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의 죽음
원고 쓰고 막 자려다 김선일씨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착잡함에 오늘도 다시 밤을 새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희망적 관측이 흘러나와 기대를 걸었으나, 그 희망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가장 우려 했던 최악의 사태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비디오를 생각해 보십시요.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 처절한 몸짓으로 절규하며 국가에 자신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호소에 귀를 막고 국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추가파병에 변함 없다."

이라크 전쟁은 우리의 '안보'와 아무 상관이 없는 전쟁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고 우리의 생명이 더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보낸다고 우리의 생명이 더 안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외려 그 반대지요. 군대를 보내서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습니다. 이것을 저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안보'라고 부릅니다.

김선일씨가 납치된 것은 지난 17일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납치가 이루어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파병 준비에 바빴던 노무현 정권이 자국민이 피납된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미국도 이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 통보를 해줬는데 우리 정부가 추가파병을 발표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 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저들이 말하는 '안보'입니다.  

정권은 김선일씨를 납치한 사람들의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약속대로 김선일씨를 잔혹하게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드러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정권에서는 무슨 자신감에선지 아주 신속하게(!) 파병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라크의 서희, 제마 부대가 얼마나 cool하게 활동하는지 홍보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이라면 미국에 협조하는 한국군이 이라크 사람들 돕는 것을 고운 눈으로 보겠습니까?

2.

김선일씨가 납치당했는데도 어제 광화문에 모인 사람은 고작 2천에 불과했습니다. 선거법 위반 발언하다 탄핵 당한 노무현을 구하자고 수만이 모여든 반면, 국가의 부당한 파병으로 생명에 위험에 처한 김선일씨를 구하는 자리에는 고작 2천이 모였습니다. 그 많던 촛불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면, 아마 거리는 파병반대의 물결로 넘쳐났을 것입니다. 이게 정치의식입니까? 이게 민주주의입니까?

도대체 이런 전쟁에 반대하고, 파병을 결정한 책임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죄가 됩니까? 소위 노빠들의 극성 때문에 파병반대 얘기하는 것도 '모험'이 되어버렸습니다. 파병에는 반대해도, 그 결정을 내린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파병 결정해놓고, 비난도 받기 싫다는 겁니까? 파병을 하되 비난은 받기 싫으면 정권을 한나라당에 넘길 일입니다. 그럼 우리의 비판은 한나라당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 역시 원칙적인 평화주의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전쟁의 경우 9.11로 3천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했고, 그 범죄를 저지른 빈 라덴이 아프간에 있었고, 아프간 정부는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그 전쟁은 유엔의 승인을 받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포함해 다국적군이 참전을 했습니다. 이런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이해를 해 줄 여지가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 정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다릅니다. 후세인과 알카에다는 아무 연관이 없고,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고, 그래서 유엔의 승인을 받지 못 했고, 누가 봐도 명백한 침략전쟁입니다. 게다가 무차별한 미군의 사격과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포로로 잡힌 이라크의 군인들은 감옥에서 짐승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런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왜 이런 범죄적인 전쟁에 한국군이 참여를 해야 하는지, 누가 제게 납득할 만한 이유 좀 대 주세요.

3.

김선일씨를 죽인 자들은 해방투사들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입니다.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에서 부시와 똑같은 전쟁 범죄자들입니다. 그들은 규탄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파병할 경우 그들이 파병국 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병을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의 기본임무를 져버리는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무책임한 일을 청와대에 앉은 분들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져질렀습니다.

파병을 할 경우, 이와 유사한 일은 앞으로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적어도 파병 때문에 이라크와 그 주변 아랍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 거기서 활동을 하는 우리 상사원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이게 현 정권의 '안보' 정책입니다. 그렇게 제 나라 국민을 위험에 빠뜨려놓고,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요? 김선일씨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기 삶에 더 안정감을 느끼는 분들 계시면 한번 나와 보세요.

김선일씨가 당한 비극은 언제라도 '나'의 불행, 내 가족의 불행, 내 친구의 불행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선일씨의 부모도 파병에 찬성했다지 않습니까? 설마 자기 자식이 거기에 희생당할 것이라 꿈앤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마다 다 그건 남의 일이라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불행은 불행하게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안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희생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김선일입니다.

"한 사람 잡혀간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 있냐?" 이게 정부여당의 일반적인 분위기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한나라당 애들이야 원래 그런 애들이라고 치고, '개혁'을 외치는 정부여당까지도 이런 무서운 생각을 서슴없이 내뱉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분들에게, 어떻게 이런 나라에 우리의 생명을 맡겨놓을 수 있습니까? 파쇼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전체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납치된 상황에서 버젓이 저런 발언할 수 있는 저 대담함, 저런 끔찍한 발언을 허용하는 우리 사회의 무감함, 그게 전체주의입니다.

4.

미국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배격해야 합니다. 하나는 NL류의 극단적인 반미 전민항쟁론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이익이 곧 우리의 이익이라 강변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입니다.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 중요하지요. 하지만 '동맹'이란 무엇일까요? 미국이 하자는 대로 간까지 빼주는 게 과연 '동맹'일까요? 그것은 '동맹'이 아니라 주종관계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노무현 대통령에게요? 아니지요. 국군통수권은 국군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부시가 갖고 있습니다. 부시는 대한민국 국군을 아무 데나 갖다 박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왜? 노무현 정권이 부시에게 국군통수권을 양도했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자기의 기본적 직무를 유기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조차 부시 정권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해쳤다"는 비난이 나오는 판에, 제 나라 국익을 져버리고 진정한 동맹관계를 해치는 부시의 깽판에 장단 맞춰 춤이나 추는 게 과연 '동맹'입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무능함과 나태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겁니까? 제 나라 국민이 이국땅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태를 보고도 여전히 부시 눈치나 봐야 합니까? 이 나라에 도대체 외교전략이 있는 겁니까? 안보전략이 있는 겁니까?

파병철회해야 합니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라는 한국에서 파병을 거부할 경우, 부시 정권은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대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당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역시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한미동맹' 좋다, 하지만 그 방식은 너희들 멋대로 정하게 놔둘 수 없다. 우리도 너희를 날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부시는 미국이 아닙니다. 미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5.

김선일씨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호소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점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공범입니다. 파병을 결정한 이들은 주범이고, 파병을 묵인한 이들은 종법이고, 파병을 반대하되 힘있게 밀어내지 못한 모든 이들은 넓은 의미의 공범입니다. 앞으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파병반대, 한국군철수를 위한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정치가 사람들의 의식을 개발시키는 게 아니라, 외려 사람들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킵니다. 선거를 앞두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 터져도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특정 정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촛불도 켜지지 않습니다. 이게 그 잘난 인터넷 민주주의의 수준입니다. 어제 모인 2천 명, 그게 이 나라 평화주의 역량의 전부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박노자가 그랬던가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끔찍할 뻔 했다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는 분의 정치의식이 이렇게 나이브합니다. 차라리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한국인 특유의 정치의식이 발동하여 아마 지금쯤 거리가 파병반대의 물결로 차고 넘피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정치에 환장을 해도 그렇지, 어떻게 시민들이 저토록 완벽하게 현실의 정당세력에 포섭될 수가 있을까요? 이럴 때는 정말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성급하게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절망의 끝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저항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열정'에 빠지는 사람은 아직 현실의 냉혹함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열정에 들떠 어떤 일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창조력이 고갈된 가수가 대마초를 피고, 한계에 도달한 운동선수가 약물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진정한 가수는 대마초 없이도 상상력을 가질 수 있고, 진정한 선수는 약물 없이도 체력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진정한 저항은 섣부른 희망이나 뜨거운 열정 없이, 현실의 냉정함을 보고 존재의 밑바닥에서 힘을 끌어올리는 용기에서 시작합니다.

파병반대, 국군철수. 여당과 야당이 동조하고, 조중동의 지원을 받고, 김선일씨의 운명을 제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수많은 무감함의 덩어리들에 맞서 싸우는 싸움입니다. 엄두가 안 나지요. 어제 MBC 저녁뉴스에 파병반대 움직임은 테러범들에게 놀아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얘기를 하더군요. 그것을 들으며 얼마나 끔찍했던지.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진정한 진보의 전선은 열우당과 한나라당 사이도 아니고, MBC와 조선일보 사이도 아니고, 한겨례와 조선일보 사이도 아니고, 바로 거기에 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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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루살이 > 나를 만드는 건 기억, 사람을 만드는 건 행동

기억에 대한 영화는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각기동대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기억의 집합이라는 것. 그래서 기억이 바뀐다면, 또는 조작되어진다면 나 또한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찾아오는 혼돈. 토탈리콜에서도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중심요소다. 이것 뿐이랴. 최근의 영화 메멘토 등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기억에 매달리는 내용의 영화들은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나의 기억을 갖고 있는다는 것이 소중한 것 만큼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소중하지 않을까? 기계들, 특히 첨단의 기계 사이보그들 또한 그들만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비록 그것이 조작되었을지라도 기억을 통째로 지니고 있다면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나 임을 뛰어넘어 내가 사람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나라는 자아, 그 거친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회나 제도 등이 만들어 놓은 높은 담을 뛰어넘어 내가 사람임을 또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행동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는 것. 이 세상을 떠나버리거나 또는 변혁을 꿈꾸는 등의 행동을 취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살아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사이보그라 할지라도 말이다.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그리고 인생이라는 궤도에서 만들어지는 추억만을 씹으며 사는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사람이라고 여길지라도 그는 로봇과 다름없는 기억덩어리의 유기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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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optrash > 폴 오스터와 열린책들.

사실 나는 폴 오스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의 책 두 어권을 읽어보았을 뿐이니까, 그런 상태에서 그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어딘지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책에 (그러니까 그 내용에, 그의 글쓰기에) 대한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죽어버린 문학계에 불고있는 폴 오스터 열풍을 (이정도를 열풍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하는 현실이 조금쯤 참담하기도 하지만, 객관적이며 상대적인 사실로써. 어찌되었건 개미집에 부는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열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하면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뭐라 말을 한다는 것은 일견 불경스럽게 보이기까지한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 본다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로써. 이것은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폴 오스터 열풍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하이프에 대한 일종의 스노브로써. - 결국엔 같은 이유다.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그를 열렬히 신봉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그를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제는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실 하루키야, 그런 열풍이 불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라 했고, 그렇기에 '첫사랑이 어느덧 인기스타가 되어 TV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는 (결코 자랑할만하지 않은) 기분'이라도 들지만, 폴 오스터의 경우엔 그저, '글쎄 난 별로...'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니가 다른 문학은 좀 아니?"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 없지만, '아무것도 아는게 없긴 하지만 그나마 미국문학 보다는 다른 문학을 조금 더 읽어온 입장'에서 그렇다. 헤밍웨이건 포크너건 업다이크건 마찬가지다. 물론 두 레이먼드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는해도 솔직히 다른 작가들은 한 두권 읽은걸 그 작가들에 있어선 두 세권 읽은 것 뿐이다. 그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장광성을 늘어 놓으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폴 오스터의 책'에 대한 불만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에 관한 것도 되겠지만 굳이 폴 오스터의 책, 이라고 한정을 한 이유는 내가 폴 오스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에는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도 일정부분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문학 동네에서 펴낸 '굶기의 예술'을 통해서이다. 역시나 가난한 국문과생이고 보니, 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문득 바라본 저러한 제목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운명의 장난으로까지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공감, 공감 끄덕끄덕 하면서 결국엔 끄덕 끄덕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에 나는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그다지 그의 책에 대한 실례는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폴 오스터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테니까.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겠지. "oh, so pity, you were too hungry. i understand"
어쨌든 내가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가 스모크의 원작자라는 사실과 (잘은 모르겠지만) 읽을 만 해보인다는 것. 그리고 얼마후 96학번 선배의 추천으로 문팰리스란 이름으로 나왔던 책을 읽게 되었다. 뭐랄까, 확실히 내 취향엔 좀 아니었다. 옆에 있던 94학번 선배가 추천해준 카뮈 (이전까지 나는 그의 이방인 한권을 읽었을 뿐이다.) 의 전작은 그야말로 나의 바이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내가 보기엔) 어딘지 조금 구질구질 하기도 하고 어딘지 촌스런 냄새도 났다. 확실히 하루키에 비해선 그랬다. 그리고 당시 내가 비교할 만한 작가는 하루키밖에 없었다. 무식이 죄는 아니니까. 뭐 그래도 재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말해 쿨~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내가 그의 이름을 잊게 되었을 때 즈음, 이미 하루키와도 결별하고 나만의 쿨에이드 리얼리티를 찾아 헤매이고 있던 언젠가, 그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가 어쩌구, 어쩌구... 솔직히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그게 누구야? 생각을 했을 뿐. 기억력을 탓하자. 담배를 끊어볼까? 어쨌든, 조금쯤 흥미가 일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문학책을 갖고 떠들 일이 없을텐데, 하는. 결국 갸가 갸라는 것을 깨닫고, 내 너무 편협한 취향을 가졌나 자문해보며 그의 다른 책을 찾아 한번 읽어볼까, 하는데. 이런, 책이 꽤 많이 있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책이 다 두터운 배불뚝 양장본으로 나와있는 것이 아닌가. 가격은 또 왜이리 비싸구. 그때 즈음, 무슨 알수없는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들렸는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일을 기피하게 된 나는, 그러니까 곧 죽어도 사서 보자로 자본주의의 발등에 키스하며 불쌍한 선배들 (그러니까 출판사하겠다는 사람하고는 죽어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분유값에나 조금 도움이 되어볼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살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양장본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오에의 전집 양장본이 그러하다. 혹은 포우의 무식하도록 두꺼운 전집(단 한권짜리 전집)도 마찬가지. 기형도의 전집도 괜찮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폴 오스터의 책을 다신 읽지 않게되었다는, 어이없고도 썰렁한 이야기.
물론 이것은 여전히 조금쯤은 불공평하다. 열린책들에서 그런 식으로 내는게 분명 폴 오스터만은 아닌 것이다. 쥐스킨트도 있고(사실 나는 향수가 양장본으로 재출간된 이후 쥐스킨트의 책을 읽지 않는다) 에코도 있으며, 베르베르도 있고 그 밖에 등등등이 있지만. 사실 폴 오스터에 대해 뭔가 안좋은 말을 하고 싶은 근거없는 스노브가 달달달 목구멍을, 아니 손가락을 간지럽힌 탓이다.
그런데 열린책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책이야 이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오스터에 책에 그런게 어울리는가? 루이스 쎄뿔베다의 책에는? 쥐스킨트의 책에도? 무엇보다 값이 비싸다. 하지만 똑같은 제본에 단지 값을 싸게 팔았다고 해도, 석연찮은 느낌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동시대의 소설은 동시대의 소설로써 읽혀야 한다. 오에의 소설이라면 괜찮다. 사실 그는 동시대, 라고 할만한 지점까지도 끊임없이 좋은 소설을 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우리의 앞 세대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다. 굳이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런 위대한 작품들에는 솔직히 양장본으로 만들어 폼도 나고, 읽을 때 그 특유의 불편함으로 마치 생수에 나뭇잎을 띄어놓듯 한번쯤 쉬어가며, 어떤 경외를 품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게 나쁜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100% 좋은 일만도 아니다.) 하지만 오스터는?
그가 위대하고 하지 않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동시대인으로써, 동시대인인 우리에게는 동시대의 작품으로 읽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양장본은 너무나, 조금쯤은 부담스럽다. 그건 마치, 스포츠 스타에게 세련된 정장을 입히고 TV쇼에 나오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물론 이것은 조금쯤 과잉 반응일런지도 모른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우리 선배님들도 먹고 살아야 할테니까. 알고 있다. 나도 배고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꽤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 이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아마 많은 사람이. 다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냥, 가벼운 그 무게만큼이나 가볍게 페이퍼백으로 된 책을, 부담없이 사서 부담없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조금쯤 표지가 닳아 헌 책의 느낌이 될 때까지 부담없이 읽으며, 때론 '야 역시'라 감탄하고 때론 '에이 이건 좀 오버다' 혼자 생각하며 부담없이 즐길 수는 없는 일인가. 그러니까 내말은, '본전 생각나게' 하는 그 화려하고도 불필요한 겉치레가, 진정한 책 읽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쓰다보니 '진정한 책읽기' 같은 어깨에 힘준 표현이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일상 생활의 병리학?)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냥 부담없이 어떠한 예술에 대한 압박없이, 상업성에 대한 지나친 흔들림없이 수수한 커피를 마시듯, 그렇게 마실 수는 없냐는 말이다. 굳이 원두를 갈아서 만든 진정한 커피향을 음미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타벅스처럼 화려한 쇼케이스에 들어가서 마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저 집에서 혹은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않은 그것을, '동네 주민으로써' 수수하게 마실 수는 없냐 이 말이다.
너무 말이 길었다. 이런건 절대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사실, '불평'이 주제인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제 그만. 여기서 끝. 밥이나 먹어야지 젠장할.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또다시 야간 근무가 시작되긴 시작되었는데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나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펼쳐져 있는 저 책은, 웬지 읽기 싫은 생각만이 철철 드는데 저 책을 펼쳐둔채 다른 책을 피는 것은 어쩐지 너무나 비윤리적인 일로까지 생각되고 그렇다고 읽기는 싫은데 인터넷 하며 시간을 보내자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이고 그런데 인터넷을 하다가 버릇처럼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폴 오스터가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 오늘 하루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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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스노비즘 Cine Snobbism'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심각한 의미가 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시네 스노비즘'이라는 지독하게 스노비시한 (심지어 '스노비시한'도 스노비시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선택할 만한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표현은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어떤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 요소를 잠시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기 위해 도입한 임시명칭일 뿐입니다. 사실 벌써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면서 이 명칭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을 제가 벌써 해버렸으니 이 표현을 더 쓸 이유도 없습니다. 고로 '시네'는 잽싸게 빼버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죠. 도대체 '스노비즘'이 뭡니까?

제가 여기에서 '스노비즘은 ...이다' 어쩌구의 간단한 정의를 내놓는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땀빼며 고생하고 있을 사전 편찬가들의 전문성과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이나 이 단어는 다양하게 또 애매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전적 정의는 포기하더라도 그 비슷한 것을 임시방편용으로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Snob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라틴어 sine(영어로 without)과 nobilitate(영어로 nobility)가 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Snob라는 단어의 공식적인 명명자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William Makepeace Thackeray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19세기 초 영국 상류 계층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은어로부터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케임브리지의 한 학생은 자기 계층에 속할 만한 체면을 갖추지 못한 학생이나, 특히, 당시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면서 은근히 좋아하고 그것을 흉내내려는 불쌍한 부르조아 학생들을 스노브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물론 새커리의 정의는 그것보다 훨씬 넓어서 결국 그네들을 놀려대던 잘난 학생까지 스노브의 무리 안에 들어 가버리고 말았지만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참고 자료로 쓰고 있는 필립 뒤 퓌 드 클랭샹 Philippe du Puy de Clinchamps의 책에서는 몇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대충 무시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합시다(솔직히 말해 책의 표현 일부가 저한텐 애매하기 짝이 없어서 잘못 인용할까봐 겁이 납니다.)

저는 아직도 스노브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스노브의 특성을 언급하면서 여러분에게 이 단어의 뉘앙스를 짐작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특성이란, 과시성, '척' 하는 태도, 자기만족성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린 '잘난 척',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을 야유하기 위해 이 스노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종종 번역어로 사용되는 '속물'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리코더가 피리가 아닌 것처럼 스노브는 속물이 아닙니다. 이런 무책임한 역어는 오히려 언어의 혼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아까 저는 스노비즘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요소라고 말했습니다(사실 그래야,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이 영화 낙서 섹션에 편입되어야 할 당위성을 얻게 되겠지요.) 물론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의 문화 향유자들 사이에서도 스노비즘은 일상적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곳의 영화 문화 속에서 특히 더 번식력이 강합니다.

이유는 흐르는 물처럼 당연합니다. 사실 '흐르는 물'은 단순한 비유 이상의 것입니다. 둘은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지대에 A 저수지가 있고 저지대에 물이 마른 B 저수지가 있다고 칩시다. 둘을 연결하면 A 저수지의 물이 B 저수지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물만 내려올까요? 아뇨, 에너지가 생깁니다(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고로 근처에 영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수로에 물방아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떡이라도 찧을 겁니다.

여기서 물은 최신 유행, 지식, 문화 상품,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노브들은 언제나 수로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 자체 (또는 유행, 지식, 문화상품)가 아닌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물 비유를 집어던지기 전에 한 번만 더 써먹겠습니다. 물방아간의 효율성은 수로의 너비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로가 좁을수록 수압이 높아서 효율성도 따라 높아지죠. 물론 아주아주 좁아서 물이 찔찔 새어나올 정도라도 쓸모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그렇다면 스노브들이 가장 잘 번성하는 조건이 나옵니다. 본체의 유입은 힘들지만 적어도 그 이름 정도는 들어와 욕구를 조성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몇 년 전 상황이 아닙니까? 쉬크해지기 위해 봐야 할 영화는 대부분 외국 영화고, 그런 영화에 대한 정보도 구하기 쉽지 않고, 구하려고 해도 언어갭이 있고, 게다가 책을 읽었다고 쳐도 정작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고... 스노브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한국판 [프리미어] 98년 4월호를 넘기다가 편집장이 모 영화 평론가한테서 들었다는 흥미진진한 고백을 읽었습니다. 한 번 인용해보기로 하겠어요.

"이젠 영화에 있어서는 전문가나 매니아가 없어진 것 같지 않소? 왜, 예전에는 누가 영화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는가에 따라 그런 층이 존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보 공유 시대가 되었잖우. 인터넷에 들어가면 지금 촬영중인 세계 영화가 한눈에 쫙 들어오지, 게다가 이리저리 얽어서 부대정보까지 주지--이젠 누구나 영화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소 그려, 특히나 매니아라고 자처하던 층에서는 이런 현상에 당혹감마저 느끼는 것 같소, 참."

이 분의 솔직한 고백을 좀 더 읽기 쉽게 번역하면, 지금까지 평론 또는 매니아 현상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중 상당수가 스노비즘에 불과했다는 말이 됩니다. 매니아란 자의식이 대상에 대한 애착보다 크면 그건 스노비즘이니까요(웃! 그만 정의를 해버렸군요!)

고급 스노브들은 상당히 위험한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정보의 독점은 그들의 가치를 상승시키지만 그 독점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정보를 보급해야 하니까요. 따라서 그들이 정보를 보급하면서도 독점을 잃지 않으려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동안 기묘한 스트립쇼들이 탄생합니다. 구체적인 예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해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스트립쇼들을 통과하는 동안 정보들은 단지 정보로만 남고 정보공유를 통한 다음 단계의 발전은 끝없이 유보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나라 문화계에 페미니즘 열풍이 그렇게 요란하게 일었으니 지금쯤은 뭔가 의미 있는 결실이 나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오히려 반대죠. 우리가 수입한 건 주로 겉껍질이었고, 페미니즘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라 폼을 잡아대느라 정작 생산성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거든요. 진짜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그 똥폼 안에 묻혀 버렸습니다.

게다가 계급갈등까지 발생합니다. 종종 통신망 게시판을 통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평론가나 매니아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반감도 그들이 그네들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들의 자존심이 긁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좋은 현상도 아니죠

(언젠가 [키노]에서, '우리는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받는다'라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네들은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습니다. [키노]를 욕하는 사람들은 키노가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욕하는 게 아닙니다. 그네들의 현학적인 말투가 맘에 안드는 것 뿐입니다. 그건 영화 사랑의 정도나 주장의 당위성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순전히 정치적 수완과 설득력의 문제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순수한 스노브를 찾아 헤매거나 누군가를 순수한 스노브라고 낙인찍는 것은 바보스럽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철저한 스노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순수한 이기주의'만큼이나 현실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세르게이 에이젠슈쩨인 Sergei Eisenstein이나 듀상 마카베예프 Dusan Makavejev같은 사람들의 이름을 주절거리며 아는 척을 한다면, 그건 그 친구가 스노브라는 말도 되지만 그 사람이 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좋아한다는 말도 됩니다.

자신의 스노비즘을 부인하거나 스노비즘을 무시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스노비즘의 뿌리는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되었습니다. 군함새의 부풀린 목만큼이나 오래 되었죠. 그것은 똥폼의 일부거나 똥폼의 친척입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해 못하시는 분이 있다고 우기면서 외쳐보기로 하죠. 스노비즘은 생존전략입니다! 자신을 부풀리지 않으면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노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맹이가 있다면 '척'할 필요도 없겠지만, 모두에게 알맹이를 쌓으라고 하는 주장은 알맹이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의 거만한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저희처럼 운 없는 사람들은 주어지지도 않는 알맹이 대신 허세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노브들이 유해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 역시 상당한 골수 스노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스노브 예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노브 존재 옹호론을 끌어들여 동족들의 존재가치를 주장하는 데 일조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일단 스노브들은 우리네 삶의 질을 확장시킵니다. 대부분의 고급 스노브들은 정보와 문화의 첨단, 또는 그 근처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잡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봅시다. 게이 인권운동가들이 기본적인 양식과 지식만으로 싸워왔다면 그게 지금 수준까지 올라왔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건 다 지금까지 우리 같은 스노브들이 [셀룰로이드 클로젯 The Celluloid Closet] 같은 뻔한 책 한 권 달랑 읽은 것을 밑천 삼아, 지금까지 죽어라 아는 척을 해대며 바람을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쉬크해보이는 것은 공정성과 정의보다 몇 배나 더 보급에 중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을 때에는 정보 보급이 빨라집니다. 스트립 쇼에 실력이 없는 스노브들은 밑천이 떨어지면 잽싸게 새 유행을 수입하고 퍼트리는 데 앞장서니까요.

재즈 열풍이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이미 그 열풍은 지나갔지만, 그 결과 수많은 재즈팬들이 생겼고 기존 재즈팬들에게도 훨씬 만족스러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나요?

영화에 대한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예전에 [키노]에 실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던 공포 영화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리스트의 방대한 내용에 감동한 공포 영화팬들은 허겁지겁 비디오를 구해 비디오를 보거나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 결과 그들은 그 리스트의 내용 중 상당수가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자료를 그냥 베낀 것이며 그 결과 발생한 수두룩한 오류가 분단위로 떨어진다는 걸 알고 열받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들이 식견을 늘리고 자기 생각을 쌓아올린 것 역시 그 스노비시한 리스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아무도 손해본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았습니다. 스노브들은 예술가들을 먹여 살립니다. 스노브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아트 영화 제작자들은 파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아트 영화의 스매시 히트도 스노브들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희생]을 보았다는 10만 관객들이 다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wsky가 좋아서 왔겠습니까? 스노브들은 개인적인 예술가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돕고 그 결과 우리의 예술 환경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물론 그네들이 다 그 작품들을 이해하고 좋아해 주기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기대입니다.

그렇다면 대충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대충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자신이 스노브라는 것을 인정하면 스노브들의 허세는 줄어들고 생산성은 높아집니다. 우리가 다른 스노브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우리의 자존심이 긁힐 가능성도 낮아집니다. 결국 공존과 자기 인정이 일차적인 해답입니다. (99/10/25)

DJUNA

출처 : http://djuna.nkino.com/movies/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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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04-06-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djuna 씨야말로 진정한 스노브지요. 뭐랄까, 칭찬의 의미도 아니고 비난의 의미도 아니고 그 자신이 여기서 밝히는 그대로, 그냥. 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드는 사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이런 거부감 역시 스노브랍니다. djuna씨는 너무 파퓰러하잖아요. 저 역시 한 스노브하거든요. 질은 낮지만. -_-;
 

승진했다. 사원에서 계장으로.
제대로 했다면 올초에 했어야 하는데, 뜨거운 공기가 마구 몰려오는 6월에 했다.
더 제대로 되었다면 작년에 했어야 했는데, 대학원 졸업은 경력이 아니란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승진의 금전적 변화는 월 20만원이다. 물론 올라간다.
아직 월급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번 승진이 썩 기분 좋지도 않다.
뭐든지 절실할 때가 있다. 그리고 기대하는 시기가 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주고도 욕먹는다는 말이 나온다.

술을 사란다.
샀다.
어제...

소주가 한병에 1000원...
다들 미친듯이 먹었다. 소주 값만 3만원...
싸서 많이 먹은 것은 아닌데, 과음했다.
언제나 술은 과음과 연결된다.
아~~~ 속 뒤집혀.

well-being
진정 나와는 먼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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