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optrash > 폴 오스터와 열린책들.

사실 나는 폴 오스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의 책 두 어권을 읽어보았을 뿐이니까, 그런 상태에서 그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어딘지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책에 (그러니까 그 내용에, 그의 글쓰기에) 대한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죽어버린 문학계에 불고있는 폴 오스터 열풍을 (이정도를 열풍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하는 현실이 조금쯤 참담하기도 하지만, 객관적이며 상대적인 사실로써. 어찌되었건 개미집에 부는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열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하면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뭐라 말을 한다는 것은 일견 불경스럽게 보이기까지한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 본다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로써. 이것은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폴 오스터 열풍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하이프에 대한 일종의 스노브로써. - 결국엔 같은 이유다.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그를 열렬히 신봉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그를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제는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실 하루키야, 그런 열풍이 불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라 했고, 그렇기에 '첫사랑이 어느덧 인기스타가 되어 TV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는 (결코 자랑할만하지 않은) 기분'이라도 들지만, 폴 오스터의 경우엔 그저, '글쎄 난 별로...'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니가 다른 문학은 좀 아니?"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 없지만, '아무것도 아는게 없긴 하지만 그나마 미국문학 보다는 다른 문학을 조금 더 읽어온 입장'에서 그렇다. 헤밍웨이건 포크너건 업다이크건 마찬가지다. 물론 두 레이먼드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는해도 솔직히 다른 작가들은 한 두권 읽은걸 그 작가들에 있어선 두 세권 읽은 것 뿐이다. 그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장광성을 늘어 놓으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폴 오스터의 책'에 대한 불만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에 관한 것도 되겠지만 굳이 폴 오스터의 책, 이라고 한정을 한 이유는 내가 폴 오스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에는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도 일정부분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문학 동네에서 펴낸 '굶기의 예술'을 통해서이다. 역시나 가난한 국문과생이고 보니, 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문득 바라본 저러한 제목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운명의 장난으로까지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공감, 공감 끄덕끄덕 하면서 결국엔 끄덕 끄덕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에 나는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그다지 그의 책에 대한 실례는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폴 오스터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테니까.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겠지. "oh, so pity, you were too hungry. i understand"
어쨌든 내가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가 스모크의 원작자라는 사실과 (잘은 모르겠지만) 읽을 만 해보인다는 것. 그리고 얼마후 96학번 선배의 추천으로 문팰리스란 이름으로 나왔던 책을 읽게 되었다. 뭐랄까, 확실히 내 취향엔 좀 아니었다. 옆에 있던 94학번 선배가 추천해준 카뮈 (이전까지 나는 그의 이방인 한권을 읽었을 뿐이다.) 의 전작은 그야말로 나의 바이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내가 보기엔) 어딘지 조금 구질구질 하기도 하고 어딘지 촌스런 냄새도 났다. 확실히 하루키에 비해선 그랬다. 그리고 당시 내가 비교할 만한 작가는 하루키밖에 없었다. 무식이 죄는 아니니까. 뭐 그래도 재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말해 쿨~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내가 그의 이름을 잊게 되었을 때 즈음, 이미 하루키와도 결별하고 나만의 쿨에이드 리얼리티를 찾아 헤매이고 있던 언젠가, 그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가 어쩌구, 어쩌구... 솔직히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그게 누구야? 생각을 했을 뿐. 기억력을 탓하자. 담배를 끊어볼까? 어쨌든, 조금쯤 흥미가 일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문학책을 갖고 떠들 일이 없을텐데, 하는. 결국 갸가 갸라는 것을 깨닫고, 내 너무 편협한 취향을 가졌나 자문해보며 그의 다른 책을 찾아 한번 읽어볼까, 하는데. 이런, 책이 꽤 많이 있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책이 다 두터운 배불뚝 양장본으로 나와있는 것이 아닌가. 가격은 또 왜이리 비싸구. 그때 즈음, 무슨 알수없는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들렸는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일을 기피하게 된 나는, 그러니까 곧 죽어도 사서 보자로 자본주의의 발등에 키스하며 불쌍한 선배들 (그러니까 출판사하겠다는 사람하고는 죽어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분유값에나 조금 도움이 되어볼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살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양장본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오에의 전집 양장본이 그러하다. 혹은 포우의 무식하도록 두꺼운 전집(단 한권짜리 전집)도 마찬가지. 기형도의 전집도 괜찮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폴 오스터의 책을 다신 읽지 않게되었다는, 어이없고도 썰렁한 이야기.
물론 이것은 여전히 조금쯤은 불공평하다. 열린책들에서 그런 식으로 내는게 분명 폴 오스터만은 아닌 것이다. 쥐스킨트도 있고(사실 나는 향수가 양장본으로 재출간된 이후 쥐스킨트의 책을 읽지 않는다) 에코도 있으며, 베르베르도 있고 그 밖에 등등등이 있지만. 사실 폴 오스터에 대해 뭔가 안좋은 말을 하고 싶은 근거없는 스노브가 달달달 목구멍을, 아니 손가락을 간지럽힌 탓이다.
그런데 열린책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책이야 이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오스터에 책에 그런게 어울리는가? 루이스 쎄뿔베다의 책에는? 쥐스킨트의 책에도? 무엇보다 값이 비싸다. 하지만 똑같은 제본에 단지 값을 싸게 팔았다고 해도, 석연찮은 느낌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동시대의 소설은 동시대의 소설로써 읽혀야 한다. 오에의 소설이라면 괜찮다. 사실 그는 동시대, 라고 할만한 지점까지도 끊임없이 좋은 소설을 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우리의 앞 세대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다. 굳이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런 위대한 작품들에는 솔직히 양장본으로 만들어 폼도 나고, 읽을 때 그 특유의 불편함으로 마치 생수에 나뭇잎을 띄어놓듯 한번쯤 쉬어가며, 어떤 경외를 품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게 나쁜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100% 좋은 일만도 아니다.) 하지만 오스터는?
그가 위대하고 하지 않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동시대인으로써, 동시대인인 우리에게는 동시대의 작품으로 읽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양장본은 너무나, 조금쯤은 부담스럽다. 그건 마치, 스포츠 스타에게 세련된 정장을 입히고 TV쇼에 나오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물론 이것은 조금쯤 과잉 반응일런지도 모른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우리 선배님들도 먹고 살아야 할테니까. 알고 있다. 나도 배고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꽤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 이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아마 많은 사람이. 다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냥, 가벼운 그 무게만큼이나 가볍게 페이퍼백으로 된 책을, 부담없이 사서 부담없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조금쯤 표지가 닳아 헌 책의 느낌이 될 때까지 부담없이 읽으며, 때론 '야 역시'라 감탄하고 때론 '에이 이건 좀 오버다' 혼자 생각하며 부담없이 즐길 수는 없는 일인가. 그러니까 내말은, '본전 생각나게' 하는 그 화려하고도 불필요한 겉치레가, 진정한 책 읽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쓰다보니 '진정한 책읽기' 같은 어깨에 힘준 표현이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일상 생활의 병리학?)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냥 부담없이 어떠한 예술에 대한 압박없이, 상업성에 대한 지나친 흔들림없이 수수한 커피를 마시듯, 그렇게 마실 수는 없냐는 말이다. 굳이 원두를 갈아서 만든 진정한 커피향을 음미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타벅스처럼 화려한 쇼케이스에 들어가서 마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저 집에서 혹은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않은 그것을, '동네 주민으로써' 수수하게 마실 수는 없냐 이 말이다.
너무 말이 길었다. 이런건 절대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사실, '불평'이 주제인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제 그만. 여기서 끝. 밥이나 먹어야지 젠장할.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또다시 야간 근무가 시작되긴 시작되었는데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나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펼쳐져 있는 저 책은, 웬지 읽기 싫은 생각만이 철철 드는데 저 책을 펼쳐둔채 다른 책을 피는 것은 어쩐지 너무나 비윤리적인 일로까지 생각되고 그렇다고 읽기는 싫은데 인터넷 하며 시간을 보내자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이고 그런데 인터넷을 하다가 버릇처럼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폴 오스터가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 오늘 하루도 이렇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네 스노비즘 Cine Snobbism'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심각한 의미가 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시네 스노비즘'이라는 지독하게 스노비시한 (심지어 '스노비시한'도 스노비시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선택할 만한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표현은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어떤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 요소를 잠시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기 위해 도입한 임시명칭일 뿐입니다. 사실 벌써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면서 이 명칭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을 제가 벌써 해버렸으니 이 표현을 더 쓸 이유도 없습니다. 고로 '시네'는 잽싸게 빼버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죠. 도대체 '스노비즘'이 뭡니까?

제가 여기에서 '스노비즘은 ...이다' 어쩌구의 간단한 정의를 내놓는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땀빼며 고생하고 있을 사전 편찬가들의 전문성과 노고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이나 이 단어는 다양하게 또 애매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전적 정의는 포기하더라도 그 비슷한 것을 임시방편용으로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Snob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라틴어 sine(영어로 without)과 nobilitate(영어로 nobility)가 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Snob라는 단어의 공식적인 명명자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William Makepeace Thackeray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19세기 초 영국 상류 계층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은어로부터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케임브리지의 한 학생은 자기 계층에 속할 만한 체면을 갖추지 못한 학생이나, 특히, 당시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면서 은근히 좋아하고 그것을 흉내내려는 불쌍한 부르조아 학생들을 스노브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물론 새커리의 정의는 그것보다 훨씬 넓어서 결국 그네들을 놀려대던 잘난 학생까지 스노브의 무리 안에 들어 가버리고 말았지만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참고 자료로 쓰고 있는 필립 뒤 퓌 드 클랭샹 Philippe du Puy de Clinchamps의 책에서는 몇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대충 무시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합시다(솔직히 말해 책의 표현 일부가 저한텐 애매하기 짝이 없어서 잘못 인용할까봐 겁이 납니다.)

저는 아직도 스노브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스노브의 특성을 언급하면서 여러분에게 이 단어의 뉘앙스를 짐작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특성이란, 과시성, '척' 하는 태도, 자기만족성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린 '잘난 척',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을 야유하기 위해 이 스노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종종 번역어로 사용되는 '속물'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리코더가 피리가 아닌 것처럼 스노브는 속물이 아닙니다. 이런 무책임한 역어는 오히려 언어의 혼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아까 저는 스노비즘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쉽게 접하게 되고 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요소라고 말했습니다(사실 그래야,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이 영화 낙서 섹션에 편입되어야 할 당위성을 얻게 되겠지요.) 물론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의 문화 향유자들 사이에서도 스노비즘은 일상적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곳의 영화 문화 속에서 특히 더 번식력이 강합니다.

이유는 흐르는 물처럼 당연합니다. 사실 '흐르는 물'은 단순한 비유 이상의 것입니다. 둘은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지대에 A 저수지가 있고 저지대에 물이 마른 B 저수지가 있다고 칩시다. 둘을 연결하면 A 저수지의 물이 B 저수지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물만 내려올까요? 아뇨, 에너지가 생깁니다(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고로 근처에 영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수로에 물방아간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떡이라도 찧을 겁니다.

여기서 물은 최신 유행, 지식, 문화 상품,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노브들은 언제나 수로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 자체 (또는 유행, 지식, 문화상품)가 아닌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물 비유를 집어던지기 전에 한 번만 더 써먹겠습니다. 물방아간의 효율성은 수로의 너비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로가 좁을수록 수압이 높아서 효율성도 따라 높아지죠. 물론 아주아주 좁아서 물이 찔찔 새어나올 정도라도 쓸모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그렇다면 스노브들이 가장 잘 번성하는 조건이 나옵니다. 본체의 유입은 힘들지만 적어도 그 이름 정도는 들어와 욕구를 조성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몇 년 전 상황이 아닙니까? 쉬크해지기 위해 봐야 할 영화는 대부분 외국 영화고, 그런 영화에 대한 정보도 구하기 쉽지 않고, 구하려고 해도 언어갭이 있고, 게다가 책을 읽었다고 쳐도 정작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적고... 스노브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한국판 [프리미어] 98년 4월호를 넘기다가 편집장이 모 영화 평론가한테서 들었다는 흥미진진한 고백을 읽었습니다. 한 번 인용해보기로 하겠어요.

"이젠 영화에 있어서는 전문가나 매니아가 없어진 것 같지 않소? 왜, 예전에는 누가 영화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는가에 따라 그런 층이 존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보 공유 시대가 되었잖우. 인터넷에 들어가면 지금 촬영중인 세계 영화가 한눈에 쫙 들어오지, 게다가 이리저리 얽어서 부대정보까지 주지--이젠 누구나 영화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소 그려, 특히나 매니아라고 자처하던 층에서는 이런 현상에 당혹감마저 느끼는 것 같소, 참."

이 분의 솔직한 고백을 좀 더 읽기 쉽게 번역하면, 지금까지 평론 또는 매니아 현상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중 상당수가 스노비즘에 불과했다는 말이 됩니다. 매니아란 자의식이 대상에 대한 애착보다 크면 그건 스노비즘이니까요(웃! 그만 정의를 해버렸군요!)

고급 스노브들은 상당히 위험한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정보의 독점은 그들의 가치를 상승시키지만 그 독점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정보를 보급해야 하니까요. 따라서 그들이 정보를 보급하면서도 독점을 잃지 않으려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동안 기묘한 스트립쇼들이 탄생합니다. 구체적인 예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해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 결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스트립쇼들을 통과하는 동안 정보들은 단지 정보로만 남고 정보공유를 통한 다음 단계의 발전은 끝없이 유보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나라 문화계에 페미니즘 열풍이 그렇게 요란하게 일었으니 지금쯤은 뭔가 의미 있는 결실이 나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오히려 반대죠. 우리가 수입한 건 주로 겉껍질이었고, 페미니즘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라 폼을 잡아대느라 정작 생산성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거든요. 진짜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그 똥폼 안에 묻혀 버렸습니다.

게다가 계급갈등까지 발생합니다. 종종 통신망 게시판을 통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평론가나 매니아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반감도 그들이 그네들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들의 자존심이 긁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좋은 현상도 아니죠

(언젠가 [키노]에서, '우리는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받는다'라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네들은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습니다. [키노]를 욕하는 사람들은 키노가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욕하는 게 아닙니다. 그네들의 현학적인 말투가 맘에 안드는 것 뿐입니다. 그건 영화 사랑의 정도나 주장의 당위성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순전히 정치적 수완과 설득력의 문제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순수한 스노브를 찾아 헤매거나 누군가를 순수한 스노브라고 낙인찍는 것은 바보스럽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철저한 스노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순수한 이기주의'만큼이나 현실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세르게이 에이젠슈쩨인 Sergei Eisenstein이나 듀상 마카베예프 Dusan Makavejev같은 사람들의 이름을 주절거리며 아는 척을 한다면, 그건 그 친구가 스노브라는 말도 되지만 그 사람이 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좋아한다는 말도 됩니다.

자신의 스노비즘을 부인하거나 스노비즘을 무시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스노비즘의 뿌리는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되었습니다. 군함새의 부풀린 목만큼이나 오래 되었죠. 그것은 똥폼의 일부거나 똥폼의 친척입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해 못하시는 분이 있다고 우기면서 외쳐보기로 하죠. 스노비즘은 생존전략입니다! 자신을 부풀리지 않으면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노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맹이가 있다면 '척'할 필요도 없겠지만, 모두에게 알맹이를 쌓으라고 하는 주장은 알맹이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의 거만한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저희처럼 운 없는 사람들은 주어지지도 않는 알맹이 대신 허세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노브들이 유해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자신 역시 상당한 골수 스노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스노브 예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스노브 존재 옹호론을 끌어들여 동족들의 존재가치를 주장하는 데 일조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일단 스노브들은 우리네 삶의 질을 확장시킵니다. 대부분의 고급 스노브들은 정보와 문화의 첨단, 또는 그 근처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보편적인 인권운동으로 자리잡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봅시다. 게이 인권운동가들이 기본적인 양식과 지식만으로 싸워왔다면 그게 지금 수준까지 올라왔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건 다 지금까지 우리 같은 스노브들이 [셀룰로이드 클로젯 The Celluloid Closet] 같은 뻔한 책 한 권 달랑 읽은 것을 밑천 삼아, 지금까지 죽어라 아는 척을 해대며 바람을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쉬크해보이는 것은 공정성과 정의보다 몇 배나 더 보급에 중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을 때에는 정보 보급이 빨라집니다. 스트립 쇼에 실력이 없는 스노브들은 밑천이 떨어지면 잽싸게 새 유행을 수입하고 퍼트리는 데 앞장서니까요.

재즈 열풍이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이미 그 열풍은 지나갔지만, 그 결과 수많은 재즈팬들이 생겼고 기존 재즈팬들에게도 훨씬 만족스러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나요?

영화에 대한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예전에 [키노]에 실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던 공포 영화 리스트가 있습니다. 그 리스트의 방대한 내용에 감동한 공포 영화팬들은 허겁지겁 비디오를 구해 비디오를 보거나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 결과 그들은 그 리스트의 내용 중 상당수가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자료를 그냥 베낀 것이며 그 결과 발생한 수두룩한 오류가 분단위로 떨어진다는 걸 알고 열받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들이 식견을 늘리고 자기 생각을 쌓아올린 것 역시 그 스노비시한 리스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아무도 손해본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았습니다. 스노브들은 예술가들을 먹여 살립니다. 스노브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아트 영화 제작자들은 파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아트 영화의 스매시 히트도 스노브들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희생]을 보았다는 10만 관객들이 다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wsky가 좋아서 왔겠습니까? 스노브들은 개인적인 예술가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돕고 그 결과 우리의 예술 환경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물론 그네들이 다 그 작품들을 이해하고 좋아해 주기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기대입니다.

그렇다면 대충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대충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자신이 스노브라는 것을 인정하면 스노브들의 허세는 줄어들고 생산성은 높아집니다. 우리가 다른 스노브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우리의 자존심이 긁힐 가능성도 낮아집니다. 결국 공존과 자기 인정이 일차적인 해답입니다. (99/10/25)

DJUNA

출처 : http://djuna.nkino.com/movies/index.html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optrash 2004-06-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djuna 씨야말로 진정한 스노브지요. 뭐랄까, 칭찬의 의미도 아니고 비난의 의미도 아니고 그 자신이 여기서 밝히는 그대로, 그냥. 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드는 사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이런 거부감 역시 스노브랍니다. djuna씨는 너무 파퓰러하잖아요. 저 역시 한 스노브하거든요. 질은 낮지만. -_-;
 

승진했다. 사원에서 계장으로.
제대로 했다면 올초에 했어야 하는데, 뜨거운 공기가 마구 몰려오는 6월에 했다.
더 제대로 되었다면 작년에 했어야 했는데, 대학원 졸업은 경력이 아니란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승진의 금전적 변화는 월 20만원이다. 물론 올라간다.
아직 월급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번 승진이 썩 기분 좋지도 않다.
뭐든지 절실할 때가 있다. 그리고 기대하는 시기가 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주고도 욕먹는다는 말이 나온다.

술을 사란다.
샀다.
어제...

소주가 한병에 1000원...
다들 미친듯이 먹었다. 소주 값만 3만원...
싸서 많이 먹은 것은 아닌데, 과음했다.
언제나 술은 과음과 연결된다.
아~~~ 속 뒤집혀.

well-being
진정 나와는 먼 단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kimji > 말숙? 말쑥?

원고지 쓰기를 하면 늘 띄어쓰기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됩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일기를 워드로 친다고 하니, 원고지 쓰기가 저희 세대만큼 자주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뭐, 여하튼 전 세계에서 원고지를 쓰는 나라는 중국, 일본, 한국 뿐이라네요.

지난 번에 한글 누리 사이트를 알려드렸는데요. (http://korean-language.or.kr/06_darunuri/)
starry sky님과 플레져님도 좋은 사이트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우리말 배움터 : http://urimal.cs.pusan.ac.kr/urimal_new/
한겨레신문의 
우리 말글 바로쓰기 : http://hangul.hani.co.kr/

오늘은 된소리표기,를 조금 알아볼게요.

우리말의 된소리예사소리는 변별력을 가지므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방언이나 은어나 속어에서 예사소리를 된소리로 쓸 때가 많아서 틀린 말을 바른 말로 잘못 인식하는 예가 부쩍 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평소 정확하게 발음하는 언어 습관을 익히지 않으면 '산뜻하다' 가 바른 말인지 '산듯하다' 가 바른 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죠.
그리 어렵지 않은 부분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각두기, 깍둑이, 깍뚜기 (X) -> 깍두기 (O)
납짝하다 (x) -> 납작하다 (O)
둑배기, 둑빼기, 둑백이 (X) -> 뚝배기 (O)
곱배기 (X) -> 곱빼기 (O)
말숙하다 (X) -> 말쑥하다 (O)
산듯하다 (X) -> 산뜻하다 (O)
법썩 (X)  ->  법석(O)
시름 (X) ->씨름 (O)
일군 (X) -> 일꾼  (O)

맛적다,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맛적다 [맏쩍따] 라는 단어는 재미가 적어 싱겁다,라는 의미입니다.
멋쩍다 [먿쩍따] 라는 단어는 (하는 짓이나 모양새가) 격에 어울리지 않다, 고요.
그러므로 맛적다,와 멋쩍다는 구분해서 사용되어야 단어가 되겠죠.
예를 들어볼게요.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맛적은 사람이다. (O)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매우 멋쩍어 하였다. (O)
나도 약간 맛적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X) -> 멋쩍어서
옷을 다려 입고 이발까지 하고 나온 동석의 꼴이 영 맛적었다. (X) ->멋쩍었다


싹독싹독, 싹뚝싹뚝 (X) -> 싹둑싹둑 (O)
미용실을 배경으로 싹뚝싹뚝(->싹둑싹둑)하는 가위질소리.

짭잘하다 (X) -> 짭짤하다 (O)
짧막한 (X) -> 짤막한 (O)

하는 수 없이 짧막한 (-> 짤막한) 동요 한 곡으로 얼버무려 앉으면 마지못해 쳐주는 힘 없는 박수 소리에 번번이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이제 '할'와 '할게'는 정확히 아시죠?
널 만난 이 세상에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날들을 위해 너를 향해 손 모아 맹세 할게.
힘과 운동 반 쪽 링 속을 통과한 구슬의 운동 사용법 반 쪽 짜리 링 속으로 쇠공을 운동시킬 때, 링을 통과한 후의 쇠공은 어떤 운동을 할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단어들을 조금 더 알아볼게요.

가르치다  :  일깨워서 알게 하다 -> 교사는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
가르키다 : 집어서 이르다 ->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오즈마를 가리키다

가름 : 따로따로 갈라놓는 일 -> 둘로 가름 / 편을 가름
갈음 : 본래의 것 대신에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 -> 낡은 책상을 새 책상으로 갈음했다

거치다 : 어떤 처소를 지나거나 잠깐 들르다 -> 우체국을 거쳐 학교로 갔다
걷히다 : 없어지다 -> 안개가 걷히다
               물건, 돈 따위가 모이다 -> 외상값이 잘 걷힌다

걷잡다 : (잘못 치닫거나 기우는 형세 따위를) 붙들어 바로잡다 -> 걷잡을 수 없는 상태
겉잡다 : 대강 어림잡다 -> 겉잡아 두 말은 되겠다

그러므로 : 앞의 내용이 뒤에 오는 내용의 원인, 전제, 조건이 됨을 나타낼 때 
                -> 오즈마는 부지런하다. 그러므로 잘 산다 (예시문장이 어쩐지 어설프군요;; )
그럼으로(써) : 그렇게 하는 것으로 
                -> 오즈마는 열심히 공부한다. 그럼으로(써) 은혜에 보답한다.

너비 : 평면이나 넓은 물체의 가로로 건너지른 거리 -> 도로의 너비를 재다
넓이 : 일정하게 차지하는 평면이나 구면의 크기 -> 운동장의 넓이를 재다

 

개인적으로 헷갈리는 단어들이 있어요. 저는 희한하게도 (희안하다 : X) '역지사지'와 '타산지석'을 자주 혼동하곤 합니다. 하나하나 한문을 떠올리면 괜찮은데 순간적으로 써야 할 때는 갑자기 막히곤 하더군요. (이렇게 쓰고나니 조금 바보같네요^>^; )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늘 그 두 단어가 제게는 아주 힘든 한자성어네요.
혹시 님들도 그런 단어들이 있나요? 전혀 헷갈릴 것이 아닌데 혼자서만 헷갈려서 늘 혼자 헤매게 하는;

 

지난 주에는 고3 학력평가가 있었습니다.
그 시험에 쓰기 관련 문제를 하나 드리죠.
 

<보기>의 ㉠, ㉡과 의미 중복 유형이 가장 유사한 것은?


㉠ ‘저희들’이나 ㉡ ‘너희들’은 ‘-희’가 복수성을 가지고 있어 ‘저희’, ‘너희’만으로 복수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다 ‘-들’을 붙여 ‘저희들’, ‘너희들’처럼 앞 말의 일부를 중복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① 뼛골           ② 외갓집           ③ 씀씀이            ④ 단옷날            ⑤ 교차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영이 형에게

일찍 메일을 보내려고 했지만 온몸에 퍼져있는 나태함으로 인해 이제서야 몇자 적습니다.

형의 전화를 받고, 또 제안을 받고 조금 놀랐고, 많이 기분 좋았습니다.
형이야 이것저것 복합적인 부분까지 생각하며 제게 말씀하셨겠지만,
받아들이는 저로서는 표현되어 인지한 것들만 생각하게 되니까요.
시쳇말로
잘나가는 형이,
경기도 구석에서 2년반째 썩어가고(표현이 다소 과격, 무식합니다) 있는 제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이게 며칠전 형의 意思 포인트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좀 일차원적이라서... 헤헤

형이 경험하신 대로,
그리고 제게 말씀하신 대로,
지금 전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
혼탁해 보이는 미래 등으로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빨리 평정을 찾아야 하는데...

그날도 말씀드렸지만 단조로와진-한편으로는 익숙해진-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 올해부터 야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퇴근 후 일주일에 세번 수업이 있고 대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사고와 열정을 느끼고 있죠.
수업의 내용과 질보다는, 수업 그 자체의 의미로 인해 제 한몸 움직이는 게 예전처럼 쉽지 않습니다.

올해가 지나면,
첫 직장 생활도 3년이 되고 제 나이도 서른 하나가 됩니다.
그동안 부단히 업그레이드하려고 애써 왔는데,
내년이 되면 자잘한 업그레이드보다는 버젼 업을 통해
현실과 동떨어진, 그래서 구물이 되어 버린
메인보드, 씨피유 등을 모조리 갈아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형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서울시청 소속 축구 선수가 베컴과 한 경기장에서 뛰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상적인 플레이, 신속 정확한 판단력, 표정,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심지어 땀냄새까지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경기가 끝나면 그가 몰고 다니는 거대한 스타 군단과의 조우도 기대할 수 있을 테고.

어쩌면 제게 이번 제안은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형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고,
회사도 더 큰 꿈을 위한 과도기적 상황이고,
저 또한 타성에 젖은 삶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아쉬움이 많습니다.

점점 더
각박해져만 가고,
단순해져만 가고,
남루해져만 갑니다.
정상 궤도를 찾아야 하는데.

형이 일단 이 바닥(?)으로 들어오셨으니
기회의 문은 열려졌고,
가능성의 수치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뵙겠습니다.
광활한 그라운드에서...


후배 요석 올림.

추신 : 언제 학교 가실 건가요? 갈 때 저도 데리고 가실꺼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