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의 몸 몸문화연구총서 1
몸문화연구소 엮음 / 쿠북(건국대학교출판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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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를 토시 하나하나 따져가며 공부할 무렵이었다. 아버지께서 몇 페이지 넘기다가 루벤스의 작품 <메두사의 머리(c.1618)>를 보시더니, “이런 그림을 보면 밤에 잠 못 자겠다.”고 농담하셨다. 나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학문의 눈을 빌려 ‘이런 그림’들 수 십 편을 봐온 내가 그 충격 때문에 밤잠 설친 적은 없었다. 또한 수전 손택의 말마따나, 작품을 통해 충격적인 추(醜)를 목격하는 것과 실제 그것을 목격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극사실주의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이 ‘작품’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순간(다른 말로는 ‘복제’되는 순간), 베냐민 식으로 말하자면 “실제 추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것이다. 작품은 항상 특정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실제 추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쉽게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괴물을 보느냐, 아니면 괴물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있느냐의 차이라는 뜻이다. 후자의 경험을 우리는 바로 ‘공포’라 부른다.


  나는 최근 대학교 강의 중 <변강쇠가>를 맡아 발표해야 하기에 나름 예습을 하겠다는 심산으로 몇 권의 책과 여러 논문을 찾아 얼마 전 읽은 적이 있다. 그 중 한 권이 몸문화연구소에서 펴낸 <그로테스크의 몸>이다. 제목을 잘 붙였다는 생각이 독서가 끝나고 나자마자 가장 먼저 들었다. 제목 ‘Grotesque body’는 우리의 몸(자아, 주체, 생리 등을 모두 포괄한 ‘철학적인 몸’)과 관련된 기괴함을 다룬다는 뜻이다. 만약 이것을 ‘Body of grotesque(몸의 그로테스크)’로 바꿨다면 독자들은 시각적인 그로테스크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 책의 여러 논의들과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점이긴 하나, 책을 덮고 난 후 착잡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위해서는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봄도 좋다. 그로테스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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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한 말인데, 우리가 ‘기괴(奇怪 : 외관이나 분위기가 괴상하고 기이하다.)’, ‘괴기(怪奇 : 괴상하고 기이하다.)’, 혹은 ‘괴상(怪狀 :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하다.)’이라고 번역하는 그로테스크와 관련된 이론은 대부분이 서양에서 온 것이다. 그 중 바흐친, 카이저, P. 톰슨 등의 종합적인 이론이 유명하나, 이들 외의 논의들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소개된 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하다.”라는 말을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한다. 교양인들에게 이 용어는 각종 현대예술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상식 중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테스크가 수많은 작품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로테스크의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지와 같은 성찰은 감히 시도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용빈도에 비해 그 속뜻이 매우 오묘하고, 때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까닭이다. 멀찌감치 서서 그것을 바라보면 이해될 것 같지만 그것이 가까이 오면 뒷걸음치게 된다.


  <그로테스크의 몸>에는 제목 그대로 ‘그로테스크’, 그리고 ‘신체’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실려 있다. 발췌독을 하기에도 좋고, 각 논의들의 분량도 알맞기 때문에 한 주제를 가지고 하루 종일 생각하곤 하는 나 같은 ‘아날로그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사려 깊은 책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막상 논의에 발을 담그면 하루가 너무 짧다는 기분이 들게 된다. 각 논의의 저자들이 여러 날들을 공부해서 쓴 글을 한 번 읽고 대충 넘어가는 것은 도둑의 심보이기도 하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면면이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에 단순히 매료된 수준의 독자가 아니라면 저들의 철학적 고민과 통찰을 따라가기에 벅차다고는 할 수 없다. ‘그로테스크’를 파헤쳐보겠다며 충격적인 현대미술 작품 하나 안 본 이 없을 것이고,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은 이 없을 것이기에.


  <변강쇠가>의 발표준비를 명분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지만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독한 뒤에 나는 <추의 역사>를 샅샅이 공부한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예술과 철학의 세계로 살짝 발을 들여놓았다. 나와 비슷한 고민과 성찰의 주제를 갖고 있을 ‘동포’, 혹은 ‘인민’을 위해 서평을 더 곱게 써보자면 이 책은 단 하나의 코드만 알고 있어도 그것과 연결된 수많은 노드들을 통해 전문(全文)을 호기심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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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 관심은 모두 다를 것이다. 여러 주제가 있다. 그러나 책의 구조상 첫 번째 논의인 <철학적 스캔들로서의 괴물(김종갑氏)>은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시동을 걸지 않은 차가 스스로 엔진을 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대뜸 데리다를 이야기 한다. 괴물에게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는 정상으로부터의 단절일 수 있으며, 그것은 ‘괴물성’으로서 선포되거나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우니 내가 잘 아는 미술사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르네상스는 겉으로 드러난 숭고미의 방벽이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치열하고, 한편으로는 비열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궁중 문화가 막강한 재력을 만나고, 로만가톨릭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면서 미술 역시 그것에 호응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대(古代)에의 향수가 이탈리아 발(發) 르네상스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라는 단어(사실 이탈리아어로 ‘부활’이라는 뜻의 ‘리나시타’가 어원이다.)는 이상할 정도로 정상적이다. 이를 ‘기준점’이라는 의미로 ‘데코룸’이라 불러보자. 르네상스를 전후해서 고딕과 마니에리스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의 저의(底意)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크도 그렇고, 인상주의, 야수파 등도 그러하다. 한 시대를 정의내림에 있어 용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면 르네상스는 그야말로 “언제든지 회고하기에 영광스러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후 실제로 신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은 르네상스를 ‘고증’했다. 이 고증은 미술사에서 아주 오래토록 정상 패턴의 곡선을 그려 가는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술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단절’에 해당한다. 대학생들은 교양 미술사 시간 때, 그리고 일반인들은 대중적인 미술서적으로 그 단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은 국내에도 여럿 소개된 바 있다.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재미있어 할까? 데리다의 말이 생소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 ‘단절’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 아카데미즘의 추락과 함께 등장한 후기인상주의, 그리고 그로부터 거인이 된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 말레비치, 칸딘스키, 마르크 등. 그들은 ‘괴물’이었다. 괴물이 미래를 선포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괴물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니! 그러나 이미 진리라는 것이 누구의 손에서 제시되었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모더니즘에 그토록 매료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괴물’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어로 표기하면 이렇다. [either A or B]가 보통의 우리이다. 여기서는 자기동일성이 확인된다. 우리는 A이거나 B이기 때문에 만약 A라면 동류인 A를 자기동일성의 증거로 삼고, B는 배타성의 사례가 된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both A and B]. 사람들은 너그럽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주체성이 단일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평등, 민주 등과 함께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상대성. 그러나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인 사람(Androgyny). 사람이면서 코끼리 얼굴을 한 사람(Joseph Merrick). 여성이면서 비정상적으로 엉덩이가 큰 여인(Sarah Bartmann). 분명치 않으나, 우리에게는 ‘기준’, ‘일반’, ‘보통’이라든지, 아니 그보다는 ‘정상’이라는 개념의 테두리가 있다. 그것은 뿌연 안개와 같으나, 어떤 때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도 하다. 저들을 ‘나’의 인식 범위 안으로 ‘입성(入城)’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아니면 19세기 유럽인들처럼 철창 안에 갇힌 저들을 마치 원숭인 양 구경하기 위해 돈을 내고 낄낄거리거나,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면할까? 과연 주체의 다양성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도덕적 인식으로 자신을 무장시키고자 하는, 평범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주체는 다양하다면서 [both A and B]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련된 철학적 도전도 이윽고 벽에 부딪히게 된다. 흄(D. Hume)처럼.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성전환자가 살아가기 힘든 나라 중의 하나이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싶어 하거나, 혹은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싶어 한다. [both A and B]의 특성을 A와 B 중 하나로 결정하고 싶은데, 불행이도 그것이 이미 결정된 성으로 인해 막대한 장애를 받은 이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철학적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은 차치하고, “괴물이다.”라고 정의해버린다. 이는 이방인을 괴물로 그리거나, 혹은 이단을 악마로 형상화하는 저 서쪽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하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르네상스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상은 허구이다. 나는 옛 미술 블로그를 꾸릴 때, 하우저의 글을 읽고 “르네상스는 허구이다.”라는 제목의 포스트 하나를 올린 적이 있다. 그것은 ‘정상’이라는 것이 (나는 그것을 ‘데코룸’이라고 썼는데)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히고, 또한 무슨 이유로 해체되는지를 다룬 글이었다. 분량 상 전문을 옮길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모더니즘에 주목하는 까닭과 닿아 있으니, 인용 없이도 충분히 이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논의는 진전되었다. 정상이 허구라면 괴물을 보고 놀라는 우리의 본성은 ‘괴물’을 지정하는 우리의 제도, 주의, 사상 등과 분리될 수 있다. 쉽게 말해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달 초, 나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서평을 이 공간에 올렸다. 그의 논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인종주의가 인간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제도로써 형성된 것이라는 간파이다. A가 생각하기에 B는 타자이다. 자신과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B에게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낄까?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문화적 학습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괴물은 어떠한가? 괴물은 기본적으로 추하고 무서우며, 위협을 주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공포는 적대감과 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우리가 ‘괴물’이라는 부르는 이들에게 과연 그 명칭이 합당한 것인가? 혹은 너무 단순한 ‘명명하기’로 괴물이 양산되는 것은 아닌가? 다시 기준으로 돌아와 이곳, 즉 정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런 철학적 질의를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규정한 ‘괴물’이라는 각종 대상들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배척에서 중립으로, 더 나아가 중립에서 환영으로. 이 환영에서 우리는 이른바 “괴물 견뎌내기”의 과정에 돌입한다. 윤리가 태어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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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논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로테스크에 대한 적대감을 논리적으로 해제시키는 과정이 녹록할 리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어지는 논의 ‘아브젝시옹(abjection)’에서 그로테스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뚜렷한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현대예술가들 중에서 유명한 여성들만 100명을 선별해 나름의 정리를 한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는 그들 중 대다수의 여성들이 선정, 비정상, 과격(그런데 대관절 이들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등 테마를 활용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현대예술은 항상 붕괴로부터 창조된다. 그러나 그 ‘박식’하다는 현대인들은 그녀들의 말에 귀를 쉽사리 기울이지 못한다. 일단 그로테스크하기에 적대감을 갖거나 기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무엇을 부수고자 하는지 알게 되면 그 그로테스크가 강력한 시대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명백하게 깨달을 것이다.


  이후 논의들은 위의 두 논의보다 좁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죽음, 판소리, 전쟁, 우리의 몸, 입양인, 기억, 미래기술의 그로테스크(사이보그) 등이다. 내가 앞서 <철학적 스캔들로서의 그로테스크>를 반드시 읽고 다음 논의들을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한 말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로테스크로 ‘정의됨’을 이해해야 그것의 ‘해체적 활용(아브젝시옹)’과 기타 쟁점들의 깊은 성찰을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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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그로테스크를 철학의 특성으로 생각해봤을 때, 다시 말해 괴물이 우리를 혼란스럽거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철학자들이 그런다는 뜻인데, 이 경우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것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매번 피할 수는 없다.”는 진리 하나를 얻게 된다. 그것이 윤리와 직결된다면 그 진리의 의무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맞는데, 그 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괴물과 같은 그 말은 피하면 안 된다. 이 상황은 어느 시대든 적용된다. 더불어 이 사회의 우리에게도 소중한 진리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만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외치는 삶은 얼마나 간드러진 맛이 있는가. 한 곡의 노래와도 같고, 한 편의 시와도 같고, 아니면 멋진 산수화나 서양화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와 멋을 조금이라고 아는 이라면 그것에 자신의 이성과 감각을 모두 맡기고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것 중에 진리가 없다고 하진 않겠다. 그것으로 향하는 것이 최종의 지혜인 것도 안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면되는 것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아름다움에의 맹종’이라면 지양해야 하는 것이 저 더러운 똥과 소크라테스의 어려운 철학과 여성 현대예술가들의 기괴한 몸동작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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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4-1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학교 잘 다니고 있죠? 이 글은 많이 늦게 와서 보지만 역시 흥미로워요. 저도저도 '그로테스크'한 그림들 좋아해요. 처음 그림을 보게 된 것도 메두사 같은 거였던 것 같고..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서평도 뜸한데..^^

탕기 2012-04-30 23:38   좋아요 0 | URL
그간 시험이다, 레포트다, 발표다, 해서 나름의 핑계를 대자면 바빴습니다.^^; 운이 나쁘게도 중간시험 전에 과제들이 몰려 있게 됐어요. 한 고비 넘기긴 했습니다만 학기말까지 또 어떤 과제들이 주어질지 살짝 겁부터 나네요. 틈틈 읽었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올리려고 들어왔는데, 아이리님의 댓글을 이제사 확인했습니다. 이 공간을 너무 오래 방치해둔 감이 있네요.

맘을 놔야 읽고픈 책을 펼칠 수 있는 성격이라, 참 고쳐야 하긴 하는데, 그런 면에서 바쁜 직장생활 중에 다독하는 분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리뷰 올려놓고서야 "이제부터는 정신 없어도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뭔가 벼려봅니다. 여하튼 오랜 만에 아이리님 만나니까 마음 편해지고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