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1



  고 3때, 담임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로부터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아마 평생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대입을 앞두고 있었고, 새파란 사랑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서툴렀다. 나도 사랑으로 아린 상처를 남긴 시절이었다. 아무 것도 정리된 것 같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것이 ‘불안’이라는 걸 알았다. 삶의 접착제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아포리아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타액마저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명언인지 아니면 담임선생님께서 만드신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저 사랑의 농도를 감히 가늠해볼 수가 없다. 모 방송의 토크쇼에 강신주가 나와서 사랑을 정의내린 기억도 방금 떠올랐다. 하이데거의 말도 떠올랐다. 수 천 년 전의 한 성자(聖者)의 가르침도 떠올랐다. 뉴스를 보니, 20대가 잔소리가 싫다며 50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고, 한 종방의 토크쇼에서는 이름 모를 부부가 출연해 방송에서 대놓고 싸우고 있다. 다 보기 싫다. 소름이 경멸의 결을 따라 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아직 이 나이까지 단 하나도 성숙하지 못했다 생각하나, 세상에서 진리 하나를 건진 듯하다. 우린 세상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또한 한 번 배우고 나면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야 하며, 부단히 배워야 한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맛 좋은 점심을 먹으러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멜로디가 좋은 팝송이 있어 동생에게 검색을 해달라고 했다. 머리에서 멜로디가 떠나지 않아 집에서 다시 검색해보니, 사실 나를 묶어둔 건 가사였었다.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beautiful.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제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제게 상처받은 영혼밖에 남지 않았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나는 곧장 문태준의 시「가재미」를 떠올렸다. 아직도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은 상상처럼 되는 것이 아니더라. 내 눈에 그리도 예뻐 보이던 그녀가 돌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화를 내면 나는 세상이 다 싫어졌었다.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한 쪽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다만, 사랑이 1+1로 2 이상을 낳는 놀라운 마법이라 알고 있던 어린 나에게 그 값이 계속 1로만 떨어지는 것 같아 그 무엇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눈이 멀더라. 그런데 나는 편지로, 문자로, 목소리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치 화장실 휴지의 커다란 묶음 상품 옆에 붙은 호일이나 키친타월인 양 붙여넣기 하고 있었다. 왜 나는 그 정체를 모르고 있었을까? 더 궁금한 것은, 누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는가? 라나 델 레이의 저 노래가사, 저 질문에 “Always.”라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은, 그 용기는 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다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 것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늘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모자람의 눈물이 난다. 없어서 우는 것이다. 그렇다. 허한 공동(空洞)에 울려 퍼지는 헛소리와 한겨울의 한기가 허무하고 냉랭해서다. 문태준은 시에서 뭐라고 하였나. 시한부 인생, 곧 병으로 숨을 거둘 것이 분명한 아내의 병상 옆으로 남편이 아내와 같은 낮은 높이까지 내려가 가재미처럼 바짝 눕는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아내는 아름답지도 않다. 상처받은 영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몸은 더 이상 몸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기능도 하지 않으므로 거추장스러운 가죽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은 우리가 언제든 몸 밖으로 꺼내고 다시 집어넣을 수 있었던 영혼이 그 몸이라는 곳 안에 갇혀 아내는 어디도 나갈 수가 없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내는 “Will you still love me?”라고 묻는다. 아니, 묻진 않았다. 시의 그 어디에도 물음의 흔적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향하는 사랑에서 우리에게 물음과 답변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리라. 하나의 인간이 가재미가 된 인간에게 맞추기 위해 한 마리의 가재미가 되었다. 그 순간 아내가 눈물을 왈칵 쏟은 이유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면서 되묻는다.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랑이 예전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채를 낼 수 있도록 내가 빛을 비춰줄 수 있는가. 신이란 존재가 있어서 내게 그걸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부탁하고 싶다. 언제쯤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사랑을 ‘용기’라고 읽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 얻기에도, 하기에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버리기에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말이 맞다. “단 한 번 스치기만 한 그 사람의 / 붉고 뾰족한 것에 긁히고 휩쓸려 / 사정없이 곪을 테니.”(이병률,「고름」) 그럴 바에 다치지 않는 편이, 혹은 내가 뾰족해지는 편이 이윤 남는 장사라는 심보가 한두 번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싫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사랑 앞에 ‘쿨’하다는 태도가 과연 우리가 광고하고 회자하는 것처럼 정말 멋진 것인가? 나는 사람의 겉을 핥고 다니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리라. 맛만 좀 보자는 게 아닌가. 어딘가에서 우리는 그들의 손놀림에 뺨을 몇 대 맞았을 수도 있다.


  청춘의 잔인함은 우리의 대부분이 사랑을 모르는 채 우리 스스로가 재단한 사람에 대한 시선으로 사랑을 평가하고, 미래를 과감히 시험한다는 데 있을 것. 핑계도 대어본다. 남자와 여자가 너무 많다. 매한가지로 달리기 위해 태어난 종마 같이 우리가 메어있는 곳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 트랙에서 빙빙 돌다보면 제 격에 맞는 상대와 들러붙겠지 하는 계산. 뭐 이렇게 계산기 두드려보지 않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따져놓고 보면 이런 난잡한 글을 쓰는 나도 어떻게든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요리조리 피해가려는 곡예운전사일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누가 사랑을 못할까. 그 누가 사랑한다고 자부하지 못할까. 그 누가 자신을 속이지 못할까. 속인 줄도 모르고, 맹신 속에 살아가지 못할까.


  분명한 사실이다. 사랑의 시 앞에서 우리가 통곡을 하는 까닭은 확실히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카타르시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문태준 시인의「가재미」같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높이 손을 한 번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죽어가는 아내와의 사랑. 라나 델 레이의 노래가사처럼 상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의 사랑. 아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랑과 오래도록 평행을 이루고 싶어 한다. 신형철은 자신의 평론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신형철,『몰락의 에티카』)


  강신주는 사랑은 상대의 몰락 앞에서 진정한 시험을 맞이한다고 했다. 다음 상황들을 극적으로 변조해보자. 아내가 죽어가는 상황은 아내가 가정적으로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다. 아버지가 더 이상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 눌러앉는 상황은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임과 동시에 위치적으로 ‘비정상’인 상황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상황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니가 ‘타자화’되어가는 상황이다. 이때 우리의 사랑은 그 진정함의 시험대에 오른다. 몰락의 순간에. 내가 아니라 상대의 몰락 때에.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여러 상황들을 고민하지만 막상 ‘닥치면 잘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랑은, 우릴 잔인하리만치 심판하리라.


  진정한 사랑을 달이라 해본다. 삶은 환상문학과도 같아 산소마스크와 우주왕복선 없이 달을 밟아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그러면 우리는 독후감을 쓴다. 나도 달을 밟아봐야겠다고. 하지만 나는 두렵고,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가장 먼저 야속하다며 신을 욕할 속 좁은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칼비노의 『우주만화』에서처럼 장대 하나로 지구와 달 사이를 오고 간 신비의 옛 시대를 그저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도 쉬운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도 의문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달이 있다는 사실이다. 틱낫한 스님도 우리를 타일렀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달을 보고 걷는 자는 달을 보고 걷지 않는 자와는 다르다면서 말이다. 거리가 문제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거리도 숫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나는 달을 보고 걸으면 더 많은 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제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때라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아주 많은 거리를 걸은 자라면, 내가 그 자라면 이렇게 대답해줄 것 같다.


  “우리 함께 이리도 긴 걸음을 함께 했는데, 우리에게 때가 어디 있으며, 우리에게 예외는 또 어디 있습니까? 당신과 나의 시간은 ‘항상’입니다.”


  마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나는 지상에서 아웅다웅하며 죽이고 살리는 사랑보다는 유유히 저 먼 달로 날아가는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을 더 값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병실에 누운 두 마리의 가재미를 생각해본다. 거울에 내 모습이 가재미로 비춰질 수 있을까를, 물어보고 바라본다. 영락없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래서 우는 것이다.


  He's my sun, he makes me shine like diamonds.

  (그는 나의 태양입니다. 그이는 나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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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와서 추천! (뭐라 덧붙일말이..) +_+ 잘 읽었어요! (꽃피는 3월이에요!)

탕기 2014-03-05 07:54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아이리님 ^^
진달래, 철쭉 몽오리들이 조금씩 밀고 나오는 중입니다.
그래도 꽃샘추위는 여전하니까 몸조심 꼭 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