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3
국어학을 배우다 보면 ‘어휘부(Lexicon)’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말해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들이 있는 창고 정도가 된다. 위대한 작가들을 다룬 큰 책들을 읽다 보면 “A는 몇 개의 어휘를 사용했고, B는 몇 개의 어휘를 만들었고”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나는 대체 몇 개의 어휘를 사용할 줄 알지?”라는 질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국어사전에 하늘색 색연필을 칠해 가며 아는 단어들을 헤아려본 적이 있다. 얼마 못 가서 포기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일단 끈기가 문제이긴 했으나, 사실 어휘부는 우리가 보통 아는 ‘단어’와는 다르게 온갖 방언과 (특히 연령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속어 등도 포괄하는 개념. 나는 결국 “꽤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산의 허리 즈음까지만 올라간 주제에 정상에서의 기쁨을 만끽하려고 한 셈이다.
책상 위에는 방학을 틈타 읽을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책장에는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책, 읽은 책,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꽂혀 있다. 마땅히 둘 자리가 없어 바닥에 내려놓은 것까지 하면 몇 백 권은 될 것인데, 나는 이따금 저 많은 책들 안에 잠들어 있는, 내가 읽어야만 마법의 잠에서 깨어날, 흡사 병마총의 병사들 같은 단어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성벽은 내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내 삶의 말뚝을 박을 수 있는 땅이고, 한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단어로 된 성벽에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불어넣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로와 같은 삶에서 내가 찾아낸 단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책으로의 부단한 발걸음을 스스로에게 주문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 많은 책들이 도착했다. 여덟 권이지만 권수로는 열두 권이다. 그 중 몇 권은 서재에 꽂아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 읽고픈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샤오궁이 말한 ‘갖고 있을 만한 책’이다. 가슴 절절한 무언가, 혹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진 않지만 호기심이 닿아 있어 훗날 글을 쓰고자 할 때에 불현듯 찾게 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종합적인 것들이라 대체로 비싼데, 할인을 빌미로 나의 ‘지름신’을 달래보게 됐다.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방법>, 그리고 사사키 다케시 外의 <절대지식 세계고전>이 그 책들이다.
어쩌다보니 리처드의 또 다른 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한 권씩 사다보면 언젠가 그의 애독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쇼펜하우어의 이 책은 평이 좋아 사뭇 기대가 된다. 사실 그의 책을 고른 까닭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철학자들의 조언’이라는 콘셉트의 작은 철학책(이라기보다는 카운슬링에 가까운 책)을 문득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사사키의 책은 지식에 대한 큰 틀을 그리기 위해 샀는데, 챕터별로 발췌독하기에 용이하다. <맹자>의 주해본(박경환 譯)도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동양철학서적들 사이에 꽂아두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되지, 뭐 하러 비싸게 돈 주고 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오래된 고성(古城)에 들어가 낡은 보물 상자 하나 들춰보는 장서의 미학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터넷의 정보들은 이상하리만치 신뢰할 수가 없다. 이것도 내가 가진 선입견 중의 하나이겠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부분을 인터넷에서 여러 번 비교해 찾지, 인터넷을 하다가 궁금한 것을 책에서 찾아보진 않는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드디어 샀다. 익히 명성만 들어오던 터였다. 첫 장의 첫 구절부터가 인상적이다. 읽고 있는 책이 여러 권이라 당장은 못 잡겠지만 여름방학맞이 픽션 도서로는 1순위가 될 듯하다. 루카치의 <미학>은 미술 공부하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계열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둘 모두 마르크스 선상의 위대한 학자들이다. 베냐민, 뵐플린, 파노프스키, 단토, 타피에 등을 읽으며 길러진 나름의 내공(?)으로 조만간 깊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 설렌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속속 서재에 꽂히고 있는 푸코의 책(그나마 이 책이 푸코의 저서들 중에서는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더라.)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푸코 읽기’는 인문학계에서 꾸준히 불고 있는 유행이라, 인문학의 위대한 사상들을 평소 동경해오던 나에게 푸코 읽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포만감을 준다. 비록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의 완독이 실패로 돌아간 씁쓸한 기억은 있으나, 꾸준히 독서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어본다.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복잡하고도 상세한 대(大)철학가들의 사상서적을 홀짝홀짝 넘겨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핑계도 대본다.
김애리氏의 <책에 미친 청춘>은 귀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주저 없이 샀다. 젊음의 생존법을 ‘독서’라고 단언하는 그녀는 독서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애독가인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른 한 마디 한 마디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녀는 나와 ‘젊음’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생에의 치열함에 있어서 내가 감히 그녀와 비교될 수 있게냐마는.
천천히 읽어볼 것을 벼르며 대충 책장을 넘기다가 (어떻게 나는 그녀가 소개하는 책 중 단 세 권밖에 못 읽어봤을까!) 95쪽에서 반가운 시 한 편을 만났다.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이란 없다>였다. 옛 미술블로그를 할 때, 아우구스트 마케(1887~1914, 독일 표현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그녀의 시와 엮어서 길게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시집 한 권을 사놓고 가장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고쳐 읽었던 시.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명언.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올 2월 초, 그녀의 타계 소식 접하고 다시 한 번 읽었던 그 시를 이 책에서 우연히 만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많은 고뇌와 생각 속에서 태어났을 저 높은 책들의 탑에 삶을 던지지 않고서야 쉼보르스카가 말한 우리네들의 삶을 어떻게 경작할 수 있을까!
창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진다.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흙내음도 잠재울 정도로 세차게 들이 붓는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집으로 뛰어간다. 집은 그런 곳이다. 비 내리면 들어가 쉴 수 있는 곳. 우리와 같은 조그마한 독자들에게, 책은 바로 집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식상하지만 나는 이 비유가 포근하니, 가장 마음에 든다.
#. 얼마 전, 나는 방학동안 읽을 열한 권의 인문학 서적들을 나름 골라놓고 한 권씩 리뷰하기 시작했다. 두 권은 이미 올렸고, 곧 한 권의 리뷰도 올릴 것인데, 나머지 여덟 권을 밑에 조촐하게나마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