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7
8년 만에 만난 대학동기가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우린 서로 알아보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너도 아직 학교에 다니는구나. 우리 학번 별로 없지, 맞아. 우리 나이 대에는 하는 말이 다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친구는 제대 후 몸이 아팠고, 나는 제대 후 길을 헤맸다. 서로 3년을 휴학하고, 우리는 어색한 고학번이 됐다. 할 말이 많았다. 아직 같이 저녁을 못 했으니, 그때에 가서는 먹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뱉어내겠지, 그렇게 한 주가 끝나간다. 개강한 것보다 그 친구 생각이 더 많다. 8년 만의 얼굴이다. 어른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 8년도 까마득하다.
그 친구는 철학을 하고, 난 문학을 한다. 군대 이야기, 취업 이야기, 결혼 이야기, 뭐 이런 것들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말하다가 문득 질문을 받았다. 무슨 책이 좋았냐고. 마침 강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우린 복도에서 헤어졌다. 다음 주를 기약하기에는 나의 마음만 앞서간다.
친구야. 나는 이 두 책을 늘 보이는 곳, 가까운 곳에 꽂아둔다.
이탈로 칼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
Italo Calvino,『Le città invisibili(1972)』
아포리아를 딱히 챙겨두거나 하진 않는다. 그건 고등학생 시절에 충분히 하고 다 끝냈다. 플라스틱 판으로 되어 있던 교실 책상에 샤프 꽁지로 긁어서 적어두는 건 나만의 유행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젠 문장에 휘둘릴 나이는 벌써 지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구절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임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는 아포리아를 모방한 쓰레기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인데. 여하튼 그건 다 지나간 이야기.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포리아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 나는 감히 말해본다.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책장과 벽 사이에 콘센트가 있어 코드를 꼽으려고 손짓으로 전전반측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구멍 곁에서 사납게 긁어대다가 이윽고 코드가 딱 들어맞는 순간, 그 삽입과 결합의 쾌감을 말이다. 아포리아란 그런 것이다. 내가 맞아 떨어지는 문장과 구절이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완전체로 향하게 된다. 다만 완전체가 되진 않는다. 그 앞에 ‘pseudo-’를 붙여야 하니까. 그래도 아포리아는 퍽 매력적이다.
아포리아로 이뤄진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대놓고 다 맞아 떨어지는 코드는 너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진리의 순간이 헤퍼지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포리아를 마약 삼은 자들처럼 불쌍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
다만 한 권의 책이 통째로 하나의 아포리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책을 성경과 꾸란, 우파니샤드의 옆에 나란히 꽂아둘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은 그런 책 한 권을 얻어내는 일.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순고한 정신으로, 독서를 하는 일. 어쩌면 생각이 많다고 책을 걷어찼던 지난 몇 번의 긴 시간은 그 순결을 지키고자 다른 책을 일부러 괄시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는 한 권의 아포리아를 찾았는지.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간절히, 그래서 그게 누가 됐든 상관없이 모든 조언을 받아들일 만큼 절실히 물어서, 그 물음을 내가 받아들게 되었다면 나는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경전처럼 읽으라 귀띔해주고 싶다.
그렇다. 물론 이건 소설이다. 쿠빌라이와 폴로의 거짓말이다. 세상에 그런 도시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제목에서도 그 도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경전처럼 읽으라 한 뜻은,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는 종교의 순수한 마음에서 이 소설을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허구에서 진실을 캐내려고 할 때,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서 건강한 고구마와 감자를 힘껏 뽑아내려고 할 때, 우리는 대체로 경전을 대하는 마음을 호미와 쟁기로 사용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침묵의 세계』
Max Picard,『Die Welt des Schweigens(1948)』
책을 읽는 자들 중에서 침묵에 대한 직관을 가지지 못한 이가 몇 있을까. (다들 알면서 숨기는 것이겠지.) 낭독을 제외한다면 독서는 침묵의 일환이다. 밀어 올리거나 끌어당기고, 혹은 켜거나 끄면서 움직이는 세상을 사는 요즘에 독서만큼 묵언수행, 혹은 수도(修道)에 가까운 자세와 태도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고리타분한 독서를 하지 않으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독서는 재기발랄하고 유쾌하며 역동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말은, 책을 읽으면서 이리저리 산만하게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너무 흔하다는 뜻이다. 쉽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볍다는 뜻이다. 독서마저 가벼워진다면 인생의 의자에 앉아 우리의 엉덩이를 덥힐 그 따뜻한 기회는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인생의 의자에 앉는다는 건 합체된다는 뜻이다. 무엇과 붙을 것인가는 개개인의 몫이 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존재에 있어 합체는, 혹은 결합은 중요한 주제로 항상 남아 있다. 이 시대가 우릴 어디에서 떨어뜨려놓았는가. 책을 읽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런 질문을 듣지 못하며, 듣다 한들 답변의 단서조차 도무지 찾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부유(浮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주제로 수많은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놀라운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신과 비탄으로 우리를 잡아끄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수레 삼단화(Hooiwagen-drieluik)>와 같은 무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글을 찾는 작업은 본래부터 어려웠다.
사상의 언저리를 헤매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말 것. 들여다보는 이들을, 그걸 거칠게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가진 이들을 사랑할 것.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많은 이들이 쓸모없는 독서의 무용성을 간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만 봐도 그러하다.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운집한 곳이 아닌가. 다독(多讀)이야 취향이겠고, 요즘 ‘취존’해달라는 민주적 의견이 대세이긴 하지만 하늘을 날 것도 아닌데 깃털처럼 가벼운 걸 왜 그리도 많이 찾는지 모르겠다. 쉬었다 갈 요량으로 한 입 솜사탕 베어 문 것이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어울리지도 않는 (또한 기능도 없는) 깃털로 살갗 전부를 가리진 말 것. 우리에게는 알맞은 몸무게라는 것이 있다. 피카르트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0g이었을 무렵에서 각자의 몸무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었던 0g의 세계를 알 수 있다. 역설이지만 0g이 가장 무겁다. 우리를 중력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밀어올린 그 무게의 근원이 가장 무겁다. 가장 밑에 깔린 것이라 이 책을 두 번 고쳐 읽고도 나는 아직 침묵을 전혀 모르겠다. 입을 다물고, 할 말을 조금 줄여보는 수밖에, 아직은 없다. 나는 매해 이 책을 고쳐 읽어야 한다. 나에게 가장 위대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