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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절세의 미인이 몸에 일사一絲도 부附치 아니한 순진 나체사진이외다. 그 풍만한 육체미는 고상하고 쾌절재득快絶再得키 난難한 근세의 진사진이올시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미인의 사진을 판다는 책 광고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문에서 보기 어려운 이런 광고가 일제 강점기 신문에 실려 있었습니다. 한술 더 떠서 1,000부밖에 출판하지 않았으니 빨리들 주문하라고 빤한 거짓말까지 덧붙입니다.
하나 더 볼까요?
이것 참 훌융하다. 진화珍畵, 진서珍書, 진사진珍寫眞, 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게 권합니다. 가을밤 긴데 한 번 보시요.
‘젊은 남녀의 만족하는 연애의 장면을 상세히 쓴 진서’ 다시 말해 성행위 과정을 자세히 다룰 뿐 아니라 ‘남녀가 제일 즐겨하고 기뻐하고 부끄러워하는 정의 자태를 묘사한 진품’이라고 당당하게 정체를 밝힌 어떤 책의 광고 문구입니다.
이상은 신문 광고를 통해 근대의 풍경을 다시 살려낸 《꼿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제일 마지막 장인 〈포르노그래피: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게 권함〉에 소개된 광고의 일부입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이 책은 지금까지 누구도 그리지 못했던 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TV 다큐멘터리 〈KBS 영상실록〉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그려내지 못하는 근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날벼락처럼 떨어진 외세의 침략과 근대 문명에 휘청댔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자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컨셉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의도가 충분히 실현된 듯합니다.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 풍경을 광고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당시 광고 문안만 보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제 스스로 엽기적이라 저자의 글 솜씨가 설사 부족했다 하더라도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을 엮은 저자는 16년 간의 일간지 기자 생활 - 그 중 대부분을 보낸 문화부 기자 생활을 통해 단련된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광고를 통해 옛모습을 본다고 하니 단순히 옛날 신문들을 뒤져 특이한 광고 몇 개 뽑아내고 대충 설명을 달아놓은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광고로 근대의 역사를 논한다는 기획 아이디어가 실제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책에서 다루고 있는 22 개의 주제는, 아마 수 많은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어렵게 고르고 골랐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뒷받침해줄만한 역사적 지식과 평가를 덧붙이기 위한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정말 발로 뛰며 모았을 수 많은 참고 자료와 그것을 읽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혹독한 작업 과정을 거친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팩트와 필력이 조화를 이룬 맛깔 나는 문장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흔히 우리 근대의 모습을 상상할 때는 약간의 환상 또는 절망감이 공존합니다. 일제의 암흑기가 주는 절망감과 이에 반대급부적인 지나친 낙관, 그 두 극단이 동시에 떠오릅니다. 저 역시 막연한 추측과 감상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근대사회의 맹아가 조선에서도 자생적으로 맹렬히 꿈틀대고 있었다는 시대착오적 낙관, 근대화의 모든 과정이 조선에 해악만 끼쳤다는 피해망상적 저주, 일본이 아니었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자포자기적 순응, 모두 배제할 것이었다. 역사를 정해진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어쭙잖게 해석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장면이면 장면, 양상이면 양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독자와 더불어 그 시대를 반추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집념 덕분에 놀랍도록 생생한 그 때 그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늘 제가 하는 말 -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책을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 부분만 골라서 차례와 무관하게 읽다보니 중간에 아직 몇 꼭지가 남았습니다. 오늘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출입문 옆에 기대어 책보면서 혼자 낄낄 대며 웃고 있는 이상한 놈이 있으면, 얼굴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놈이 바로 저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