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닫히고

 

 

해가 지고 있어. 문 닫기 전 도서관에서 흐르는 음악처럼 노을을 먼저 울리며 낮의 문이 닫히고 있어. 어두워지기 전엔 사물이 더 진하게 보여. 나뭇가지를 봐. 더 검고 뚜렷해. 조금 더 어두워지면 나무는 나무의 시간을 가지겠지.

 

하루 종일 공을 쫓던 아이들은 저녁이 너무 빨리 왔다고 투덜거리고, 반찬거리를 걱정하는 사람과 퇴근길 정체를 염려하는 사람이 모여 앉아 뉴스를 보겠지. 뉴스 속에는 낮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대겠지.

 

밤은 조급하지 않아. 느릿느릿 거대한 그림자처럼 와. 일은 끝났고, 식사도 마쳤으니까. 잠들 수 없는 사람만이 실핏줄 터진 눈을 껌뻑일 뿐 모두들 어둠을 덮고 하루를 마치겠지. 기슭아,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게 뭔지 알아? 자기 자신이야. 어둠 속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 자기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휴대폰과 책 속으로 빛을 찾아 헤매겠지.

 

압력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고 있어. 노을 음악은 끝나고 이제 정말 저녁이야. 곧 저녁은 저 녘으로 가고 밤이 오겠지. 나날이 오던 대로, 그러나 늘 똑같지는 않게. 

 

 

 

 

하루

_장하빈

 

 

 

 

밥숟가락 들었다 놓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다

하얗게 피어난 밥 한 공기

시래깃국 말아 후루룩 넘기는

아침상 물리자마자

쪽문으로 들어온 이웃집 멍멍이

개똥 차반 차려놓고 가는

따뜻한 저녁 맞는다

식탁 귀에 놓인 앉은뱅이달력

당기면 하루가 오고

밀치면 하루가 갔다

허공의 까치밥 쳐다보는 사이

한 생이 지나갔다

 

-장하빈, 까치 낙관(시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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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그날

 

 

어제는 대구 지하철 참사 16주기였어. 192명이 죽고, 148명이 부상을 입었어. 그들 외에도 그곳의 생존자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병을 얻었을 거야. 한 사람의 방화가 그들을 다 죽인 게 아니야. 화재가 난 전동차의 기관사가 우왕좌왕하고, 마주 오던 전동차의 기관사도 탈출했어. 경고음이 울려도 기관사 보고가 없어서 사령실에서는 오작동으로 파악했어. 물론 운전사령실의 대응도 엉망이었지.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 아비규환이었지. 세월호가 생각나지 않아?

 

언젠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 그들은 폐쇄된 공간에 못 들어가고, 큰 소리를 두려워하고, 작은 일에 크게 화를 내고 있었어. 그들은 아직도 그 지하철에서 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어.

 

죽은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도,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아파. 16년이 지났다고 그만 아프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정말로 그 사람들은 아직 거기 있거든. 어떻게 하면 거기서 나올 수 있을까? 말하고, 말하고, 말해야 겨우 나올 수 있어. 그 현장과 한 덩어리인 그들을 떼어놓을 수 있는 건 말하는 거야. 억울하다고, 슬프다고,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 , 하며 죽어갔던 거기 그냥 있는 것 같거든.

 

세월호 사건 이후에 겨우 몇 년이 지나고 그 사건 이야기를 지겹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너무 아픈 이야기는 피하고 싶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입 다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하철 참사에 대해서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왜 그럴까? 아픈 사람들을 조롱해서 그들이 얻는 게 뭘까?

 

그 당시에 오래 연락이 닿지 않던 친구가 메일을 보내왔어. 혹시 내가 그 지하철을 탔을까 봐 걱정이 돼서 안부를 물어온 거였어. 거기 있었으면 그게 누구라도 죽을 수 있으니까. 우리는 모두 배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리를 건너고, 백화점에 가니까. 근데 비슷한 사고가 나도 외국에선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는 경우는 드물대. 우리가 대충 살고, 때로 대충 살기를 강요당하고, 사고가 나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안타깝고 슬픈 날들이 너무 많아.

 

 

 

서시

_김종삼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이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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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의 봄

 

 

 

 

학교에 오면 안 돼요

8, 홍역

잠 많이 자라고 쳐둔 커튼 아래

눈을 감았다 떴다

 

엄마가 알아 오신 학교숙제를

엎드려 끄적끄적

커튼을 걷으니 눈부셔

 

사과 하나 깎아 주시고

물끄러미 보시던 엄마,

 

업어 줄까?

 

갈 데도 없는데

갈 수도 없는데

엄마 등에 업혀

햇살 속에

 

 

 

동시 같지? 초등학교 1학년 때 홍역을 앓았던 이야기야. 어쩌다 예방 접종을 안 한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엔 감기인 줄 알고 병원에 다니다 알게 됐어. 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해서 집에서 지냈는데 엄마가 동네 친구한테 물어서 숙제를 알아오셨어. 매일 숙제 조금 하고 뒹굴뒹굴. 밖에도 못 나갔지. 때때로 엄마가 저렇게 업어 주셨어.

 

엄마가 다리가 아파. 무릎 연골이 조금 파열됐대. 엄마는 벌써 70대 중반이야. 산골 출신이라 산을 오르거나 오래 걷는 건 나보다 더 잘 하셨어. 주변에 환갑을 넘기면서 무릎 안 좋은 분들을 많이 봤는데 그건 우리 엄마 이야기가 아니었지.

 

근데 작년 여름 지나고부터 무릎이 조금 아프시더니 이번 설 지내고 아프다고 하셔. 명절 끝에 세 번이나 산에 가서 자식들 가족을 위해 빌고 오셔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 안 움직이고 조심하고 치료 받으면 낫긴 한다니까 다행이지만 다리가 아프면 정말 답답해.

 

요즘은 언니가 하루에 몇 시간 언니 집으로 모셔 가서 함께 있어. 조카가 아기를 낳아서 엄마는 증조할머니가 되었어. 아기가 있으니 집이 북적거리는 것 같아 그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덜 심심하실 것 같아. 엄마가 그냥 가만히 계셔도 이상하게 아기가 잘 안 운대. 엄마는 햇살을 품고 있는 걸까. 엄마가 곁에 있으면 갓난아기도 따뜻하고 편안한가 봐.

    

내가 옷깃을 여미는 이 순간에도 봄은 오고 있겠지? 엄마가 어서 나아서 봄나들이 가면 좋겠다. 나중에는 마음으로라도 내가 엄마를 잘 업을 수 있으면,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엄마의 봄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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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함께

 

 

설날 연휴에 텔레비전에서 영화 신과 함께를 하던데, 볼 상황이 아니어서 나중에 웹툰을 봤어. 이승편 마지막회에 저승사자들이 한꺼번에 6명을 데리러 가는 장면이 나와. 베스트댓글에 용산참사 때 죽은 6명을 언급한 걸 봤어. 그들은 2009120일에 죽었어. 그날은 내가 아이들을 낳은 날이지.

 

아이들은 2008년 크리스마스 때 태어나고 싶었나 봐. 그때 급하게 병원에 갔더니 바로 아기를 낳으면 심장과 폐가 다 자라지 않은 상태라 평생 아플 거라고 했어. 분만 대기실에서 2주를 보내고, 일반 병실에서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버텼어.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태어났어. 대신 내 심장이 커져 있었어. 나는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어. 아이들이 괜찮으니까. 아이들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면 더 힘들었을 거야. 다행이었지.

 

 

내가 아이를 낳는 시간, 아이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모,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생명이 다시 그런 부모가 되어 보금자리를 지키겠다고 싸우고 있었어. 그리고 죽고 다쳤어. 누구는 사망한 철거민 5명 중 몇이 전문 시위꾼이었다고 하지만 경찰이나 철거민이나 시위꾼이라 불리는 이나, 누구라도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어. 그들이 죽은 날짜를 보고, 내가 아이를 낳은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아.

 

10년 전에 있었던 가슴 아픈 옛날이야기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지금도 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하나, 걱정하며 무너져가는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어. 철거의 결과가 원주민을 내쫓는 것이라면 원만한 철거는 존재할 수 없어. 집을 잃고 있는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 '신과 함께'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하기를.

 

  

 

철거

 _백무산

  

 

아무리 봐도 손목뼈다

재개발 현장 폐기물 하치장

벽돌과 슬레이트 조각과 철근 잔해가

뒤엉킨 거대한 쓰레기 무덤 속


부서진 액자 뜯겨진 꽃무늬 커튼

니스 칠 벗겨진 손때 닳은 문턱

결혼식 흑백사진 뜨개질 대바늘

유치원 가방 삼각자 물안경

나훈아 테이프 동의보감 토정비결

 
뜯어낸 것이다 불법광고물 뜯어내듯이

누군가는 백골이 되도록 누워 있었고

 
레이스 달린 속옷과 프라이팬과 아이들 상장

오래된 교과서와 콘돔과 약병과 벼루

복권과 포마이카 밥상과 청십자 찍힌 안전화

 
긁어낸 것이다 눌러 붙은 장판 긁어내듯이

포클레인이 지붕을 찍어내고 아우성이 들리고

철거반원들이 울부짖는 사람들을 질질 끌어낼 동안에도

지하 셋방에서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귀도 눈도 썩어 없었으나 그것들을

손목은 끝내 붙들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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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5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르몬

 

 

평소보다 답답하고 쉽게 화가 날 때가 있어. 별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짜증스럽지, 싶다가도 달거리를 하면 거짓말처럼 번잡함이 사라져. 월경전 증후군이었던 거야. 아주 조금의 호르몬으로도 평소의 나에게서 멀어질 수 있어. 사춘기가 그랬듯이 갱년기도 그렇게 오겠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를 얼마나 쉽게 가져오는지. 반대의 경우도 있어.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몸과 마음의 성별이 맞지 않은 상태에 있잖아. 몸을 바꾸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아. 여자에서 남자로 전환중인 분이 호르몬제를 맞으니까 성욕이 5배는 증가한 것 같다고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 의지와 상관없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그렇게 되나 봐. 마음에 맞추려고 호르몬으로 몸을 바꾸는 중이지만 호르몬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줘. 마음이 몸을, 몸이 마음을, 다시 마음이 몸을...

 

유전자와 호르몬 속에서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마음을 돌아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려고 매일 균형 잡기 연습을 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번번이 실패를 경험해. 내 몸속에 얼마나 많은 호르몬들이 출렁대는지 나도 모르게 나를 움직일 때가 있지. 그래서 내가 한 건지 호르몬이 한 건지......나쁘지 않아. 내가 나라고 믿는 나와 조건에 의해 흔들리는 내가 다 나라는 것이, 어쩌면 내가 아니라는 것이.

 

 

호르몬그래피

_김행숙

 

 

 호르몬이여, 저를 아침처럼 환하게 밝혀주세요.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태풍의 눈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 자가 제게 사기를 쳤습니다. 저 자를 끝까지 쫓겠습니다.

 

 당신에게 젖줄을 대고 흘러온 저는 소양강 낙동강입니다. 노 없는 뱃사공입니다. 어느 곳에 닿아도 당신이 남자로서 부르면 저는 남자로서

 

 당신이 여자로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번째, 네번째, 일곱번째 사다리에서 거지가 될 때까지 카드를 만지겠습니다. 녹초가 되게 하세요. 호르몬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눈꺼풀을 내리시고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 검은 스크린이 될 때까지 호르몬이여, 저 높은 파도로 표정과 풍경을 섞으세요. 전쟁같이 무의미에 도달하도록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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