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

 

 

 

정말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어. 서재 지인들 글을 읽다 고개를 돌리니 작심독서실”이 있어. 큰 간판 글씨 아래 마음먹음을 실천하는 공간이라는 글자가 보여. 독서실 이름으로는 제격인 것 같아. 공부를 꼭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독서실에 가지 않겠어.

 

네가 마음먹은 대로 잘 실천하는 편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작심해서 할 만한 일을 함께한 적은 없는 것 같아. 학술 반에서 공부했던 기억은 아주 조금 있고, 놀았던 것만 떠오르네. 난 마음먹은 걸 잘 실천하는 편이 아니야. 너한테 자주 글을 쓰려고 한 작심도 어디 가고 열흘 만에 나타난 것만 봐도 그렇지. 그렇다고 아예 관두지는 않고, 작심을 띄엄띄엄해서 근근이 뭘 하는 편이야.

 

어느 시인이 그러대. 자기는 어떤 일을 끈기 있게 못 한대. 그런데 시는 매번 쓸 때마다 처음 하는 일 같아서 지겹지가 않다고. 끈기 있고, 마음먹은 걸 잘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도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 같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아서.

 

마음먹은 일을 잘 해내는 사람 중에도 마음이 평온하고 건강해서 변함없이 일해 나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박적으로 계획한 일을 해내려고 무리를 하는 이도 있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적절한이 아닌가 싶어.

 

내가 본 사람 중에 마음먹은 걸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은 남편이야. 20년 가까이 아침마다 108배를 하고, 저녁에 운동하고, 사흘에 한 번 나무에 물을 줘. 내가 가장 존경하는 동시에 비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지.

 

요즘 저녁마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 남편 운동갈 때 아이들이랑 나도 따라 나가서 걷다 오는데, 마음먹은 걸 잘 실천하는 남편이 주도하다 보니 매일 나가게 돼. 내가 자신 없는 일은 잘하는 사람 옆에서 하는 것도 마음먹은 걸 오래 유지하는 방법인 것 같아.

 

어제는 아이들이 나가기 싫다고 징징거렸지만 단호한 남편 덕에 운동장에 나갔어. 막상 나가면 운동장 몇 바퀴 돌고 축구공 차면 재미가 나는지 아이들은 더 있다 들어오고 싶어 해. 나도 연초에 마음먹었던 몇 가지 일들이 모래알 빠져나가듯 어디 가고 계획의 손바닥엔 몇 알 없어. 일 년의 절반이 지나고 있어. 그래도 다시 마음먹어 볼까, 싶은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아. 집에서 늘 보이는 저 작심이라는 말이 다시 결심해 보라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먹은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결심한 일이 결심대로 되지 않아도 샛길로 빠졌다 다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다시 그 길에 설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같아. 목적지야 도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차피 걸어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오늘의 결심

 

_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들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김경미,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 2014),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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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이를 보며

 

 

기슭아, 네게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노트북 옆에 이가 있어. 두 녀석 중 누구의 이일까? 벌써 어금니가 세 개나 빠진 작은애 걸까? 이제 큰애도 어금니가 빠지기 시작한 걸까? 어쩌다 빠진 이가 노트북 옆에 있는 걸 보니 나 몰래 컴퓨터를 켜고 뭘 봤나 봐. 귀여운 것들.

 

입안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지만 빠진 이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둬도 되지. 예전에 지붕에 던지기도 했다지만 이 이는 헌 이고, 헌 이가 빠져야 새 이가 나는 거지. 그러니까 제때 빠져주지 않으면 치과에 가서라도 빼야 하는 거지.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애착 형성이야. 영유아검사를 했는데 큰애가 엄마와의 애착이 100%가 아니라는 거야. 애착 관계는 100%가 정상이라고 해. 나와 아이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거지. 어떻게 하면 될까? 고민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들도 듣고... 어쨌든 좋아졌어.

 

이제 아이는 열한 살이고, 몇 년 있으면 사춘기를 겪겠지. 그때 가장 중요한 건 독립일 거야. 애착과 독립 사이가 생각보다 짧은 것 같아. 독립을 원하는 몸과 정신 위에 미성숙한 뇌와 부모의 지붕이 놓여 있는 몇 년을 잘 견뎌야 할 테지. 그 시기가 지나면 정말 독립해야 할 사람은 아이라기보다 엄마인 나라고 생각해. 기껏 힘껏 애착을 위해 노력했건만 이제 애착을 버리려고 애써야 하는 거지. 그렇게 잘 관리하려고 아침저녁으로 닦고 몇 달마다 검진을 받았던 이지만 빠져야 할 때 빠져야 건강한 것처럼.

 

제때 이가 빠지지 않으면 새로 나는 이가 가로로 누워 버리고, 덧니가 되기도 한다고. 누가 아이의 이가 그렇게 자라길 바라겠어. 봄에는 봄의 일이 있고, 여름엔 여름의 일이 있듯이 가을과 겨울도 다 제때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지. 계절처럼 아이들은 금세 변하고, 작년에 산 옷은 이제 더 입을 수도 없는데 그 작은 옷을 억지로 입힐 수는 없지.

 

아이가 무심히 뺀 이를 보고 네게 하려던 말은 다 잊고 이 이야기다. 그래도 아이들은 새로 이가 나니까 좋겠다. 새로 새로 새록새록 자라는 아이들을 빨리 자라라고 잡아당기지 않고, 머무르라고 눌러 앉히지도 않고 그냥 헌 이가 툭 빠지듯 때 맞춰 살 수 있게 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나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시간 다 보내면서, 그래도 엄마라고 작은 일에도 늘 아이 생각이다.

 

 

 

 

도마뱀

_자크 프레베르

 

 

사랑의 도마뱀이

다시 또 달아나면서

내 손가락 사이에 꼬리만 남겨두었네

자업자득이지

내 입장만 생각하며 그것을 꼭 붙잡아두려 했으니까

 

-자크 프레베르,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문학판, 2017),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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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9-05-0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자라면 정작 독립해야 할 사람은 엄마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주변에 며느리 본 사람이 있는데, 금쪽 같은 내 아들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며느리의 마음에 안드는 점을 2시간 동안 성토하는 것을 듣는데, 며느리이자 딸 가진 엄마 입장에선 너무 공감이 되지 않았어요.
또 어떤 친구는 딸을 시집 보내고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것도 들은 적이 있어요.
이런 걸 보면 정작 독립해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인데
마음의 집착을 사랑으로 아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게 됩니다.

이누아 2019-05-18 12:02   좋아요 0 | URL
확인이 늦었네요. 근데 그게 관성의 법칙 같은 게 있어서 애착을 주던 게 집착이 되고, 집착을 멈추려고 하는데 자꾸 몸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요. 마음먹고, 연습하고 해야 독립적인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사

 

 

얼마 전에 할아버님 제사를 다녀왔어. 가족 친지가 모이고, 음식을 장만하고, 축문을 읽고... 이런 형태의 제사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어릴 때 큰집에 일이 있어 제사를 지내기가 어려웠어. 우리 집으로 제사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점집에서 알아보셨는지 제사를 가져오면 큰집에 안 좋다고 했어. 그래서 엄마가 음식을 다 장만해서 박스에 담아뒀다 자정 가까이 되면 그걸 들고 택시를 타고 제사를 지내러 갔어. 어쨌든 제사는 꼭 지내는 것이었어.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가족 친지가 모여 그분을 기리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그 당시엔 각 가정의 사정과 형편에 관계없이 반드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님이 벌을 내리는 건지, 저승에서 힘을 못 써 자손들에게 뒷배가 못 되어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사를 잘 지내야 자손이 잘 된다는 생각이 컸거든.

 

넌 교회를 다녀 들어보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지 않아 그 집 손자가 다친다는 말도 들었어. 그러니까 손자가 다치면 며느리가 정성이 없는 거지. 언뜻 생각해도 엄마가 음식 장만하고 손님 맞느라 아들에게 신경을 못 써 다쳤을 것 같은데 어쨌든 마음마저 정성을 다하라고 그런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있었어..

 

그렇지만 요즘은 시간 조정은 물론이고 제사를 합치고 윗대 제사를 없애는 일이 비일비재해. 내 친구가 종갓집 종부인데 시부모님 돌아가시고 윗대 제사를 없앴어.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늘 이 제사는 아들에게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고 해. 부모님들이 연로하시거나 돌아가셔서 제사를 받는 친구들이 늘었어. 근데 그 애들이 다 종부인 친구처럼 자기까지만 지낸다고 해. 남아선호사상이 사라진 것처럼 제사에 대한 강박도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아.

 

이런 걸 보면 지금 시댁이나 친정에서 지내는 제사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했을 때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할머님 제사를 지냈는데, 평일이고 자정에 지내는 제사인데 손님이 마흔 명이 넘었어. 지금은 경기도에서 지내니까 친지들이 많이 오시진 않는데 제사가 많아. 이번 제사 때 보니 형님도 환갑이 넘어 힘들어 보이고, 남자 조카도 없는 상황이라 수년 후에는 다른 형태로 지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친정에도 엄마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내년부터 오빠가 제사를 모셔 간다고 하고.

 

오래전에 시댁 제사 때 제사 방식에 대해 이견이 있는 친척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큰형님이 그러시데. 원칙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방식으로 하자고. 산 사람이 화목하길 돌아가신 어른도 다 바라시는 바가 아니겠냐고.

 

교회 다니는 네게는 제사 이야기가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문벌門閥

_이상

 

 

분총墳塚에 계신 백골白骨까지가 내게 혈청血淸의 원가상환原價償還을 강청强請하고 있다. 천하天下에 달이 밝아서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도처到處에 들킨다. 당신의 인감印鑑이 이미 실효失效된지 오랜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시나요-하고 나는 의젓이 대꾸를 해야겠는데 나는 이렇게 싫은 결산決算의 함수函數를 내 몸에 지닌 내 도장圖章처럼 쉽사리 끌러 버릴 수가 참 없다.

 

-이상, 『날개-오감도』(상아, 1992),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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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잃고

 

 

교회는 우리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어. 동네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큰 교회는 두 곳이야. 아마 우리 집에서 보이는 교회가 가장 클 거야. 우리 집은 8층인데 교회보다 조금 높아. 해가 지면 마치 교회로 노을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여. 그리스도의 피가 이 교회를 지켜주고 있는 듯했지.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책상과 아이들 방에서 그 장면을 볼 수 있었어. 언젠가 네게 노을과 교회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생각했는데...

 

몇 달 전 크레인이 교회 마당에 들어섰어. 교회보다 더 키가 큰 크레인이었어. 쇠막대기 같은 걸 자꾸만 쌓아올렸어. 그동안 그 철 구조물 틈으로 노을이 기웃댔는데 철근 구조물 위로 파란 천이 씌워지고... 이제 노을을 볼 수 없어. 증축을 하나 봐.

 

큰애가 엄마, 이제 노을이 안 보여요. 그러니까 고층으로 이사하자고 했잖아요.”하는 말을 듣고야 아이들도 하늘을 바라본다는 걸 알았어. 집을 구할 때 같은 동에 고층이 나와 있었는데 난 고층이 부담스럽더라고. 게다가 남쪽에는 축구장이 있고, 서쪽에는 교회가 있어 하늘도 잘 보여서 아쉬운 게 없었거든. 교회는 2층 정도를 더 높였는데, 그 위에 첨탑 같은 걸 만드는지 오늘 보니 더 솟아올라와 있어. 내가 보기엔 주차장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은데...

 

믿었던 친구한테 발등 찍힌 것 같은 기분이야. 교회도 안 다니면서 친구래. 노을을 못 보니까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느낌이야. 어쨌든 노을과 나 사이에 벽이 생겼는데 그게 하필 교회야. 교회는 교회의 것이니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다 내가 낮은 곳에 사는 탓인데, 괜스레 심통이 나. 그냥 몸을 낮추고 고요히 기도하시지. 보기 좋았는데.

 

 

 

 

착한 마녀의 일기

_송현섭

 

 

하느님, 나의 하느님은

나를 조용히 나무 아래로 불러

검은 넝쿨처럼 자라난 손가락

하나씩 하나씩

예쁘게 잘라 주며 말씀하셨네.

 

아이고, 나쁜 생각이 많이 자랐구나.

손가락은 내가 가져갈게.

 

그러나 여전히

왼손은 사나운 수탉, 오른손은 날렵한 사냥꾼.

손가락은 금세 자라나고, 더 길어지고, 더 구부러지고,

완전 검어졌네.

 

다시 어느 날

하느님, 나의 하느님은

나를 길 가장자리로 불러 말씀하셨네.

 

얘야, 바삭하게 말린 뱀과 애벌레팝콘, 원숭이알사탕, 박쥐쫀드기, 기린주스는 불량 식품이야.

먹으면 배가 아파요.

내가 가져갈게.

 

나는 시옷 자의 풀밭에 누워

기름처럼 둥둥 뜬 흰 구름을 보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의심하고, 추리했네.

 

젠장, 나는 분명 삥 뜯기고 있는 거야.

   

-송현섭, 『착한 마녀의 일기』(문학동네, 2018),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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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눈이 내리면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 차를 마시려고 내려놓았는데 마시면 조금 더울 것도 같아. 뉴턴 잡지에서 빛과 색에 대해 읽는데, 책 내용과 상관없이 불쑥, 눈 내리는 마당이 떠올라

 

내가 어렸기에 더 넓어 보였을까? 5, 6살쯤의 우리 집 마당에는 10여 마리 닭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한쪽 옆에는 들마루가 있었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톡 쏘아붙이는 건 수탉. 어른을 흉내 내며 닭을 쫓자 수탉이 되돌아와 내 허벅지를 쪼아 부풀게 했지. 그렇게 좁은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갑자기 확 펼쳐지는 정경. 눈 내리는 마당. 대구는 눈이 잘 오지 않는 터라 눈 오는 마당은 특별해.

 

오빠와 나는 잽싸게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어. 낑낑거리며 마루 위로 눈덩이를 하나씩 올려붙였어. 마른 나뭇가지로 얼굴을 꾸미고... 만드는 동안 눈이 그쳤지만 우리의 눈사람은 거대하게 빛났지.

 

점심을 먹으러 방에 들어갔다 텔레비전을 봤어. 만화 영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 하기야 눈사람이 무슨 소리를 냈겠어. 만화가 끝나고 마당에 나왔을 때 우리의 찬란한 작품은 뜯어 먹은 솜사탕처럼 심하게 일그러졌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늘에 있는 눈을 가져와 다시 살려내려 했지만 새로 덧붙인 눈사람은 그전의 눈사람이 아니었어. 눈사람 만들기 놀이는 끝난 거지.

 

눈사람이 햇볕에 녹는다는 걸, 결국 사라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눈이 내리면 나는 다시 눈사람을 만들어. 놀이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해내는 일이 아닐까. 파도에 쓸려갈 줄 알면서도 해변에서 모래로 성을 쌓는 일이나 이번 판은 벼락부자지만 다음 판은 거지가 될 수 있는 보드게임 같은 것. 놀이가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그런데도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이 놀이라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말일까. 삶이 아무리 치열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도 언젠가 모래성처럼 쓸려가 버리지. 해가 나면 눈사람이 녹고, 파도가 치면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받아들이듯 우리도 쌓고 무너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삶을 받아들이지. 눈사람이 아무리 녹아 사라져도 다시 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이 아무리 허물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기슭아, 불쑥 눈이 내리면 우리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 그저 거기 눈이 있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만드는 거지. 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만드는 그 순간에 전념하면서 즐겁게 만들면 좋겠어. 강아지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눈이 오는 바로 그날만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다음 날 눈이 그치고 햇볕이 더 강하게 내리쪼일지라도.

 

 

 

불쑥

_박소란 

 

 

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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