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은 왜 펼쳤던가. [현대프랑스철학사]는 각장마다 글쓴이가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글은 읽을 만했지만 어떤 글은 암호 수준이었다. 철학자들의 키워드가 뭐였는지 훑어보고 그냥 책을 덮어야 했는데, 강의를 들었다. 아트앤스터디에서 프랑스철학 관련 강의를 들었는데, 들을 때는 어렵지 않은 것 같았는데 책을 보면 내가 뭘 들은 건지... 무엇을 모르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될 때 앎과 가까워져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지만. 


이달에 시집을 많이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니네. 아마 백은선 시인의 시를 읽어서 그렇게 느꼈나 보다. 처음에 [가능세계]를 읽고 다시는 이 시인의 시를 읽지 말아야지, 했었다. 길고 난해했다. 그랬건만 [도움받는 기분]이라는 제목에 끌려 주문했다. 읽다 보니 이 시인은 시를 입체적으로 쓰는구나, 싶었다. 입체적인 시를 평면으로 눌러서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뭔가 뒤죽박죽된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읽으니 [가능세계]도 읽을 만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훨씬 많았다. 이해가 목적이 아닌 시를 읽으면서도 나는 계속 이해하려고 한다. 이해에 길들여진 개처럼.


졸다 깼다. 뭐라고 적었다 지웠다. 글에는 시간이 없다. 공간이 없다. 글로 다 표현해야 한다. 성가신 일이다. 성가신데 읽고 쓴다.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한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다. 그러면서도 잘 읽었니 못 읽었니, 제대로 썼니 못 썼니, 하는 마음이 인다. 그런 나를 힐끗 본다. 해가 길어졌다. 저녁할 때가 되었는데 날이 환하다. 밖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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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는 기분-백은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필름-백은선

천사의 탄식-마종기

모음들이 쏟아진다-정재학


계속되는 무-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암흑의 핵심-조셉 콘레드

준최선의 롱런-문보영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백은선

글쓰기에 대하여-마거릿 애트우드

현대프랑스철학사-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에크리-김석

HOW TO READ 라캉-슬라보예 지젝

베르그송과의 1시간-이명곤


-다시-

가능세계-백은선

철과 오크-송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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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 2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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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05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05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4월

 

 

무슨 책을 읽었나 책장을 보니 이미 읽은 책이고,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 표시까지 해 둔 책인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이렇게 정리 안 하면 시간이 지나 안 읽은 줄 알고 다시 읽었을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글자들이 내 방에 떠다니다 창문 밖으로 날아가버린 기분이다. 시집을 덮을 때 다시 읽게 되는 시는 좀 적어 둬야지 싶다.  

 

황인찬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구관조 씻기기를 흐르듯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멈춰 가만히 보게 되는 시가 많았다. 이렇게 다르게 읽히는 것이 읽을 때의 시간이나 환경 때문인지 내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르는 시는 모르고 아는 시는 알고 와 닿는 시는 와 닿고 경이로운 시는 경이롭다. 이런 모든 시가 한 시집에 있다는 게 좋다.  

 

이하석 시인의 코 떼인 경주 남산은 차분하고 담담한 책이다. 자분자분 남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토리텔링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그저 바윗돌인데 전설이 얹히면 특별한 장소가 된다. 나는 기행문과 요리책을 싫어하는데, 다녀온 곳은 예외다. 남산은 가 보긴 했는데 너무 오래 돼서 어렴풋하다. 삼릉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삼릉에서 갑자기 비를 만나 홀딱 젖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하석 시인의 그림도 몇 점 들어 있다. 시인이 그림을 그리시는 줄 몰랐던 터라 신기하기도 하고, 그림이 있어 책이 좀 부드러워진 느낌도 있었다. 

 

이 달에는 병원을 여러 번 갔다. 얕은 병이 깊은 병이 될까 봐, 없던 병이 새로 생길까 봐. 병원에 가면 환자가 아니어도 환자가 된다.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번거롭기도 하다. 6개월 뒤 검사 예약을 잡자고 하는데 동네 의원에 가서 검사 받겠다고 했다. 무슨 검사가 의원에는 없다는데 필요하면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의원에서 의뢰 받아 간 거니 필요하면 또 의뢰해 주겠지, 하면서. 병원 다니다가 병날 것 같다. 다 필요해서 하는 것이겠지만 병에 대한 대비가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나저나 모두 아프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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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사물들-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이현승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신미나

비-원구식

표류하는 흑발-김이듬

눈사람의 사회-박시하

놀이터-류인서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이병률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권민정 외

한 사람의 불확실-오은경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하외숙

나의 말은 계속 자라고 있어-오남희

문파문학2021봄-문파문학사

 

코 떼인 경주 남산-이하석

한국현대시사-오세영 외

현대시작법-이승훈

남자의 자리-아니 에르노

감정의 혼란-슈테판 츠바이크

알레프-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불가능-조르주 바타유

 

-다시-

구관조 씻기기-황인찬

희지의 세계-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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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02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주 남산은 저도 너무 좋아하는 산이라 한동안은 진짜 자주 갔었는데, 이런 책이 나왔다니 기쁘네요. 한번 찾아봐야겟어요.

이누아 2021-05-04 12:05   좋아요 0 | URL
계간 작가세계에 2003년부터 3년 동안 연재한 글을 세월에 맞게 고치고, 내용을 보완해서 출간한 책이라고 해요. 사진 작업도 다시 했다고 하네요. 그래도 포털에서 여러 사진을 찾아 보면서 읽었어요. 이하석마애보살께 담담하게 이야기 듣는 기분이었어요.^^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p.127

 

에르노식 애도일기라고 해야 할까. 딸을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 이야기다. 지식인 딸과 노동자 아버지로 바꿔 말하려니 너무 딱딱하게 느껴진다. 남자로서의 아버지보다 그냥 아버지 이야기 같아 아버지의 자리가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글이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게 없어서 좋다. 책을 덮으면 다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을까. 나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유학자 아버지와 서울대생 아들을 둔 노동자. 에르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충실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러나 달리 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돌아가셨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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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시(哭詩)—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_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희곡, 평론 등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 김명순(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에 시달리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로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이 실린 잡지들.

 

 

-문정희,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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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30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는 구절이 확 와닿습니다.
남성우월주의의 극단적인 예를 보는 듯 우울하고 슬픈 시네요.

이누아 2021-04-30 22:55   좋아요 0 | URL
발표된 지 좀 됐고, 내용도 충격적인데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성폭행 사건 관련해서는 최근에 와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아서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무척 많았지요. 이 일은 문단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한국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무겁게 읽히고요.

독서괭 2021-04-30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알게 된 작가네요. 찾아보니 <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나와있군요.
정말이지 너무 처참하고 가슴 아픈 일이네요..

이누아 2021-04-30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이 나와 있다는 걸 아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어요. 시만 읽어도 잘 잊어지지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무거운 말

_신미나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온다

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신미나,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 2021)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홍역을 앓고, 학교를 한 달 이상 가지 못했다. 홍역이 나았지만 소풍을 갈 수는 없었다. 엄마는 오빠를 따라가야 했다. 엄마는 오빠의 소풍 가방과 똑같이 내 소풍 가방을 싸 주셨다. 집에 있더라도 김밥과 과자를 맘껏 먹으라고. 홀로 남겨진 나는 집에만 있지 않고 밖에 나갔다. 아마도 누워 있다 바로 나가서 헝클어진 머리에, 옷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아이가 쟤, 거지 아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쳤다. 그 순간 나는 고아고, 거지였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다. 말은 이렇게 무겁고, 무섭다. 그런 말은 한 인간을 불태우는 성냥개비, 라이터, 가스통이 되기도 한다. 불붙은 얼굴은 재가 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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