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9

 

※ 이 글은 김경수 교수님의 '현대소설론' 중 '법과 문학'이라는 테마의 수강을 위해 오늘 읽은 이병주의 작품 <소설·알렉산드리아>에 대한, A4용지 4장 분량 되는 나의 갈무리이다. [한길사]에서 펴낸 3쇄 2010년판을 읽었다. 조촐하지만 이 공간에 옮겨본다.

 

 

 

 

 

  그렇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사회의 미덕으로부터 응당한 선처를 바라지도, 법에게 처지를 호소하지도 않는다. 전자의 경우는 이 글에서 차지한다. 열풍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그것에 대한 ‘국내산’ 비판적 텍스트들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이 사회의 미덕에 대해 저마다의 정리를 해봤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후자의 경우인 법이 아쉽게도 미덕의 반영에 있어 허점을 보이는 탓이기도 하다. 법이 ‘우리’의 든든한 수호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나의 픽션인 법에 대해 분명한 잣대를 손에 쥘 필요가 있다.


  ‘법과 문학’이라는 면에서 내가 본 이병주(李炳注)의 「소설·알렉산드리아」에는 두 개의 법이 지배하는 무대가 등장한다. 하나는 - 나는 여기서 ‘안타깝게도’라는 부사를 써야겠는데 -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 중 저 이집트의 유서 깊은 영광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독서를 하며 한 가지 확신에 가까운 전제를 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 ‘나’의 입장에 서 있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나’는 누구였나? 관악기에 대해서는 도가 터서 소위 “피리만 불 수 있다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별 상관 않는 부류이다. 그런 ‘나’에게,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나’의 형이라는 이의 삶은 도통 이해될 수가 없다. 형의 삶은 시대를 분석하는 한편, 저자세와 소시민적 태도에 부단히 항거하는 사상적 삶이다. 그는 스스로를 ‘황제’라 부른다. 그러나 당당한 황제는 아니다.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았으니, 태양을 향해 오르다 보면 - 이상(李箱)의 「권태」 속 불나방처럼 - 정열이 그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었다. 남은 것은 황제로 지니고 있었던 영광. “궁전에서 나가라고 해도 나는 안 나가고 버틸 작정”이라니, 이거야 말로 대쪽의 정신이 아니던가.


  반면 ‘나’는 사상을 미워한다. 정(正)이냐 불(不)이냐의 판단이란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기에, 보다 솔직한 인간이라면 “내겐 의견이 없다.”고 토로하는 부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형의 삶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갖는다. “세상과 충돌했을 때 상하는 건 세상이 아니고 그 사상을 지닌 사람”이라는 한숨 섞인 고백에서는 형에게 보낸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난다.


  죄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형의 죄에 대해 나는 빨리 속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소설의 배경(1965년 발표)을 고려하면 그 죄라는 것이 무엇일지 독자들은 대강 짐작할 것이다. 그 상세한 이유가 드러나 있는데, 한마디로 ‘종북(從北)’의 뉘앙스인 것이었다. ‘나’는 사상에 대해 일종의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형은 분명 잘못했고, 시인만 하면 될 것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반면 형은 그의 죄를 “세상에 나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 태어난 죄”라고 이해한다. 그는 여전히 궁전 속에 있다. 나는 ‘나’와 형을 각각 즉자적/대자적 인물로 분석해보려고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나’에게 반성이 없을까.


  줄거리로 돌아가 본다. 프랑스 선원 - 이병주는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 인 말셀 가브리엘을 만나 ‘프린스 김’이라 불리게 된 ‘나’는 알렉산드리아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소위 ‘대사건’이 터지는 곳이다. 무대와 사건을 말하기 전에 잠시 ‘나’의 성향에 대해 조금의 고찰이 필요할 듯하다. 말셀과 나눈 대화가 ‘나’의 사람됨을 또 한 번 드러내기 때문이다. 말셀의 말 중에는 선원생활이 여자와의 관계에 도움을 준다며 ‘생명의 앙양(昻揚 : 정신이나 사기 따위를 드높이고 북돋움)’과 ‘생명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무슨 말일까? (지극히 남성이 중심이 된 저급한 대화이긴 하지만 ‘여자’를 욕망에의 상징으로 놓고 보는 배려가 다소간 요구된다고 하겠다.)


  말셀이 들려준 ‘생명의 앙양’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 ‘나’가 그럼 선원 일을 하지 말고 여자만 파지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말셀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여자만 파는 것은 ‘생명의 파멸’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나’를 애송이라고 부른다. 바다에 나가 정기를 받으며 여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생기가 충족된 몸으로 육지에서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고 ‘앙양’을 “원근의 능동적 조절과 그를 기초로 추구”로, ‘파멸’을 “일단의 부단한 일차원적 추구”로 이해하면서 나의 삶에도 명백히 대입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냐며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말 그대로의 육욕이든, 아니면 성공에 대한 욕구이든, 무슨 욕구이든 간에. 얼마간 나는 책을 못 읽었다.


  여하튼 다시 돌아와 내가 본 ‘나’의 성격이란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몰두하는 경향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병주가 ‘암묵의 의사’라 표현한 것은 다름 아닌 알렉산드리아의 퇴폐적인 육욕일 것인데, 다양한 형태의 육욕들로부터 번롱당하기 싫어한다는 ‘나’의 고백은 앙양이든 파멸이든 그러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소위 아마추어 수준의 금욕주의를 상상케 하는 것이다. 실제 이병주가 그린 알렉산드리아는 그로테스크한 성(性)의 도시, 관능의 바다 속 그 자체이다. 사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없었으니, 욕(慾)에 대해서도 함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로지 그는 ‘피리’만을 부는 사람이었고,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나’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나’는 카바레 안드로메다의 여왕 사라 엔젤을 만난다. 그녀는 흡사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말한 미래로서의 여성성을 연상케 했다. 육욕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동양철학적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지극(至極)’할 수 없는 존재. 그런 그녀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고, ‘나’는 훌륭한 플롯 연주실력 덕분에 그녀와 가까워져 그것을 알게 된다. 사라는 게르니카가 고향이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아는 이라면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꿈꾸는 ‘복수’라는 것의 정체도.


  ‘나’는 사라에게 형이 보낸 일곱 통의 편지를 보여준다. 형의 세계관이 농축되어 있는 편지들이라 나는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앞서 말한 이카로스의 날개가 등장한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로 형은 그래도 황제의 고적한 품위는 지킬 수밖에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다음 편지에 나온다. “강력한 유혹력 없는 금지란 무의미하다.”라면서 그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금지규정이 있어 지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요컨대 자유가 우리를 지치게 한다는 논조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으면 하는 뉘앙스를 내비치지만 그는 항거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 나가 짐을 지고 가는 이의 공간적 자유를 누릴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 편지에는 “권력은 보잘것없는 책략”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지배계급의 먹이”라는 표현도 있다. 상부에 대한 경멸적 시선이 확인가능하다. 그러한 상부는 여섯 번째 편지에서 애도한 케네디의 “선명하고 진취성 있는 비전”과 대조된다. 그러다가 ‘나’가 사라에게 읽어준 마지막 편지에서 형의 목소리가 갑자기 수그러든다. ‘나’는 검열을 통과해야 편지가 발송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사라에게 형은 여전히 항거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들려준다. 하지만 형은 점점 무너져 가고 있다. 그것은 소설 말미에서 확인된다.


  이제 그가 등장한다. 한스 셀러. 이 독일인의 등장에서부터 소설은 빠르게 진행된다. 그에게도 비밀이 있다. 동생 요한이 유태인 소년을 숨겨줬다는 죄목 때문에 게슈타포 앞잡이인 ‘엔드레드’라는 독일인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두개골이 함몰되어 죽은 것이었다. 한스와 요한의 어머니는 한스에게 복수의 유언을 남겼고, 한스는 유럽에서부터 일본 등지를 떠돌면서 엔드레드를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곧 독자들은 이후의 스토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병주는 한스와 사라를 이어준다. ‘나’가 그 중재자가 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한스와 사라가 계획한 대사건의 중심부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것은 엔드레드를 카바레 안드로메다의 15층 퀸즈룸으로 오게 해서 어떻게든 복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계획은 성공한다. 그러나 나는 ‘성공’이라 표현하기가 조금 머뭇거려진다. 한스는 총을 꺼내든 엔드레드에게 정당방위를 하고자 테이블을 엎었고, 그 바람에 엔드레드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 순간 후두부를 땅에 세게 박아 죽었고, 그런 엔드레드의 어깨를 사라의 총에서 발포된 총탄이 뚫고 지나갔다. 한스는 살의를 가졌다고 진술했고, 사라는 한스에게는 살의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건 복수였을까? 이건 살인이었을까? 알렉산드리아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 부분에 이어 이병주는 곧바로 형의 또 다른 편지 한 통을 보여준다. 그것은 13인이 들어가면 12인만 나온다는 문, 즉 사형장으로 통하는 문에 대한 형의 이야기이다. 편지의 내용은 분명하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배려’사형제 - 사형수에게 부모가 있다면 사형수는 그 부모가 자연사 한 후에 사형당해야 한다는 것 - 가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면서 사형폐지론의 오래된 역사를 언급하며 근대형법학의 선구자인 체사레 베카리아 - 유럽의 법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인물 - 의 이름을 적는다. 출옥하면 사형폐지운동을 하겠다는 의사도 분명하게 들어난다.


  그리고 ‘예수’, ‘부활’, ‘마리아’ 등 앞선 편지에서 드러난 생각의 상징이 다음 편지에 이어지며 니체를 등장시킨다. 니체로부터 그는 “항거하라!”라는 이 시대의 발칙한 슬로건을 도출한다. 형의 편지가 알렉산드리아 일심 판결에 앞서 이 소설에 삽입된 것은 이병주의 다분한 의도이기도 하겠거니와 그 의미가 특별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을 열광케 한 것은 사라와 한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라는 자신의 발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위였으며, 모든 계획은 자신이 세웠고, 한스에게는 살의도, 살인행위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한스는 사라의 총격으로는 엔드레드가 죽지 않았고, 자신에게 살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을 움직였다. ‘이 얼마나 위대한 희생정신이란 말인가!’ 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 데일리 미러》의 사설과 《알렉산드리아 가제트》의 사설은 각각 의미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복수는 깨어 있는 의식”이지만 악순환이 우려되니 용납할 수는 없다면서 알렉산드리아 법정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참작될 만한 동기가 있으니 고려하라는 중립적인 어조로 마무리된다. 후자의 사설은 훨씬 급진적이고 열정적이다. 법률이 징치하지 못하는 개인의 원한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 그 글은 테러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 데일리 미러》에서 ‘딜레마’라 표현한 그것은 테러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검사의 논고, 변호인 A와 변호인 B의 변론이 이어진다. 이들의 논고와 변론은 우리가 예상하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미 이병주의 의도 안에 들어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검사는 참작해서 징역 15년을 선고해달라고 요구한다. 시 사직당국이 나치, 게슈타포, 게르니카 등 국제 사건에 관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것이다. 반면, 변호인 A는 거의 《알렉산드리아 가제트》의 어조로 “불법이지만 정당한 일”의 동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변호한다. 변호인 B는 A의 열정적 변호에 이어 구체적 분석을 내놓아 한스의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사라는 시체에게 총을 쏜 것이라 둘은 무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언급한다.


  이후 판결은 내려졌다. 한 달 이내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퇴거. 그러나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들에게 큰 질문거리를 준다.
  “이 결정은 판결이 아니므로 판결로써 취급하지 않는다.”


  사라와 한스는 뉴질랜드 인근의 섬을 사서 그곳에서 살겠다며 ‘나’와 형을 초대한다. 그러나 형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어줄 때, 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형은 편지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형의 이 인용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알렉산드리아의 법과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형을 가둔 법’은 얼마나 다른가 말이다.


  “희망은 무한하다. 그러나 나는 글러먹었다.” - 카프카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10-30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31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0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병주를 읽는 탕기님 멋져요! 국문학도의 국문학 리뷰의 정수 같은데요. 5년 전인가 이병주 전집읽기 시도했었는데 반갑기도 하고.. 물론 다 못읽었고 지금은 읽은 것마저도 기억에 없지만.. 저는 그때 엄청 장편들만 봤는데.. 이 분 소설 보면 자꾸 카잔차키스 생각이 나요. 너무 많고 너무 방대하고 너무 다양해서요.

재밌을 것 같아서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요^^ (근데 담으려는데 책이 없;;)

탕기 2012-11-02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셔서, 이번 방학 때에 조금씩 <관부연락선(1,2권)> 읽어보려구요. 사실 방학 이용해서 카뮈/위화 읽기 하려고 했는데, 교수님 왈 "일단 읽어보세요. 아마 손을 놓치 못할 거에요."라고 하셔서요.^^

나름 방학독서계획 세워놨는데, 벌써 기대되고 설레요.ㅠㅠ
모옌도 한 번 읽어보고 싶고, <호빗> 개봉 겸 톨킨 3부작(반지제왕,호빗,후린의 아이들) 리뷰도 쓰고 싶고, 움베르토 에코 <미의 역사>도 다시 공부해보고 싶고, J.S.밀 <여성의 종속>, 에리히 프롬... 빨리 학기가 끝났으면 좋겠습니다.ㅠ

아이리시스 2012-11-08 20:13   좋아요 0 | URL
탕기님 호빗 예전부터 좋아했잖아요, 그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좋아한 게 아니라 호빗이 종종 등장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기억하나봐요. 빨리 학기가 끝났으면 저도 좋겠습니다.ㅠ

지금 모옌 지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