간호당번' 제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는 이를 "병영화된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해체시키는 고도의 술책"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내용을 포함하여, 책은 크게 우리 학교 100년의 풍경과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의 학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시 관심은 우리 학교 100년의 역사인데, 일제 시기와 남북 분단을 겪으면서 '국민교육'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모해 왔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그토록 오래 지속된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습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직접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을 다 읽고 <서론>을 다시 봤습니다.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국민은 구한말의 대한제국 국민, 식민지 친일 국민, 분단시대의 반공 국민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국민은 아직 국민국가의 '피플'(people)로 변모하지 못했고, 친일 국민은 식민지 노예 상태에서 자주독립을 못했으며, 분단국민은 스스로 민족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말하자면, 국민의 이미지는 시대마다 한국 사람의 참다운 집단자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것은 20세기 국민국가들이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전쟁 등을 통해 인류의 자기파괴를 감행해 온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에 학교교육이란 그 자기파괴의 인류사를 압축하고, 민족 분열을 가중시킨 역사적 주범이었던 것이다."(p.56)

결국 그 학교교육의 현장에 있던 저자 자신이 부끄럽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민족 반역자라고 평생 쓰레기를 줍고 계신 분이나, '국민교육'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는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국민교육'을 지상의 목표로 하는 '국민학교'에 우리의 아이들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 김남식 선생님을 두고 '아름다운 친일파'라는 말을 썼습니다. 친일파가 아름답지는 않겠지요. 그 아름다움은 '현재'를 두고 말하는 것을 겝니다.
현재가 과거를 규정합니다. 두 분의 아름다운 현재가 과거의 상처를 씻고 통일과 미래발전지향적인 교육으로 거듭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점점 그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2005-06-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과거지사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며 긴 세월을 속죄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아요. 다른 많은 친일자들이 얼버무리며 덮고 지나가거나 아직도 억측을 부리는 것과 견주면 말이죠. 그러나 아직도 제 고정관념은 친일자 앞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는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만 드는군요. 아마도 이게 이 책을 못 읽은 탓이겠지요?

날마다좋은날 2005-06-20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없죠. '아름다운'은 현재형이고, '친일파'는 과거의 의미로 사용한 것인데, 역시나 우리 가슴 속에는 넘을 수 없는 담이 있나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저 두 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절세의 미인이 몸에 일사一絲도 부附치 아니한 순진 나체사진이외다. 그 풍만한 육체미는 고상하고 쾌절재득快絶再得키 난難한 근세의 진사진이올시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미인의 사진을 판다는 책 광고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문에서 보기 어려운 이런 광고가 일제 강점기 신문에 실려 있었습니다. 한술 더 떠서 1,000부밖에 출판하지 않았으니 빨리들 주문하라고 빤한 거짓말까지 덧붙입니다.
하나 더 볼까요?

이것 참 훌융하다. 진화珍畵, 진서珍書, 진사진珍寫眞, 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게 권합니다. 가을밤 긴데 한 번 보시요.

‘젊은 남녀의 만족하는 연애의 장면을 상세히 쓴 진서’ 다시 말해 성행위 과정을 자세히 다룰 뿐 아니라 ‘남녀가 제일 즐겨하고 기뻐하고 부끄러워하는 정의 자태를 묘사한 진품’이라고 당당하게 정체를 밝힌 어떤 책의 광고 문구입니다.

이상은 신문 광고를 통해 근대의 풍경을 다시 살려낸 《꼿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제일 마지막 장인 〈포르노그래피: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게 권함〉에 소개된 광고의 일부입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이 책은 지금까지 누구도 그리지 못했던 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TV 다큐멘터리 〈KBS 영상실록〉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그려내지 못하는 근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날벼락처럼 떨어진 외세의 침략과 근대 문명에 휘청댔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자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컨셉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의도가 충분히 실현된 듯합니다.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 풍경을 광고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당시 광고 문안만 보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제 스스로 엽기적이라 저자의 글 솜씨가 설사 부족했다 하더라도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을 엮은 저자는 16년 간의 일간지 기자 생활 - 그 중 대부분을 보낸 문화부 기자 생활을 통해 단련된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광고를 통해 옛모습을 본다고 하니 단순히 옛날 신문들을 뒤져 특이한 광고 몇 개 뽑아내고 대충 설명을 달아놓은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광고로 근대의 역사를 논한다는 기획 아이디어가 실제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책에서 다루고 있는 22 개의 주제는, 아마 수 많은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어렵게 고르고 골랐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뒷받침해줄만한 역사적 지식과 평가를 덧붙이기 위한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정말 발로 뛰며 모았을 수 많은 참고 자료와 그것을 읽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혹독한 작업 과정을 거친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팩트와 필력이 조화를 이룬 맛깔 나는 문장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흔히 우리 근대의 모습을 상상할 때는 약간의 환상 또는 절망감이 공존합니다. 일제의 암흑기가 주는 절망감과 이에 반대급부적인 지나친 낙관, 그 두 극단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저 역시 막연한 추측과 감상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근대사회의 맹아가 조선에서도 자생적으로 맹렬히 꿈틀대고 있었다는 시대착오적 낙관, 근대화의 모든 과정이 조선에 해악만 끼쳤다는 피해망상적 저주, 일본이 아니었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자포자기적 순응, 모두 배제할 것이었다. 역사를 정해진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어쭙잖게 해석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장면이면 장면, 양상이면 양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독자와 더불어 그 시대를 반추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집념 덕분에 놀랍도록 생생한 그 때 그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늘 제가 하는 말 -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책을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 부분만 골라서 차례와 무관하게 읽다보니 중간에 아직 몇 꼭지가 남았습니다. 오늘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출입문 옆에 기대어 책보면서 혼자 낄낄 대며 웃고 있는 이상한 놈이 있으면, 얼굴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놈이 바로 저일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인류학의 고전이라 일컫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드디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책이 제 책가방 속에서 한 달이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주제 의식이 뚜렷하고 그 내용에 깊이가 있어 다른 책에서 얻기 힘든 것을 새롭게 안다는 의미에서는 재미가 있었으나 단숨에 완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장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구입한 동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씩 역사 공부에 관심이 생기면서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진척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그 선택이 옳았음을 느낍니다. 일본에 대해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텍스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을 겨우 몇 차례 방문한 경험 또는 사유하지 않은 채 날것의 정보를 조합하여 어설프게 쓴 책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저자는 일본을 단 한 차례도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46년, 그러니까 종전 직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이 책의 집필이 이루어진 것은 '아직 전쟁중'인 상황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적국敵國에 들어가 연구를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류학의 고전이 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이로 인해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류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문격에 해당되는 제1장 <연구과제> 편에서, 저자는 현지 조사를 포기하는 대신 취할 수 있었던 여러 방법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한, 또는 일본인에 의해 씌어진 방대한 자료(문학, 잡지, 연구논문 등)와 영화, 인터뷰 등 현지 조사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일본인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연구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 타문화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훈련된 문화인류학자만이 가진 재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6월 미 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를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의 막바지이긴 했으나 당시로서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구를 위촉받았는데, 그 동기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지금까지 싸워온 그 어떤 나라와도 '다른' 별난 나라 일본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적'의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적'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자가 분석한 주제는 크게 전쟁 중의 일본인, 메이지유신, 덕의 딜레마, 인정의 세계, 자기수양, 패전 후의 일본인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에 대해 매우 심도 깊은 연구 결과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책의 제목으로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이 '국화'와 '칼'입니다. 이 둘은 극단의 상징입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인 '동시에',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것과 같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으며 이해하기 힘든 속성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일본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나 또한(but also)'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어휘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책 내용 요약은 인터넷에 떠도는, 누군가가 쓴 레포트로 대체하겠습니다^^
(<국화와 칼> 내용 요약 다운로드 - 클릭)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에서 저자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미국이 할 수 없는 것 - 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것 -은 명령으로 자유로운 민주적 일본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한 방법은 어떠한 피지배국에서도 지금까지 성공을 거둔 일이 없다. 어느 외국인도 자기와 같은 습관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은 국민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법률의 힘으로 일본인에게 선거에 의해 뽑힌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계층 제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알맞은 위치'를 무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p.382)

지금의 부시 정권이 다시 읽어봤으면 하는 구절입니다.

슬슬 출근 준비를 할 때가 다가 옵니다^^ 이쯤해서 마무리하지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다 보고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정작 책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보다 오히려 손가락에 관심이 갔습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 방법론입니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끌어내는 능력 또는 그 방법. 이것을 실현해 낸 저자가 존경스럽다는 것입니다.

*
참, 이 책을 읽으실 때는 책 말미에 부록으로 들어있는 이광규 교수의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책이 씌어진 배경과 의의, 그리고 '인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개관을 쉽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