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3

 

  “저 요즘 바빠요.”라는 핑계는 아마도 자만에서 나오는 넋두리일 것이다. 그 핑계를 명함처럼 내밀며, 이러저러한 연유로 근래 들어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은, 더군다나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고사(古事)가 매우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뭘 담든 제 무게보다 많이 나가서 흡사 ‘고봉’이 얹힌 밥그릇이 되어도 중량의 고통을 견디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제 몸 안의 물이 조금만 찰랑거려도 “넘치겠다!”며 투덜대는 소인도 있다. 제련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매일을 되도록 버텨가고 있지만 어떤 때에는 나의 역량이 한참 부족함을 깊게 채근한다. 틀리지 않는 직감이다.


  학기 중이다보니, 글은 많이 읽는다. 다독(多讀)인의 독서량에 버금가기야 하겠냐마는 적어도 쉬운 글은 안 읽으니, 이따금 독서를 통해 통증도 경험한다. 심오한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도 든다. 이윽고 허무감이 찾아오고, 그것을 조원들과 토론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연이어 문을 두드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던데, 학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종교와 철학적 문제들을 앞에 두고 있으면 용어들이 벌써 나에게 “굴종하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조금 과한 표현이었지만 나의 것이 아닌 한 전공자의 넋두리를 옮긴 것이다. 비전공자인 나와 조원들은 근래 들어 부쩍 집중력이 떨어졌다.


  속으로 자주 생각한다. 이런 집중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미술사와 미학에게 투자한다면 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논문을 섭렵했을 것이고, 벌써 큰 틀을 잡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만이다. 좋아하는 것에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소인배의 생각이기도 하다. 상황이 사람을 이렇게도 비굴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도 한 말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이가 최근 들어 바뀌었다. 아니, ‘이들’이라 해야 옳겠다.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데, 별 투정 없이 꿋꿋하게 해나가는 사람들. 이전까지의 나는 일상을 비범하게 보내고, 틀을 깨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인이라 여겨 거의 숭배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전자의 사람들이라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후자에게는 특별한 기회와 운도 따르고, 일반적으로 그럴 여건이 충분히 주어지기도 한다. 아니면 정말 뛰어난 인물인 경우일 것이다. 그들만 바라보던 시각이 나의 주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어른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리라. 어른이라 불려도 무관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들어야 할 철은 많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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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랜 만의 일탈이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접어두고, 나름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일상이 추슬러지는 기분이다. 환기도 시킬 겸, 잠시 임영방氏의 <중세미술과 도상>의 앞부분을 가볍게 읽어봤다. 호주 시드니에서 잠시 어학연수를 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주중에는 아침마다 breakfast를 먹었다. 빵과 잼, 그리고 우유나 커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긴 하나보다 생각했다. 시내에 나가 차이나타운을 지날라치면 그 매콤하고도 느끼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기도 했으니. 그러다 주말이 되면 김치와 김밥을 먹었다. 나에게 근래 들어 미술책은 ‘김치와 김밥’인 셈이 되었다. 읽어본 책들의 커버를 스윽 훑어보거나 괜히 손으로 만져보면 “많이 배우고 있어도 허한 머리”에 양분이 가득 차는 기분이다. 무슨 말인지, 이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이들은 분명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런 책들, 곁에 몇 권씩 끼고 있을 테니까.

 

 

 

 

 

 

 

 

 

 

 

 

 

 

 

 

 


  간만에 이곳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봤다. 5권이 있기에, “예전에 무슨 책을 리스트에 올려놨었지?”, 궁금하여 마치 오래된 일기를 펼쳐보듯 봤는데, 아,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파농의 책이 두 권 있었다. 인종주의와 관련된 한 책을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인문학 서적들이 대개 그렇듯 읽고 나도 명확하게 잡히는 바가 없는 상태로 써내려간 리뷰라 지금 읽으면 뭔 말인지 모르는 그런 글인데, 여하튼 그 책이 나름의 경각심을 줬고, 그간 벼르고 있던 파농 읽기에 도전하겠다는 요량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방학이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간을 찌푸리며, 한 장 한 장으로부터 분명 무거운 고통을 느끼겠지만 인문학의 기본정신에서 위배되는 회피는 하지 않으리라, 또한 여겨보며.

 

 

 

 

 


 

 

 

 

 

 

 

 

 

 

 

 

 

  종교 관련 강의를 두 개나 듣고 있는지라, 위의 두 책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과 <진화의 종말>도 아마 학기 초에 읽어보겠다고 장바구니에 넣어놨던 모양이다. 칼 세이건과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작년 말에 한 권씩 접해보고, 믿음과 관련된 두 권의 서적을 탐독한터라, ‘진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은 특히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잘 표현된 불행>은 한 유명 서평가의 인터넷 공간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의 독서수준이 워낙 높아 내가 추려낼 수 있는 책들의 수가 적은 것이 사실이나, 매번 귀감이 된다. 사실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음은 그렇지 않은 삶 속에서 항상 반성만 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투정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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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2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어학연수를 갔어요? 탕기님을 얼른 루브르로 보내야 하는데.. 르네상스 화가들 얘기 예전에 제가 참 좋아했잖아요. 기억나요? 그걸로 우리 처음 만나게 됐었는데^^

잘 지내네요, 여전히 열심히 어려운 책 읽으려고 하고.. 봄학기 끝나가는데 그럼 좀 한가해지나요? 프란츠 파농 저거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탕기님 리뷰읽고 보고나서 나도 사려고 찜해뒀어요. 책이 다 옛날 거라서 낡아서 좀 그런 것 빼고.. 저한테도 탕기님이 귀감이 돼요!!!

학교생활 잘하고 학점도 잘 받고 얼른 서평도 내놔요^^

탕기 2012-05-26 20:20   좋아요 0 | URL
저도 르네상스 화가 이야기 블로그에 올릴 때가 가장 '신명'났었어요. 그럼요. 다 기억하죠.^^ 봄학기 끝나면 영어/미술/운동에만 올인할 생각이에요. 여름(계절)학기는 들을 과목이 없어서 패스했거든요. 아마 많은 미술책, 또 제가 읽고픈 파농, 인문학책도 꼼꼼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른 서평 내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책 읽어야겠네요.ㅎㅎ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