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성전
홍신문화사 편집부 엮음 / 홍신문화사 / 2003년 4월

 

제자들이여, 나는 승의와 밥과 좌구와 약재를 얻고 있기 때문에 입이나 행동이 부드러운 제자를 참된 온유한 제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제자는 승의와 밥과 좌구와 약재를 얻지 못하면 입도 행동도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을 높이 공경하고 입도 행도 온화하다면 나는 그 제자를 온유한 제자라고 부른다...너희들은 어떤 말로 얘기되더라도 '결코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나쁜 말은 내 입에서 새지 않는다. 동정과 애련을 가지고 자비의 마음에 주(住)하며, 내심에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리라. 그 사람들을 자비를 수반한 마음을 갖고 감싸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p.213

또한 어떤 때는 아버지가 자식 때문에 울고, 자식은 어버이 때문에 울고, 형제와 부부도 서로 슬퍼한다. 무상이 그 원인임을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사물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며, 머무르는 것은 없다. 가르쳐 이끌더라도 믿는 자가 적으므로 생사의 흐름은 그칠 때가 없다. 이와 같은 중생은 어리석고 성품이 사나워서 가르침을 믿는 일이 없고, 깊은 사려가 없으므로 단지 눈앞의 낙에 빠지고, 애욕에 마음이 흐려져 도에 이르지 못하고, 노여움에 빠져들어 이리와 같이 재물이나 색을 탐한다. 이 때문에 악도의 괴로움에 빠져 망집의 길이 그치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p.489

세존은 톱의 비유로 설하여, 비록 도둑이 쌍날 톱으로써 그대의 몸을 자르더라도 어두운 마음이 되는 자는 내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 자이다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노력하여 정념을 깨지 않고, 신체는 느긋하니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있자! -p.541-542

수바드라여, 업이 다하면 고가 다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번뇌가 다하여 업고(業苦)가 다하는 것이다. 수바드라여, 만약 업의 인연을 끊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면 일체의 성자도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그것은 과거의 본업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도는 능히 시작과 끝이 없는 무서운 업까지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고행을 닦아서 도가 얻어지는 것이라면 일체의 축생도 또한 모두 도를 얻게 되리라. 그러면 먼저 그 마음을 조복함이 좋다. 몸을 조복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참된 해탈의 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p.702

제자들이여, 욕심이 많은 사람은 바라는 일이 많으므로 고뇌 또한 많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금심도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아첨하는 마음으로 남의 뜻에 영합하는 일도 없다. 또 눈과 귀의 욕망 때문에 끌리지 않는다. 마음은 평탄하고 근심이 없으며, 일에 손을 대더라도 여유가 있어 항상 불만스러운 일이 없다. 곧 여기에 열반이 있다. -p.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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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성전
홍신문화사 편집부 엮음 / 홍신문화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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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문예마당에서 나온 같은 제목의 책과 이 책을 혼동해서 구입했다. 그러나 둘다 불교성전편찬위원회에서 엮은 것이니(알라딘에서 홍신문화사 편집부가 엮었다고 소개한 것은 잘못이다) 같은 내용이 아닐까? 아무래도 문예마당에서 나온 책의 주나 다른 부록을 생략한 책인 듯 싶다.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불교성전]이 부처님의 생애와 초기경전, 대승경전의 내용들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데 반해 이 책은 부처님의 생애라는 큰 틀 안에 여러 불교경전의 내용들을 삽입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십이장경], [법구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등 거의 모든 경전들의 내용 중에 편집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부처님의 삶의 흐름 속에 녹여 보려고 시도했다.

한 권의 책에 그 많은 책들을 한 사람의 생의 흐름에 맞게 편집해서 재구성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너무 무리한 시도였을까? 중간 중간에 내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갑작스레 법화경의 한 구절이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주거나 사무량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비희사 중 자(慈)에 대한 구절만 있다든지 해서 황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잘 읽었다. 잠들기 직전에 아주 조금씩 읽었다.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힘들지, 잘 자거라"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깨어 있거라" 하셨다. 그런데도 평온이 찾아왔다. 그 평온을 베개로 잠들었다.

"생은 끝났다. 수행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로부터 다른 생은 없다"라는 구절을 매일 열 번씩 읽었다. 이 말이 내 유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나도 부처님처럼 깨닫고, 행하고, 말할 수 있다면...

책을 읽고 자면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셔서 불교공부를 하고 싶으니 불교사전을 빌려 달라고 하셨다. 꿈 속에서 나는 이 책과 불교사전을 드렸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다시 그 꿈이 생각난다. 아버지를 모신 절에 가서 이 책을 올려야 겠다.

한 권의 책으로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소 부족한 점이 있지만 읽는 동안 평온했고, 희망할 수 있는 유언도 생겼고, 아버지께 드린 선물도 마련한 셈이니 내게는 고맙고 고마운 책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분석하지 않고 나처럼 조금씩 읽으려는 이가 있다면 평온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천한 자의 집이라도 만약 왕이 찾아갔다면 세상에서는 귀하게 생각"(p.696)하듯 책 편집이 부족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적혀 있으니 이 책이 더없이 귀하게 여겨진다. 다음 수정판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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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3-0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은 끝났다. 수행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로부터 다른 생은 없다' 캬..정말 아름다워요. 무언가 완성되고 충만한 듯한 느낌이 드는 문장입니다. 저, 지금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잼나요! 근데 불교서적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불교성전]이 적당한 책일까요? 혹시 아니라면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한 권 추천해 주십쇼. 이누아님께서 리뷰감으로 채택하신 아래 책들을 지금 뚜룩~ 훑고 있습니다만, 녜녜.
 

행복 요리법
마티유 리카르 지음, 백선희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8월

 

본능적으로 우리는 긁음으로써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려고 든다. 그러면 물론 당장은 기분 좋지만 가려움은 금세 다시 찾아오고, 전보다 한층 더 참기 힘들어 결국엔 피가 날 때까지 긁게 된다. 완화와 치유를 혼동한 것이다. 우리가 집요하고도 강렬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긁지 않기로 마음먹는 것은 긁는 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긁어서 결국 생살이 드러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요, 가려움증의 불이 절로 가라앉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그 고통을 멈추게 하는 길임을 경험을 통해 아는 까닭이다. 따라서 필요한 건 불건전한 억압도, 도덕이나 관습도 아니다.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려 하다가 고통이 계속 이어지는 것보다는 지속적인 행복이 낫다고 판단하는 지혜로운 행동이 관건이다. 분석과 양식에 토대를 둔 실용적 행동이 관건인 것이다. 2세기 인도의 불교철학자 나가르주나는 이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가려울 때 긁는 건 참으로 기분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가렵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의 욕망들을 만족시키는 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자유를 얻는 데 주된 장애물은 노력이 요구되는 어떤 형태의 내적 변화도 거부하려는 마음이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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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요리법 -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마티유 리카르 지음, 백선희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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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부제가 시선을 끌었다. 행복하게 존재하지 않느니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로 보였다.

행복...어떤 친구는 행복한 사람은 행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불행한 이들의 말이라고. 그럴까? 아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이 건강에 대해 동경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사람이, 혹은 건강을 유지하려는 사람이 건강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장기적으로 매우 적절한 일이다. 한 가수는 공연 이야기만 해서 왕따를 당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추구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친구는 아마 행복이 어떤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행복은 땅에 심고 거름을 주는 감자처럼 가꾸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 고전적인 질문에 대해 나는 평온이라고 답한다. 혹은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답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그것은 좋은 느낌을 주는 단어다. 그러나 혼자만 평온하고 혼자만 기쁜 것이 가능할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프란치스코]에서 프란치스코는 어떤 이들이 천국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웃이 지옥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 한다면 그들이 천국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하고 의심한다. 아마도 지옥에 있는 이웃을 자신이 있는 평안한 곳으로 이끌고자 애쓸 것이다. 범위를 좁혀보자.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프거나 시험에 떨어졌는데 자신이 카드놀이에 이겼다고 마냥 즐거워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소식을 들었다면 카드놀이 자체를 그만둘 것이다. 범위를 넓혀 나가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평온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은 타인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내가 읽은 이 책은 자신의 평온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이며 그것을 유지하고 공유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다. 저자가 이타심을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행복으로 가는 첫번째는 역시 자기 수행이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숲 속에 몸을 숨기는 상처 입은 사슴처럼 은둔지의 조용한 고독 속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 은자가 명상에 헌신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처지이거나 명상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선을 끌어내겠다는 생각으로 행복과 고통의 매커니즘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잠깐씩 짬을 내서나라도 고요한 가운데 머물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행복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무지, 즉 고통의 완전한 해소를 수반하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면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행복도 고통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정이 필요하다. 책의 앞부분이 자아에 대한 확신이나 우울과 분노, 욕심, 복수나 증오 등의 감정들이 우리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는 점이 이것 때문이다. 행복이나 깨달음이 갑자기 결심한다고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이미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다 하더라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면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행복해졌는가? 얼마간 그렇다. 행복이란 단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책에서 보여주는 불행해지기 위해 끙끙대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어떤 실천 없이도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변화는 주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감정조차 제대로 조절되지 못한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이 문제가 없다가도 금방 상황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점검하라고도 한다.

나는 스스로는 아주 조금 노력하고 너무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무엇을 했다고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매일 깨달음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수행하지 않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실천하기는 더 어렵지 않겠는가? 내 안에 불성과 깨달음과 행복이라는 것이 심겨져 있다. 감자처럼 가꾸지 않으면 그것들이 심겨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지.

저자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태도와 방법을 보여주는 구절을 덧붙인다.

"세계관을 바꾼다고 해서 갑자기 천진한 낙천적 사고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요, 역경을 보상해주는 인위적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혼란에서 비롯되는 욕구불만과 불만족이 우리 일상의 몫이 되는 한, 끊임없이 "나는 행복하다!"를 되풀이하는 것도 허물어진 벽을 다시 칠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일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인생을 '장밋빛'으로 보자는 얘기는 아니요, 세상의 궁핍과 고통에 대해 눈을 감자는 얘기도 아닌 것이다.

행복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속시켜야 할 어떤 열광적 상태가 아니다. 다만 증오나 강박관념처럼 정신에 말 그대로 독이 되는 정신적 독소들이 제거된 상태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좀더 이해가 깊어져야 할 것이며,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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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2-20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누아님, 저..저..저널리스트 아니신가요? 아, 왜 글케 글을 잘 쓰신댜..너무 잘 쓰셔서 리뷰와 인용하신 인용문이 헷갈려버립니다. 문장이 정말 단정해요..보관함에 쏘옥~입니다..캬..이 주의 마이리뷰, 기대해봐도 좋겠어요!

2005-02-20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2-2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따라와서 잘 읽고 갑니다.^^

2005-02-2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움같은그대 2005-05-04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이책 처음에 한번 읽고 좀 어려운 부분도 있어서... 한번더 읽고 또 이해안되는 부분은 다시 읽고... 그랬는데 님처럼 이렇게 훌륭하게 이해는 되지 않았었는데... 님이 남기신 글 읽고 좀 더 이책에 대한 이해를 넓힐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책 정말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계속 빌려보다가 이번 기회에 사고 싶은데 이해하는 게 시간이 걸리지만 정말 좋은 뜻을 답고 있는 책인것 같습니다.
 

홍순지의 [노귀재] 노래가사를 어디 적어 둔 듯해서 찾다가 예전에 쓴 글이 보였다. 노래가사는 찾지 못하고 그 글을 읽었다. 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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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한 선생님은 공부 대신 전생·가위눌림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그날 집에 가서 그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꽤 긴 편지로, 내용은 나름대로 심각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이 윤회를 한다면 전생의 전생의 또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내가 존재하는가? 무엇으로 전생의 나를 현생의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최초의 나는 우주 탄생 때 생겨난 것인가...등등.

그 편지 덕에 점심시간에 선생님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아무 것이나 질문을 하라고 하셨다. 그 복잡하던 문제들은 다 어디로 달아나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은 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나요?"
였다.

이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다.

"왜 '왜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나요?'라고 질문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한 뒤에 그제야 사람들을 사랑할 겁니까? 사람들을 핑계대지 마세요. 스스로 하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나 질문은 '사람들'로 시작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로 시작하세요. 스스로 모를 뿐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이 지구에도 있습니다. 만약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 최초로 되어도 좋을 듯합니다."

그때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말을 할 때마다 내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핑계로 사용되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 그러는데""사는 게 다 그렇지"하는 말을 쉽게 한다. 무서운 말이다. 원효 스님 말씀처럼 '오라고 유혹하지도 않는 악한 길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 덩달아 서 있다면 손 꼭 잡고 감옥으로, 지옥으로, 혹은 사는 게 다 그런 소굴로 향해 갈 것이다. 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선지식들과 경전들이 소리쳐 나를 불러도 나 자신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가상의 사람들에게 나를 맡겨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의 저 끝에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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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때의 충격!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이 글을 쓴 날짜를 보니 재작년이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인데 되새기고 되새긴다. 안 되새겨도 될 만큼 몸에 익으면 좋을텐데 아직 그러지 못한 탓인지...새삼스레 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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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2-0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이세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타인에게두 역시 그만큼의 상처를 주더라구요. 물론 제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랫만에 뵈니 반갑습니다. 이제 종종 좀 뵙고 그럽시다!

혜덕화 2005-02-07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정말 그래요. 절하고부터 제가 바뀐 점이 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은 왜 >로 시작하던 말들이, <나는 왜> 로 바뀌고 있다는 거죠.
고교때부터 철학적이었네요. 전 공부도 못하면서 공부하느라 그런 얘기들어도 저런얘기도 있나보다 흘려들었을텐데요.
즐거운 설 보내세요.

이누아 2005-09-0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설 잘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의 질문은 당시 세 가지였습니다. 위의 질문이 첫번째 질문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왜 어떤 사람은 배불러 죽고, 어떤 사람은 배고파 죽습니까"였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였습니다. 지금은 그때처럼 두렵지는 않은데 그때는 늘 죽을 것만 같았거든요. 선생님은 각각의 질문에 각각의 답을 주셨습니다. 해답을 다 얻은 듯 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체득되지 못한 말들은 허공에 가득합니다. 이 질문을 한 기억이 또렷합니다. 이번 생이 끝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질문하는 고등학생인 제 자신 앞에 앉아 웃으며 사랑과 평등 그리고 삶과 죽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평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