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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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일년 내내 바쁠 것 같습니다. 아침에 기분이 좋으면 하루가 즐겁고, 주초에 일이 잘 되면 그 주의 일이 잘 풀립니다. 마찬가지로 연초에 일이 많으니 일년 내내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일이 많다는 건, 경험으로 볼 때 즐거운 일입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삿된 마음이 들 여유조차 없이 바쁠 때가, 훗날 돌아보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때였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책 읽는 것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쩌면 바쁠 때일수록 더더욱 책에서 손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많다는 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과정입니다. 육체의 에너지야 밥을 먹어 보충한다지만 정신적 에너지는 책이 아니면 달리 보충할 방법이 없습니다. 바쁜데 무슨 책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경험으로 볼 때 한가하든 바쁘든 책은 그 소임을 충분히 합니다. 대신 다소 여유가 있을 때 보는 책과 바쁠 때 보는 책의 종류는 조금 다릅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어떤 책을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쁠 때 읽는 책은 딱 두 종류입니다. 재미가 있거나 지금 일에 도움이 될만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재미있는 책은 정신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일에 도움이 되는 책은 업무의 질을 높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읽는 책과 바쁠 때 읽는 책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에 도움이 되는 책이란 게, 사실 좀 모호합니다. 현재의 업무와 연관된 책은 당연히 직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는, 오늘날 상품과 서비스에 부가되는 가치의 80%가 지식노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지식노동은 그 속성상 창조적 업무인데, 창조의 영역에서 필요한 지식은 그 경계가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혜의 '여유'가 많은 사람이 창조적 업무에 적합합니다.


   제   목 : 학문의 즐거움
   지은이 : 히로나카 헤이스케 / 방승양 옮김
   펴낸곳 : 김영사 / 1992.12.1 초판 발행, 2004.12.28일刊 개정2판 19쇄를 읽음 (7,900원)

지혜의 '여유'라는 말이 좀 생소한데, 이는 <학문의 즐거움>을 쓴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개념입니다. 그는 공부하는 이유를 지혜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기억한 것의 극히 일부분밖에 끄집어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뇌에 수많은 정보가 축적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배우고 공부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뇌에 축적한 후에 끄집어 내지 못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히로나카는 인간만이 가진 '여유'라고 말합니다. 수학적 의미의 '여유'입니다. 즉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정보는 얼마 되지 않지만 방대한 양의 정보가 '바로 꺼내 쓸 수 없는 형태'로 뇌에 축적되었을 때, 전자에 대한 후자의 비율의 크기를 '여유'라고 정의합니다. 바로 꺼내 쓸 수는 없지만 약간의 수고와 기회를 제공하면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으므로, '지혜의 넓이'라고도 하고, 이것이야말로 지식노동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불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이런 관용성 중의 하나가 연상(聯想)입니다. 연상은 여러 개의 다른 것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역할도 하는데, 이것은 실생활에서도 업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이런 능력은, 사물 간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히로나카는 '지혜의 깊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함께 일하는 동료 후배들에게 항상 책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특히 그 업무가 창조적 기획의 업무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깊이도 깊이지만 폭넓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깊고 넓은 지식은 발효되어 '지혜'가 됩니다. 그 지혜의 질이 지식노동자의 능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책에서 손을 떼면 안 됩니다.

저는 제가 창조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창조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창조적 능력을 곧 발효된 지혜라 한다면, 먼저 지식을 쌓고 생각하는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부단히 익히고 생각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수학자, 그러나 끈기 하나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드상까지 받은 지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독할지 몰라도 그는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공부하다 인생마저 도가 통한,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자전적 에세이가 <학문의 즐거움>입니다. 어떻게 해야 창조적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 창조란 과연 무엇인지, 왜 매번 잊어버리면서도 또 배워야 하는지를 이 책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배운 것은 곧잘 잊어버려도 계속 배워야 하는 이유, 시행착오가 성공보다 값진 이유,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과감하게 체념하고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 그래서 궁극적으로 삶 자체가 즐거운 창조과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을 알려면 <학문의 즐거움>을 읽어 보세요.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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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의 주당천리
허시명 지음 / 예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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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정심수신(正心修身) 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심부재언이면 시이불견하며 청이불문하며 식이부지기미니라

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술로 인해 큰 홍역을 치르고 나니 술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늘상 밥 때면 밥과 술 생각이 동시에 들곤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퇴근길에 시야를 방해하던 술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술 생각이 나지 않으니 저녁에 일을 할 때 생각이 일을 방해하지 않아 좋고, 퇴근길에 술 생각이 나지 않으니 몸이 가볍습니다.

사실 술을 좀 줄이긴 줄여야 합니다.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이 정도 마셨으면 됐습니다. 대학 때 술에 맛을 들인 건, 술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술맛을 제대로 모릅니다.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서울에는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가친척도 하나 없었습니다. 부모를 떠나 홀로 되고 싶어 기어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지독한 외로움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벽을 보고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하늘 아래 나만 홀로 덩그러니 있다는 그런 느낌을 참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싫어 매일같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단 하루도 집에 그냥 들어가지 않았으며 늘상 누군가와 밤 늦도록 얘기하다 들어갔습니다. 대개가 술자리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니 나중에는 사람이 좋은 건지 술이 좋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 대신 시원한 맥주가 먼저 떠오르고, 용돈의 최우선 용처는 술값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무렵이면 밥 생각과 술 생각이 동시에 납니다. 밥을 먼저 먹으면 술 생각이 사라지고, 술을 먼저 마시면 밥 생각이 사라집니다.

저에게 밥이 그러하듯 술도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술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경험상 술이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긴장을 늦추고 경계를 허물어 속마음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듭니다. 반대로 술이 사람을 지극히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술은 사람 간의 경계도 허물지만 마땅히 가져야 할 자제력도 무너뜨립니다. 쉬이 뱉어 버린 말은 곧 칼이 되어 상대를 공격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는 대개 자제력이 바닥났을 때 벌어집니다. 젊은 날에 술을 좋아하다가 노년에 강경한 금주론자로 바뀐 실학자 이익의 마음도 이해할 만합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죽으면서도 자기 제사상에 술을 올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만, 요지는,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술을 끊는다는 말은 곧 관계를 끊는다는 말과도 같아 아직은 쉽게 실천하기 힘듭니다. 대신 마음을 다스려 술을 적게 마시고도 많이 마신 듯 술자리의 흥취를 돋울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목 : 허시명의 주당천리
   지은이 : 허시명
   펴낸곳 : 예담 / 2007.9.14 초판 발행, 초판 1쇄를 읽음 (14,000원)

<허시명의 주당천리>를 쓴 허시명은 주당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술에 대한 책만 몇 권째 내고 있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합니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을 좋아하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첫 책을 낼 때는 책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썼다가, 술을 찾아다닌 지 8년이 되니 이제 서문에 술을 조금 마실 줄 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기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 대한 책을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술 마시고 시 한 자락 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이 책에는 여러 지방의 술이 등장합니다. 경기도의 장수막걸리, 부자, 화요, 강원도의 단오 신주, 충북의 청명주, 문경의 호산춘, 상주 곡자, 영양 막걸리, 대구의 금복주, 경주법주와 화랑, 여산 호산춘, 무주 머루주, 전주 이강주, 보성 강하주, 흑산도 보리술, 진도 홍주, 진주 곡자, 경남 무학소주, 제주도 감귤주와 오합주 등.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주의 맥이 끊긴 사연, 박정희 시절 경주법주가 유일하게 전통주를 만들게 된 사연, 청주가 일본 술이 된 사연, 우리나라 소주 도수의 역사 등 술에 대한 상식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술 이야기보다는 술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술 향기보다는 사람 내음이 더 납니다. 묵묵히 술을 빚는 사람들과 술을 벗 삼아 산 옛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디도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술이 '덕(德)'이 되도록 마시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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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대학강의
김석진 지음 / 한길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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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금요일에 지나치게 과음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시기도 오랜만입니다. 그날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길 바랄 정도로 힘이 들었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습니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갔습니다.

바깥 출입이 불가하여 집에서 책을 보며 주말을 보냈습니다. 지난 주에 여러 권의 책을 사놓은 게 있지만, 몸이 아프고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을 때엔 오히려 고전을 보는 편이 낫습니다. 이해가 되면 다행이고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아주 편하게 보면 됩니다. 책장을 살피다가 《대학(大學)》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학》에 대한 책도 몇 권 있길래 그 중 대산 김석진 선생이 쓰신 《대산 대학 강의(한길사)》를 골랐습니다. 관옥 이현주 목사가 쓴 《대학·중용 읽기(다산글방)》는 기독교적 생각이 많이 묻어 있었고, 윤홍식의 《大學, 인간의 길을 열다(봉황동래)》는 대종교(단군을 교조로 하는 종교)적 생각이 짙어 원전의 감동을 느끼기에 부족할 것 같아 나중에 읽으려 미뤄두었습니다. 홍승직이 역해한 《대학·중용(고려원북스)》와 이가원 감수의 《大學·中庸(홍신문화사)》도 있었지만 대산 선생의 해설에 비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大學》은 사서삼경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책입니다. 사서삼경을 배우는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대학》→ 《중용》→ 《맹자》→ 《논어》→ 《시경》→ 《서경》→ 《역경》 순입니다. 《역경》 은 주역입니다. 앞의 네 책이 사서이고 뒤의 세 책이 삼경입니다.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이 쓴 것을 '경(經)'이라 하고, 현인이 쓴 것을 '전(傳)'이라 합니다. 삼경에 속하는 《시경》,《서경》,《역경》은 공자가 직접 손을 대었으므로 '경'이라고 합니다. 사서는 공자의 제자들이 지은 글로서 '전'에 해당되는 것인데, 그저 '서(書)'라고도 합니다.

《大學》은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지은 글입니다. 증자가 손수 지은 부분을 '경'이라 하고, 증자의 뜻을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을 '전'이라 하여, 《大學》 안에도 '경'과 '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주자가 설명과 주를 달아 내용을 풍부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그 핵심 내용은 증자가 직접 쓴 '경'에 모두 담겨 있는데, 본문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아래에 그 전문을 모두 옮깁니다. (한자에 울렁증이 있으신 분들은 SKIP~^^)



생각보다 길지 않지요? 짧은 이 문장을 후학들이 덧붙이고 덧붙여 길어진 것이 현재의 《大學》입니다. 제가 따로 밑줄을 그어 표시한 곳은 《大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3강령(三綱領)과 8조목(八條目)입니다.  

3강령은 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이고,
8조목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들 보셨죠? 격물치지라는 말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도 교과서에서 한번 들어봤음직합니다. 옛적에 교과서에서 배울 때는 그리도 고리탑탑하던 말이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그 뜻을 하나씩 새겨 가며 익히니 가슴에 절절히 와닿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사물과 사건, 사람들과 관계하는데, 이들과 부딪치는 것이 격물(格物)입니다. 부딪쳐야지 알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부딪쳐야죠. 그런 다음에야 치지(致知) - 앎에 이르게 됩니다. 알았으면 뜻을 성실히 해야죠, 이게 성의(誠意)입니다. 뜻을 성실히 하면 마음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심(正心)입니다. 마음을 바로하여 몸을 닦는 것, 이것이 수신(修身)이고,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치하는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입니다. 이를 하나 하나 설명한 것이 《大學》입니다.




   제   목 : 대산 대학 강의
   지은이 : 대산 김석진
   펴낸곳 : 한길사 / 2000.6.25 초판 발행,  2006.3.20일刊 초판 2쇄를 읽음 (15,000원)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들, 옛 현인들의 말인 만큼 지금 시대에 그대로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야 어리석은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해버리면 원문의 그윽한 맛을 보기가 또 힘들어집니다. 골동품이 낡았다고 덧칠을 해버리면 그게 어디 골동품의 가치가 있을까요? 옛글을 그대로 공부한 다음에 현대적으로 응용해야 제대로 적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경계를 오가며 옛글의 맛과 뜻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해설본이 바로 대산 김석진 선생의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산 김석진 선생은 주역학자로 유명합니다. 한길사에서 펴낸 <대산 주역 강의 1,2,3>이 가장 대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80 평생 중 20년을 주역 강의를 하셨습니다. 지난 해 10월에는 팔순연과 회고록 출판 기념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80 평생을 회고하며 <대산석과>라는 책을 내셨다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팔순연에서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께서도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데, 저도 인터넷으로만 이런 소식을 알 뿐, 아직 한 번도 만나뵌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선생이 남기신 책이 있어 가끔 펼쳐보며 인생 공부를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大學》의 핵심이 삼강령과 팔조목을 설명한 부분이라 하지만, 제가 가장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부분은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팔조목 중 성의(誠意)를 설명한 구절입니다.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ㅣ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이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ㅣ니라

    이른바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악취를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 이를 '스스로 쾌족함'이라 한다. 따라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라도 반드시 삼가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하며, 그리하여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가 부끄러움이 없도록 성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가야 한다는 '신독(愼獨)'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신독할 줄만 안다면 그것이 곧 군자요,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평생을 두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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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1 - 와인의 세계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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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 중에서 오늘 어떤 책을 주제로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이원복 교수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제1편 《와인의 세계》로 정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아래의 그림 때문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리지 않나요? 맨 왼쪽 아저씨, 얼마나 마셨는지 입으로 토사물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그걸 누워서 얼떨결에 받아 먹고 있다니... 오른쪽 끝 의자에 앉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 초점을 잃고 졸고 있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부어라 마셔라 정신이 없습니다. 쓰러진 술병 수는 사람 수에 비해 훨씬 많습니다.

로랜드슨(Rowlandson)의 1798년 그림인데, 설명을 보니 18세기 말 런던의 와인마시기 클럽 회원은 반드시 최소한으로 정해진 병수만큼 와인을 마셔야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술꾼들이 보기에는 지상의 낙원처럼 보일지 몰라도 대개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가 지나쳐보입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나이도 지긋하신 분들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지난 주 술들 많이 마셨죠? 혹시 위와 같은 상황까지 가진 않으셨나요? (이런 말을 하는 제 가슴이 뜨끔합니다^^) 연말이라고, 그래도 뿔뿔히 흩어졌던 사람들 한번씩은 만나게 되니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술, 만나서 할 거라곤 밤새 술마시는 것밖에 없으니 송년회 몇 번 하고 나면 몸이 거의 망가질 지경입니다. 이제 겨우 한 주 남았습니다. 모두들 몸 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전인 약 700만 년 전부터 있어 왔다는, 인류 최초의 음료이자



포도 외에는 그 어떤 물질도 첨가하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음료라는 와인도



주거니 받거니,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면, 여느 술과 전혀 다를 바 없어집니다. 유럽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와인을 식사 때 물처럼 마셔왔다가 1820년 대에 와인에도 알코올 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19세기 초까지 식품으로 취급하다가 그 후로 기호품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이 '순수한' 음료에 알코올 성분이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 시각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와인의 세계》에는 와인의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와인 포도의 품종, 양조법 등 와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도 이원복 교수 특유의 지식 전달법으로 방대한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그려놓았습니다. 이 책을 보며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교육 방법이었듯이, 이 책 역시 와인에 대한 새롭고 참신한 소개서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만화라고 가볍게 시작했지만, 다 보는 데는 꼬박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텍스트 양도 꽤 많습니다. 그래도 만화인지라 읽기가 매우 수월해서 와인에 대한 그 어떤 소개서보다 머릿속에 쏙쏙 들어옵니다.

책을 보면 와인에 대한 상식 뿐만 아니라 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늘어납니다. 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와인과 맥주, 청주, 탁주, 기타 곡주와 과실주를 양조주(釀造酒)라고 합니다. 한자 그대로 풀자면, 빚을 양, 지을 조, '빚어 만든 술'입니다. 코냑과 같은 브랜디, 위스키, 아쿠아비트, 보드카, 소주를 증류주(蒸溜酒)라고 합니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찔 증, 방울져 떨어질 류, '쪄서 방울이 떨어져 만들어진 술'입니다. 양조주에 과즙이나 향료를 첨가하여 만든 술을 혼성주(混成酒)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책은 와인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 와인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와인을 통해, 와인 그 자체만이 아니라, 관련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구대륙, 특히 프랑스 와인에 대한 지나친 경외의 감정과 빈티지 차트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아주 산산히 깨뜨립니다. 와인을 마실 때 유독 따지게 되는 복잡한 절차에 대해 그 의미를 제대로 소개하면서도 굳이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 또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거부하는 것과 알면서 무시하는 것은 좀 다릅니다. 와인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하고, 그러나 마시는 행위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랜드슨의 거북한 그림으로 시작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주권 회복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비싼 와인이 반드시 좋은 와인은 아니다! 저렴하다고 나쁜 와인도 아니다! 내 입에 맞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다!"
"수백, 수천의 샤토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에 주눅들지 말자! 와인은 단지 우리가 즐기는 알코올음료일 뿐이다!"
"진정으로 와인을 즐기는 것은 와인 주권을 확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눅들지 않고 와인을 마시는 방법,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와인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음미하는 방법이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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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매콤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1
김용규 지음, 이우일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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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좀 아플 땐 가벼운 책이 좋습니다. 흔히 '청소년용'이라는 딱지가 붙은 책입니다. 사실 이런 분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른이 청소년보다 나을 거라는 통상적인 믿음도 잘못되었거니와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들 중에는 어른용(?)보다 훨씬 깊은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 표현을 쉽게 하여 읽기 편하게 만들었을 따름입니다. 글 쓰는 입장에서는 훨씬 더 많은 내공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청소년용'이라는 색안경 대신 '매우 쉽게 풀어놓은 책'이라 생각하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보통 가방에 두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출퇴근 때 몸 상태와 기분에 따라 책을 골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요 근래에 가방 뿐만 아니라 집 책상 위에 굴러 다니는 책까지 더하면 예닐곱 권 정도 됩니다. 뭐 하나 제대로 붙들고 늘어지지 못하여 끈기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기분에 따라 책을 골라서 읽을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는 장점도 있습니다.



대충 살펴보면, 김용규 선생의 《철학 통조림》과 《설득의 논리학》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 드릴 책은 《철학 통조림》 시리즈 중 1권입니다. 쉽게 풀어놓은 책입니다.《허시명의 주당천리》라는 책도 간간히 보고 있습니다. 가벼운 책이지만 청소년용은 아닙니다^^. 어제 저녁에 이 책을 보다가 기어이 동네 마트로 뛰어가서 '경주법주'를 사서 마시고 말았습니다. 경주법주에서 만든 '화랑'이라는 술 얘기가 나왔는데, 동네 마트에서 '화랑'을 팔지 않아 대신 '경주법주'를 사서 맛을 좀 보았습니다. 《부모마음 아프지 않게, 아이마음 다치지 않게》는 최근 제 책 읽기의 주요 주제인 자녀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루쉰전》은 평전입니다. '책을 배우는 것보다 사람을 배우는 것이 훨씬 쉽다. 쉬울 뿐 아니라 사람 배움에는 가슴에 와닿는 절절함이 있다'는 번역자 유세종 선생의 문구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사람을 배우기 위해 앞으로 자서전과 평전 몇 권을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는 제 '독서유감' 500번 째를 스스로 기념하기 위해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저의 책 읽기가 그저 지식을 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공부하는 데 있음을 재차 자각하기 위한 상징입니다.

《철학 통조림 매콤한 맛》은 책 제목이 참 특이합니다. 지금까지 4권 나왔습니다. 1권 '매콤한 맛'에 이어, '달콤한 맛', '담백한 맛', '고소한 맛'까지 나와 있습니다. 책 날개를 보니 앞으로도 몇 권 더 나올 것 같습니다.

저자 김용규 선생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이지만 꽃나무, 과일나무들로 둘러쌓인 벽돌집에서 궁금한 것이 유난히 많은 딸,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다고 합니다. 책의 저자 소개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자 소개에 등장하는 '궁금한 것이 유난히 많은 딸'이 이 책에서 한몫을 합니다. 《철학통조림》 시리즈는 '내 딸아이에게만이라도 하늘의 별들을 연결시켜 별자리를 그려 보고 갈 길을 찾아냈던 옛 선원들의 아름답고도 지혜로운 항해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아빠와 딸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가 딸을 둔 까닭일까요? 마치 저와 제 딸이 미래의 어느날 대화하는 듯한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제 딸이 좀 더 크면 책 속의 아빠와 딸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제 딸이 이처럼 궁금한 것도 많기를 바라고, 저 역시 거기에 적절히 설명하고 깨우쳐 줄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지혜를 갖길 바랍니다. 딸을 키우면서 든 생각 중의 하나는,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주말에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그 때인 것 같아 지난 주부터 일요일에 집 근처 도서관을 찾습니다. 어제도 근처 '수지도서관'에 갔습니다. 책 읽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옆에서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보면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신선놀음도 없을 성싶습니다.



《철학 통조림 매콤한 맛》은 윤리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윤리학의 의미와 도덕의무론,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공리주의, 결정론과 자유의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리탑탑함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은 참 쉽고 친절하게 위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힘입니다. 쉽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감히 저자의 능력을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이같은 주제를 이리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럽습니다. 제 딸이 조금 더 자라면 이 책을 꼭 읽히고 싶습니다.

저자는 '철학'을 '꼼꼼히 따져 보는 일'이라고 딸에게 설명합니다. 철학에서는 꼼꼼히 생각하기 위해 가상의 문제를 만들어 따져 보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을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라고 합니다. 약속은 왜 지켜야 하나, 거짓말은 언제나 나쁜 것인가, 이기주의는 과연 나쁜 것인가, 착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을 방법이 없나, 아홉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어도 좋은가, IQ는 타고 나는가 길러지는가. 이런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중·고등학생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여러 사고 실험을 통해 이 문제를 꼼꼼히 따져보고 있습니다. 물론 제 눈높이에도 딱이구요^^.

저자는 어지간해서는 내 생각이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지어 말하지 않습니다. 좀 더 꼼꼼히 따져보면서 상식을 깨도록 지도합니다. 그러나 제4장 '착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을 방법은 없나'에서는 직접적으로 아빠로서의 딸에 대한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아빠는 딸에게 세상을 'Tit for tat' 전략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tit for tat은 글자 그대로 풀면 '앙갚음',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철학하는 아빠의 조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딸을 유난히 사랑하는 이 다정다감한 아빠가 딸의 인생 지침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답은 책 안에 있습니다. 저 역시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가르치겠습니다. 궁금하시죠? 무언가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죠? 아들 딸을 둔 아버지들, 직접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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