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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의 주당천리
허시명 지음 / 예담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정심수신(正心修身) 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심부재언이면 시이불견하며 청이불문하며 식이부지기미니라
마음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술로 인해 큰 홍역을 치르고 나니 술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늘상 밥 때면 밥과 술 생각이 동시에 들곤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퇴근길에 시야를 방해하던 술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술 생각이 나지 않으니 저녁에 일을 할 때 생각이 일을 방해하지 않아 좋고, 퇴근길에 술 생각이 나지 않으니 몸이 가볍습니다.
사실 술을 좀 줄이긴 줄여야 합니다.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이 정도 마셨으면 됐습니다. 대학 때 술에 맛을 들인 건, 술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술맛을 제대로 모릅니다.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서울에는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가친척도 하나 없었습니다. 부모를 떠나 홀로 되고 싶어 기어이 서울로 올라왔지만, 지독한 외로움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벽을 보고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하늘 아래 나만 홀로 덩그러니 있다는 그런 느낌을 참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싫어 매일같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단 하루도 집에 그냥 들어가지 않았으며 늘상 누군가와 밤 늦도록 얘기하다 들어갔습니다. 대개가 술자리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니 나중에는 사람이 좋은 건지 술이 좋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 대신 시원한 맥주가 먼저 떠오르고, 용돈의 최우선 용처는 술값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무렵이면 밥 생각과 술 생각이 동시에 납니다. 밥을 먼저 먹으면 술 생각이 사라지고, 술을 먼저 마시면 밥 생각이 사라집니다.
저에게 밥이 그러하듯 술도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술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경험상 술이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긴장을 늦추고 경계를 허물어 속마음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듭니다. 반대로 술이 사람을 지극히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술은 사람 간의 경계도 허물지만 마땅히 가져야 할 자제력도 무너뜨립니다. 쉬이 뱉어 버린 말은 곧 칼이 되어 상대를 공격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는 대개 자제력이 바닥났을 때 벌어집니다. 젊은 날에 술을 좋아하다가 노년에 강경한 금주론자로 바뀐 실학자 이익의 마음도 이해할 만합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죽으면서도 자기 제사상에 술을 올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만, 요지는,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술을 끊는다는 말은 곧 관계를 끊는다는 말과도 같아 아직은 쉽게 실천하기 힘듭니다. 대신 마음을 다스려 술을 적게 마시고도 많이 마신 듯 술자리의 흥취를 돋울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목 : 허시명의 주당천리
지은이 : 허시명
펴낸곳 : 예담 / 2007.9.14 초판 발행, 초판 1쇄를 읽음 (14,000원)
<허시명의 주당천리>를 쓴 허시명은 주당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술에 대한 책만 몇 권째 내고 있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합니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을 좋아하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첫 책을 낼 때는 책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썼다가, 술을 찾아다닌 지 8년이 되니 이제 서문에 술을 조금 마실 줄 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기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 대한 책을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술 마시고 시 한 자락 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이 책에는 여러 지방의 술이 등장합니다. 경기도의 장수막걸리, 부자, 화요, 강원도의 단오 신주, 충북의 청명주, 문경의 호산춘, 상주 곡자, 영양 막걸리, 대구의 금복주, 경주법주와 화랑, 여산 호산춘, 무주 머루주, 전주 이강주, 보성 강하주, 흑산도 보리술, 진도 홍주, 진주 곡자, 경남 무학소주, 제주도 감귤주와 오합주 등.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주의 맥이 끊긴 사연, 박정희 시절 경주법주가 유일하게 전통주를 만들게 된 사연, 청주가 일본 술이 된 사연, 우리나라 소주 도수의 역사 등 술에 대한 상식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술 이야기보다는 술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술 향기보다는 사람 내음이 더 납니다. 묵묵히 술을 빚는 사람들과 술을 벗 삼아 산 옛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디도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술이 '덕(德)'이 되도록 마시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