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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여운 바보 같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요. 내 약속하지만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소.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척할 게 틀림없어. 알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증명하기가 무척 어려운 법이니까. 그가 당신에게 푹 빠져 있다니까 하는 말인데, 그는 당신을 놓치기 싫은 건지도 몰라. 내 맹세하지만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나도 그것만큼은 용납하기 어려울 거요." (p.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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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눌 때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정작 상대에게서 모든 것을 얻었다 싶을 때 가차없이 내버리는 것 또는, 나몰라라 하는 것. 남의 것일 때 자기 것인양 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자기 것이 되겠다 하면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관계. 임자있는 남자에게 임자있는 여자란 그런 존재. 거기다 이 작품은 그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방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 직후, 문 손잡이 소리에 남편이 돌아온 줄 알고 예민해 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어린 아이같이 달래는 불륜남. 그녀, 그러니까 여주인공 키티에 의하면 모든 것을 갖춘 따도남으로 소개되는 찰스를 벌써부터 세글자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본의 아니게 자꾸 그런 걸 보면 분명히 나쁜놈.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키티가 남편에게서 버려져 자기에게로 해바라기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내 눈엔 다 보여. 에잇, 나쁜놈. 암만 멋있어도 이런 놈은 사양해야 되는데 여자들이 가끔 정신줄을 놔버리는 게 문제야. 쳇, 대체 수컷들에게(더불어 암컷들에게) 사랑이란 뭐란 말인가.
자기를 엄청 사랑해주는 남편 월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 되려 들켜서 그에게 쫓겨났으면 하고 바라는 키티. 아까 말한 그 문고리 돌리는 소리는 기우가 아니라 사실이었고, 균열은 차차 드러난다. 견디지 못한 건 월터가 아니라 그녀쪽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그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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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pp.9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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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남자에게 왜 이런 짓. ㅠㅠ 그치만 이해한다. 헌신적인 남자에게 사랑받는 일도 좋지만 나를 미치게 만드는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일도 그 못지 않은 거니까, 키티처럼. 그녀가 월터와 결혼한 건 애초 동생보다 먼저, 더 나이들기 전에, 엄마의 잔소리를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니까.
여기서 싸움의 기술, 말을 많이 하거나 먼저 분노하면 지는 법. 본성이 조신하지 못하고 흥분 잘하는 키티는 조근조근 그리고 또박또박 냉소를 날리며 내뱉는 남편에게 절대로 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00페이지까지 읽었을 때, 그들의 싸움을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나는 할 일을 해야 했다. 거기다 나는 환상성이 강했다. 미혼이고, 달리 사랑과 결혼을 꿈꾸지도 않았다. 굳이 선택하라면 연애나 동거 쪽이 재미있겠다 생각하는 편. 평생 함께 알콩달콩도 좋지만 약간의 불확실성을 안고, 내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오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쪽. 물론 아슬아슬하게 저울질 할 때가 가장 클라이맥스. 철없는 나는 여전히 남편이 있는 여자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믿는다. 현실은 그와 달라야겠지만 결혼이 주는 책임감을, 기혼의 여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선 곤란하니까. 사실 <인생의 베일>은 인생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직은 삼각관계(그것도 무지 어설픈) 뿐이라서, 역시 읽어야 아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