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3.01.07

 

 

  요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것 같다. 별로 많지 않은 정보들 탓에 불이익을 받았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오늘날 사람들은 넘치는 정보들로 인해 더 큰 위험에 빠져 있다고 운을 땐 바우만은 벤야민의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결론은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인 농사꾼 이야기는 사실 너무 친숙한 것처럼 ‘착각’되므로 우리가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낯선 것’과 ‘친숙한 것’에 대한 재고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에게는 ‘확고한 것’도 있지 않을까? 친숙한 것들에게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의심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의심조차 할 수 없는 확고한 것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누군가가 이것을 흔들거나 “그건 확고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걸 믿는 사람은 심한 경우 생명이 시들어가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확고한 무엇이 그/그녀를 기사회생시켜준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원제 : Intelligent Thought)』의 리뷰에서 ‘확고한 것’이라는 새삼스런 표현을 쓴 까닭은 과학과 종교가 우리에게 확고한 무언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이나 빅터 스탠저와 같은 소위 ‘천재’라 불리는 대중적 천체물리학자들은 “신은 없다.”는 주장을 매체를 통해 내보내고, 20세기 ‘핫아이콘’ 리처드 도킨스는 마치 마르크스(“종교는 아편이다.”)처럼 종교를 바이러스에 비유해 철저하게 비판했는데 공적 담론에서의 종교 대 과학의 충돌은 누리꾼들이 단순한 가십거리로 읽을 만한 이벤트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저건 확고한 대륙 사이의 충돌이다.


  다만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 책에 자신의 의견을 담은 16명의 과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비판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즉 ID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첨예한 논쟁거리로 대두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충돌을 다소 낯설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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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과학자들은 논리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유머러스하면서도 수준 높은 글로 논쟁의 핵심을 소개하며, 그로부터 미래의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낸다. 한 가지 한계가 있다면, 그건 종교에 대한 반감을 대중들이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한다 하더라도 정작 대중들이 - 심지어 이 책에는 교사나 대학생들까지도 비판하는 대목이 있는데 - 과학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부터도 그러한데, 그들은 꼼꼼하면서도 쉬운 비유로 대중들에게 과학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중들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인지 본체를 전연 모른다. 따라서 대중들에게는 과학이 하나의 견고한 제도가 아닌, 하나의 믿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남아 있다. 물론 이 책을 쓴 사람들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크 D. 하우저나 스콧 D. 샘슨과 같은 생물학자들은 책의 후반부를 맡아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격양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물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론’이라 부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지만. 지적 설계론 안에도 서로 상반되는 논의가 있어 심지어는 싸우기까지 - 이 책에는 미국 대 호주의 대결이 그려져 있다 - 했다. 이런 경우는 종교적 해석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따른 지적 설계론, 혹은 창조론 내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뭉뚱그려서 이 ‘이론’이 내놓은 관점은 대체로 이렇다.


  이 ‘이론’의 과학자들은 캄브리아기 대폭발, 그러니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다세포 생명 형태가 폭발적으로 출현한 사실을 신의 창조로 보고자 한다. 그렇게 창조된, 혹은 설계된 수많은 ‘창조물’들 중에서 그들은 유독 인간만이 위대한 까닭을 신의 선택 때문이라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종(種) 사이의 진화는 없다는 입장에 서서 인간의 독자적 탄생을 수호하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이 생각보다 그 힘이 약해서 인간의 출현을 설명하기에는 인간 자체가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라는 주장도 한다. 이것이 어떻게, 또 얼마나 간단하게 반박되는지는 첫 번째 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세밀하면서도 충실한 연구라고 하더라도 이미 저 ‘이론’에서 우리는 과학의 자격을 찾을 수 없다.


  두 번째 글을 쓴 래너드 서스킨드는 그가 말하는 ‘반(反)과학’이 유행하는 이유를 인간의 공포, 그리고 문화전쟁의 패자 - 여성, 흑인, 성적 소수자 등을 내몰았던 이들의 패배를 일컫는다 - 들이 낳은 결과라고 보고 그들이 과학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지식인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조장한다며 역공을 퍼붓는다. 그는 과학에게 대중들이 적대감을 품지 못하도록 현명하게 대처하면서도 “무지한 광신도들과는 아예 논쟁하지 말라.”고 동료 과학자들에게 충고한다.


  그렇다면 지적 설계론과 같은 - 한 차례 그 증거의 날조가 폭로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바 있는 - ‘반과학’이 어떻게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대니얼 C. 데닛이 설명한 아주 간단한 수법을 통해 가능하다. 저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1세기 동안 대중화된 물리학의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이해한다.”는 대답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해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이해한다면 상세히 설명하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수단으로 삼는다. 요구 받은 사람은 당황할 것이 분명하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저들은 몰아붙인다. “창조자 없는 창조물을 아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요구가 이어진다. “안다면 상세히 설명하라.”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당황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해봐야한다. “어떻게 완성된 산물이 누군가의 목적과 설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마땅한 의심이다. 그 ‘완성된 산물’이라는 것이 신앙과 닿아 있어 우리의 믿음이나 신념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 어떤 반론도 수용하지 않는 믿음이나 신념의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과 신념은 분명한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과학적 fact는 그것이 반증되지 않는 이상 거부할 수 없다. 다만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과학적 fact를 인정하는 순간 ‘확고한 세계’로부터 이탈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니콜라스 험프리의 논증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영혼’이라는 것이 진화론 최대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고 다윈도 생각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영혼도 진화론으로 논증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전개까지 나아간다. 그 전개는 다소 어려우니, 결론을 줄여 쓴 이 구절이 그의 논증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의식은 인간 스스로를 하나의 ‘소(小)우주’로 여기게끔 진화하는 과정을 담당했고, 인간의 특이성을 이끌어낸 결정적인 ‘인자’라는 것이다. 의식마저 진화론의 영역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독자들은 그의 논증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과 자아 등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어서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최후의 ‘미지의 섬’이 존재하리라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학교 최고의 강의 중 하나로 꼽히는 어떤 철학 강의의 교수로부터 그러한 뉘앙스를 강하게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영혼은 인간만의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은 특별해진다고 주장하며 영혼을 무려 10단계로 나눴다. 영혼의 ‘비물질적 실존’을 믿으면 편안해진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순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 중심적 사고와 환원주의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장애가 되곤 한다.


  팀 D. 화이트는 우리, 인류, 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두발보행 영장류”가 종(種)의 역사상 “최대의 적으로 진화사에 기록될 위치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명의 생물학자가 우리에게 제시할 새로운 - 하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이다. 진화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만 이러한 획기적인 사고 전환의 청사진이 기획될 수 있다. 이것은 종교가 할 수 없고, 과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사고는 검증과 비판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고한 것이어야 한다. 종교는 검증과 비판에서 자주 ‘열외’된다.


  닐 슈빈과 리처드 도킨스의 어려운 글을 지나 스콧 애트런의 글에 이르면 지적 설계론을 공교육에 도입하려는 일부 주(州)에 대한 신랄할 비판을 만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이 구절들로 요약된다. 마지막 구절의 위트에는 칼이 담겨져 있다.


  “과학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혹은 아주 오랫동안 존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회에서, 결코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류가 자연의 물질적 비밀을 풀기를 원하는 한 종교도 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른바 지적 설계 이론처럼 과학을 서투르게 흉내내는 이론은 과학 교육을 불구로 만들 뿐이다. (중략) 지적 설계를 설파하는 자들은 의도적인 원인을 과학에 재도입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을 줄이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사회를 위해 그것은 지적이지 않은 설계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인 스티븐 핑커는 이 책에 실을 자신의 글로 “과학은 물론 종교도 도덕 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도덕도 진화한다. 진화를 ‘변화’라고 이해하면 조금 편할 것이, 우리는 어떤 것의 미추(美醜)를 판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겉모습을 봐야 하는데, 이런 단순한 시각적 판단과 기호(嗜好)는 문화마다 다르며, 또한 종(種)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만의 관념인 도덕은 어쩔 수 없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상시 변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도덕성의 변천 과정을 모르고 그것을 하나의 확고한 세계인 것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그런 까닭에 종교와 도덕의 강력한 결합으로 종교의 권위가 과학 못지않은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과 민족성, 때론 ‘신의 자식’이라는 숭고한 관념으로부터 가공할 만한 수준의 지원을 받곤 한다. 그런데 핑커는 이러한 세태에 대한 반론에 그치지 않는다.그는 더 나아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종교와는 달리 도덕성의 토대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리 스몰린은 ‘강한 인류 원리’, ‘수학 친화적 원리’, ‘다중우주론’ 등을 소개하면서 한 가지 우리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에는 약 20개의 자유 매개변수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널리 알려진 ‘쿼크’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고, 전자와 중성미자도 여기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를 구성하진 않는다. 즉, 우리는 어떤 자유 매개변수들을 선택하여 조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이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왜 하필?”이라는 의문을 갖곤 한다. 그만큼 ‘우리’는 매우 이례적 구성원이라는 뜻이다.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이 그들의 든든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아마 최적의 난제가 바로 저 매개변수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스몰린은 “우주가 우주를 낳는다.”는, 조금은 어려운 주장을 소개하면서 “우주도 진화한다.”고 보면 매개변수에 따른 다양한 자연법칙도 우주가 스스로 재생산할 때마다 조금씩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그의 글이 다루는 주제가 가장 난해하다. 이는 나와 같은 초보적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스튜어트 A. 카우프만은 가장 확실한 반론으로 지적 설계론의 전제 자체를 무마시킨다. 지적 설계론의 유명한 개념은 ‘환원 불가능의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다. 이건 쉽게 말해 엄청 복잡하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바로 인간으로의 진화라는 뜻이다. 또 다시 말하자면 저건 창조나 설계의 막강한 근거이다. 복잡한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보통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그것과 그것을 만든 어떤 것, 혹은 존재에 대한 막연한 경외의 감정을 품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확률의 논리는 진화를 기술할 때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카우프만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생물들의 인과적 관계가 없는 특성들의 배위 공간을 미리 말할 수 없다.”


  지적 설계론이 말하는 ‘환원 불가능의 복잡성’의 진화론적 실체는 다름 아닌 자연선택과 변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수많은 DNA들이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을 통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변이를 통해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기괴한 괴물이 등장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놀랄 만한 일이 -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에서는 시쳇말로 ‘폭풍난리’가 나겠으나 -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변이가 일어날 만한 환경과 조건이 지구에 갖춰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기괴한 괴물을 볼 일은 전혀 없겠으나, 또 모르는 일이 바로 변이이다.


  세스 로이드는 0과 1을 통해 계산하는 컴퓨터의 정보처리능력을 예로 들면서 우주가 매우 똑똑하다는 재미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은 노엄 촘스키의 회귀(recursion)이다. - 이는 문장을 만드는 인간의 사고과정이 반복되고 순환한다는 언어보편적인 주장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이라면 ‘회귀’보다는 ‘순환’이라는 번역에 더 익숙할 것이다 - 이건 매우 단순한 과정이다. 0과 1의 반복.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수많은 문장을 만들고, 컴퓨터는 놀라울 정도의 정보처리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로이드에 따르면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섹스는 다양한 조합들을 무궁무진하게 생산할 수” 있다. 그걸 우주가 한다는 것이 로이드의 설명이다.


  리사 랜들은 교육에 관한 마크 D. 하우저와 스콧 D. 샘슨의 논의를 예비하는 위치에 서서 지적 설계론이 왜 과학이 아닌지를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 과정에서 본의 아닌 전문용어들에 대한 대중의 오해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 중 대다수는 유해하지 않은데, 그가 보기에 지적 설계론은 위험한 수준에 와 있는 논쟁거리이다. 지적 설계론은 과학에 대한 오해를 오히려 부추긴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목적에 관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 이래 ‘과학’이라는 모든 영역은 결과에 대해 질문하는 연구이다. 이것이 과학의 ‘목적’이다. 그런데 지적 설계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어떤 사람들을 과학이 원래하기로 되어 있는 질문들을 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하우저와 샘슨 두 생물학자 - 하우저는 진화생물학자이고, 샘슨은 고생물학자 - 는 미국의 교육 현실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하우저는 훌륭한 교과과정을 위해서는 학문의 완결성을 각각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그 학문들이 만나는 접경지대에 새로운 교과목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못 박으면 안 되고, 위와 같은 교과목들이 각각의 학문들에 대한 학생들의 전문적인 이해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교양이 전공보다 중시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를 인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장은 지적 설계론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사들 중 일부가 “우세한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제시할 권리”와 “과학적 견해들에 대해 (학생들이) 입장을 가질 권리”를 운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제시할 권리는 매우 중요하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바로 과학이 이러한 비판의 연속을 통해 유지되는 학문이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주장이 ‘반과학’인 지적 설계론의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우저는 넌센스라 일축한다.


  마지막 글을 맡은 샘슨은 ‘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제창한다. 그가 살펴본 여론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미국인의 대다수가 생물학의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한다는 엄청난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면서도 대중은 뭔가 진화론으로부터 효용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기까지 한다. 마치 그들이 종교를 포함한 여러 사상들로부터 삶의 방향을 제시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러나 진화론에서 효용을 찾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인간 중심의 고전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간을 ‘신의 뜻’으로부터 우주의 중심에 세우지 않는다. 진화론은 오히려 E.O.윌슨의 용어인 생명사랑(biophilia)을 강조할 근거들로 가득 차 있다.


  “자비나 생명사랑의 필수 전제조건은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진화의 작동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에 특정 의미, 물론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이른바 ‘진화이해력(evolitaracy)’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왜 생태적 재앙을 막아야 하는지를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샘슨에 따르면 부분에서 전체로 연역하는 전통적인 환원주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전체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다윈주의적 시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이는 문자 그대로와는 달리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인간이 저질러온 파괴적 역사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빚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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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운 책은 아니다. 300페이지도 안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기에는 결코 쉽지 않다. 또 다른 검색을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검색의 연속이 필요하고, 어려운 과학이론과 용어들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다가 결국에는 튕겨져 나가는 처참한 장면도 목격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에 더해서 지적 설계론을 둘러싼 논쟁의 무게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사실이다. 가중의 중요성. 따라서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과학적 이해 이상의 사고를 독자들에게 권장하게 되고, 독자들은 지적 설계론을 반박하는 과학계 지성들의 화려한 논증들에만 신경을 쓰면 안 되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좋은 자질들이 있다. 종교는 그것들을 우리가 발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종교의 일부 행위들에 대한 감독의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지적 설계론은 국소적인 사상을 위해 과학을 종교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과학의 본질을 어기거나, 무리한 출판과 몇 차례의 허위 실험, 조작 등으로 이미 헌법으로부터 “과학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모든 종교가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지적 설계론에 대한 비판의 기사를 나는 웹서핑 중 우연히 한 불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오용의 사례들로부터 인간이 좋은 자질들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것은 또한 종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p.s  이 책의 부록에는 지적 설계론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사례 중 하나인 어떤 판결문 - 2005년 12월 20일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키츠밀러 등 대 피고 도버 지역 학군(Kitzmiller et al. v. Dover Area School District) 논란으로 미국에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 이 실려 있다. 그 중 앞부분이자 내가 가장 중요하다 여긴 부분을 이곳에 옮겨놓는다. 원문은 해당 판결문의 pdf 파일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며, 번역은 이 책의 역자의 것을 참고했다. 밑의 ID란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의 약자이다.

 

4. 지적 설계는 과학인가 아닌가
  관련 기록과 적용 가능한 판례를 검토한 후 우리는 지적 설계 논증이 사실일 수 있다 해도(여기에 본 법정은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지적 설계가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라고 생각한다. 셋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적 설계가 과학이라는 판결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지적 설계는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끌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 백 년 된 기본 규칙들을 위반한다. 둘째, 지적 설계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논증은 1980년대에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이용한다. 셋째, 진화론을 부정하는 지적 설계의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되었다. 아래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적 설계가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친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4. Whether ID is Science
After a searching review of the record and applicable caselaw, we find that while ID arguments may be true, a proposition on which the Court takes no position, ID is not science. We find that ID fails on three different levels, any one of which is sufficient to preclude a determination that ID is science. They are: (1) ID violates the centuries-old ground rules of science by invoking and permitting supernatural causation; (2) the argument of irreducible complexity, central to ID, employs the same flawed and illogical contrived dualism that doomed creation science in the 1980's; and (3) ID's negative attacks on evolution have been refuted by the scientific community. As we will discuss in more detail below, it is additionally important to note that ID has failed to gain acceptance in the scientific community, it has not generated peer-reviewed publications, nor has it been the subject of testing and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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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유래』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적 설계론'과 같은 비과학적 주장이 과학에 겂없이(?) 대드는 꼴이 더욱 가관입니다. 다윈의 책들(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과 도킨스의 여러 책들, E.O.윌슨과 스티븐 핑커의 여러 책들도 매우 뛰어난 '과학자'들이 쓴 명저임은 분명한데,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들이라고 해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 듯하고, 결국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철학적 통찰'로 좀 더 나아가 봐야 '우리의 위치'를 좀 더 속시원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제게는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들(제게는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가장 훌륭하다 싶고,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도 좋더군요)과 베르그송의 책 가운데 『창조적 진화』(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데, 과학-물론 생물학과 진화론이 중심이지요-과 철학과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 놓았다 싶어요)가 특히 좋더군요. 다소 주제넘은 댓글일지도 모르지만 (탕기님의 글을 읽고 난 뒤 솔직하게 얘기하고픈)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걸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탕기 2013-09-27 23:25   좋아요 0 | URL
저도 과학자들 중에서 급진적인 논의를 진행시키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절반의 심정이 듭니다. 한쪽의 마음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진화론을 지지하고, 우주과학을 동경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음의 다른 한쪽에서는 oren님과 비슷하게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특히 샘 해리스와 같은 과학자들이 내놓는 의견은 과학적 현상으로 도덕을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철학적 위치가 위협받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듭니다.

사실 이런 상반된 감정에도, 저는 여전히 한 가지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겠지만 '지적 원칙'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앞으로 과학이 발견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과학적 위치가 있고, 철학적 위치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철학적 위치가 과학적 위치보다 선행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물리/생물/화학적 특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명백한 사실인 듯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우리를 규정하는 범위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된 말로 철학적 사고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지적 설계론만 봐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적 설계론은 철학적(이라고 쓰고 '종교적'라고 읽는) 사고의 바탕에 과학적 사고를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끌어다오는 오류를 범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oren님도 분개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그러한 사고 방식에 대해서 때론 파렴치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oren님께서 (솔직하게) 좋은 의견을 적어주시니 저 역시 마음 속으로 아주 기쁩니다. 성별이 어찌 되었든, 나이 차이가 어찌 되었든, 배경이 어찌 되었든 좋은 글친구/생각친구가 한 분 더 생긴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많이 달아주십시오. 저도 oren님의 서재를 자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