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6

 

#. 다음 주는 시험기간이다. 지난 목요일에 마지막 발표가 끝났고, 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비를 시작했다. 매번 그렇듯 나는 시험을 곧잘 보는 편이 아니라, 절박하진 않다. 이번 학기도 프레젠테이션과 레포트에 많은 신경을 썼다. 미술 블로그를 2년 정도 할 때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내가 준비한 것들을 남들이 어떻게 봐주던 나는 늘 결과에 대해 인색하다. 올해의 절반, 그 기간동안 많은 걸 갖췄다. 지식은 잊히겠지만, 단련된 습관은 더 나아질 기반이 될 것이다. 그간 적어뒀던 순간의 깨달음들과 좋은 습관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길 바란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며 사는 어른이 드물듯,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의 풍경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일 것이다. 이번 학기 귀감이 되었던 것들을 마음 속으로 혼자 복기해본다.

 

#. CPA 준비하는 동기 중 한 명과 잠시 시간을 내서 한가롭게 음료를 마시던 오후였다. 그는 나에게 경영학 수업을 들으라 권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답 없는 인문학 수업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다. 경영학 수업은 반대로 답이 있다더라. 나는 숫자놀이를 고등학교 이후 한 번도 안 해봤다며 손을 저었지만 속으로는 제법 솔깃했다. '답'이라. 구구절절한 서술 없이 답안지에 몇 글자로 '똑' 떨어지게 쓸 수 있는 답. 그러고 보니, 여러 인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껏 속시원한 결론으로 마무리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문학은 돌아가는 길이다. 어떨 때에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를 때도 많다.


  신화학, 철학, 종교학, 국문학, 심리학. 곁가지로 알게 된 것들은 참 많다. 독학한 미술도 그러하다. 얕게 안다면야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단답들처럼 상식으로 알게 되는 것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가 읽으라는 텍스트들을 접하는 순간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학사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것들에게는 수많은 설(設)들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 순간 갖게 되는 회의란! 그런 까닭에 차라리 문제를 풀어 답을 낼 수 있는 수학이나 물리학 등을 동경해본 적이 아주 없진 않다. 내가 우주과학을 동경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와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우주과학자들은 철학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껏 나는 '인간'을 배우고 있다. 인문사회와 사회과학 사이의 엄청난 차이는 둘을 포함한 교양과목 하나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아니면 후자의 학자가 전자의 현상을 설명한 책을 읽어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류의 책은 보통 전자의 학자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으니까.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냈다가 과학자들에게 비판 받은 건 반대의 경우라 하겠다. 차라리 인간은 문학의 낭만적 문구로 표현되는 편이 나은 존재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인문학에는 답이 없다."는 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지식은 믿음을 준다. 그것은 일정 부분 종교와 유사하다. 배운 것들 중 잊히지 않고 남아 행동과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러 인문학을 공부했고, 바쁜 생활 중에서도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답은 없다.",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진리 아닌 진리'를 마음 속에 품고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 그 포스트모던한 '진리'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다. 그 진리가 그에게는 지배집단이자, 절대다수이며, 또한 나름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되는 셈이다. 포스트모던인데도 말이다!

 

#. "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뜻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지듯, 인문학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해석 방식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 싫은 것은 내칠 수 있고, 좋은 것은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기분 내킬 때마다 꺼내볼 수도 있다. 인문학이 어려운 까닭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맞게, 자율적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스토리도 없고, 문제지도 없으며, 어떨 때에는 아예 이미지조차 없다. 그런 종류의 게임이라면 아마 게임 매니악(혹은 오타쿠)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삶은 흥행여부를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얕은 지식과 피 마르지 않은 머리로 지금까지 내가 인문학에 대해 판단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이런 것들이다. 나는 그 날 동기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큰 갈등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건 괜한 갈등이었더라.

 

 

 

 

 

 

 

 

 

 

 

 

 

 

 

 

 

 

 

#. 시험이 끝난 다음 주에 레포트 두 개를 과(科)사무실에 제출하면 나도 드디어 방학이다. 이번 계절학기에는 전공 과목들을 보충하려고 했는데, 개설된 과목이 하나도 없어 패스하기로 했다. 야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나에게 주어진 긴 시간이 마치 남창(南倉), 북창(北倉)에 가득한 노적들처럼 풍성하게 다가온다. 읽을 책, 할 공부, 다닐 전시회들을 김칫국 마시듯 계획해봤는데, 마음 속부터 북 받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 중 내친 김에 오늘 4권의 책을 주문했다. 주문해놓고 보니, 지난 학기부터 얼마간 관심을 가졌던 '종교', '폭력', '테러' 등으로 주제가 갈무리된다. <성배와 칼>이나 엘리아데 시리즈를 사려고 했는데, 금값이라 포기했고, 마침 <축의 시대>가 반값 할인이라 주저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머지 세 권은 누차 사고 싶었다고 말한 그 책들이다. 이번 방학의 초두에는 파농을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다행이 "방학이다!"며 들뜨진 않을 듯하다.

 

 

 

 

 

 

 

 

 

 

 

 

 

 

 

 

 

 

 

#. 시공사 인문서평단에서 이번 달에만 책 두 권을 보내줬다. 하나는 <궁녀>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전기>이다. <궁녀>는 무척 생소한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 그 중에서도 미시사라 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룬 책은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식단을 교정할 만한 책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예루살렘 전기>는 약 1년 간 계속 종교를 교양과목으로 듣는 내게 적합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종교와 관련된 두꺼운 책들(저 책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다!)이 계속 서재에 들어서고 있다.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지만 냉담자인 내게 이러한 책들이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각을 주고, 종교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

 

#. 이제 그만 글 쓰고, 시험공부를 해야겠다. 어릴 적, 멸치를 유난히 싫어 했던 내게 어머니께서 늘 하셨던 말씀, "편식하면 못 써!" 마음에 없는 공부라고 소홀히 하면 못 쓴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늘 벼르기만 하는 형국이니, 나는 참 철이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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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2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 잘 봤어요? 방학 했어요? 그렇잖아도 사촌동생이 오늘 보고서와 시험을 모두 끝내고 부산 집으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탕기님 보니까 상기되었어요. 만나서 놀아야지ㅋㅋㅋ

시험 잘 보고 얼른 책 많이 읽어서 서재 와요, 와!!

탕기 2012-06-27 07:48   좋아요 0 | URL
저도 드디어 방학입니다.^^
이제 천천히 책 읽으면서 학기 중에 힐끗힐끗 거렸던 책들도 정리해봐야 겠어요.
이것저것 막 주문은 해놨는데, 방학했다고 살짝 늘어지기 시작하네요.ㅎ
이번 주 중에는 탱자탱자 놀다가 조금씩 컨디션 끌어올리려구요. 아이리님도 자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