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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3
나는 문명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 그리고 문명을 비판할 만큼 반(反)문명적 실천행동들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오래된 미래>를 읽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은 서구식 ‘낭만하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농촌에서 살아보지도 않은 도시인이 농촌에 대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의 낭만적 통념에 별 무리 없이 승차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태도로 글을 쓴다는 것은 거짓부롱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천행동들을 이끌 의식의 변화와 조우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거짓부롱은 차라리 양심을 선물하는 기부자가 아닐까? 타인의 경험과 비판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책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다. 그 기능을 길벗으로 삼아 거짓에서 진실로 나를 한 걸음씩 옮겨본다.
<오래된 미래>는 사실 ‘티벳’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읽었다. 왜 내가 티벳을 그토록 동경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참 웃을 때 대체 내가 왜 웃는지 분명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뭔가를 산에 빗대어 사유하기를, 그리고 산의 웅장함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티벳에는 산이 (엄청) 많다. 아니면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좋아해 수도 없이 돌려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단순하고도 사소한 이유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나 실은 그 중 무엇 하나 명쾌한 것이 없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그들의 순수한 삶이 마냥 부러웠다. “순수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은 애당초 거치지 않고, 그들이 그냥 순수해보였다.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있다면야 언제든 그곳에 가 내적 삶에 전념해보겠노라 벼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나에게 덧입혀진 ‘문명의 색깔’을 얼마나 지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방송프로그램, 인터넷, 문명화된 사람들과의 교우, 온갖 루머와 사태 등을 접하며 사실상 더럽혀져왔으며, 또한 누군가를 더럽혀왔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결론을 쉽사리 내릴 수는 없겠지만 감정적으로 내가 현대문명에 반동적 정서를 갖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 역시 소위 말하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온갖 호사 다 누리고 하는 배부른 소리라 해도 좋다. 돌이켜봤을 때, 호사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호사는 대부분 그냥 ‘사(事)’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삶의 정신적 호사를 누리며 깊고도 밝은 미소를 마음껏 구사하던 비(非)문명권 사람들이 문명의 세례를 받아 “우리는 가난합니다. 도와주세요.”와 같은 열등감을 갖는 사례들 앞에서, 나의 가슴도 덩달아 무너졌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차라리 재미라도 있지, <오래된 미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비극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슬픔에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방법을 찾는다.
<오래된 미래>는 현대인이 라다크에 들어가 자신이 현대인임을 자각하고, 한편으로는 라다크가 서구화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글이다. 라다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곳의 삶이 변화하는 쓰라린 과정을 목도한 헬레나는 라다크의 사례에서 전 지구적인 질문을 뽑아낸다. 우리의 삶은 정상적이냐는 것이다. 행복하냐는 것이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사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항상 웃고,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며,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를 북돋아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면 “글쎄요?”라고 갸우뚱한다. 몸에 익은 것이다. 현대인들이 자기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서점가에서 자기계발 도서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멘토’라는 단어가 다시 유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모두 현대인들이 대체로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왜 그런가?”에 대한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사회를 떠나 홀로 살기를 실천하기도 한다. 주변 상황이 우리를 병에 걸리게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래서 불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수 천 년 전에 등장한 종교를 대하며 서양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 붓다의 가르침이 ‘역발상’이란다. 우리가 가르침에 역(逆)한 것임에도 말이다. 모든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오래된 사고를 외면했던 사회의 병폐가 이제 고대(古代)의 메시지로 치유될 분위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도시가 아닌 비(非)문명화의 영토를 찾는다. 아니, ‘문명’이라는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이렇게 바꿔본다. 순수한 영토. <오래된 미래>는 이에 관한 내용이다.
헬레나의 세심한 관찰과 뜻밖의 깨달음, 그리고 동화(同和)는 읽는 이에게 한 권의 계발 도서과도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좋은 문장, 예사롭지 않은 문장 등이 곳곳에 실려 있어 나는 이 책에 수많은 밑줄을 그어 놨다. 가령 이런 것들이 마음을 울렸다. 라다크 사람들이 시간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말들 중 ‘공그로트(어두워진 다음 잘 때까지)’, ‘니체(해가 산꼭대기에)’, ‘치페(해뜨기 전에 새들이 노래하는 아침시간)’ 같은 단어들, “말을 백 마리 가진 사람이라도 채찍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와 같은 속담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달이 호수로 옮겨간 일이 없는데도 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친 것과 같음을.”과 같은 격언(<사마디라자수트라(月燈三昧經)>)들은 마음을 청명하게 만들고, 생각의 방향을 알려준다. 이따금 헬레나가 직접 찍은 듯한 라다크 사람들의 함박웃음은 금방 내게 전염되었다. 아, 이렇게 웃어보니 마음이 참 가벼워지는 것을. 헬레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큰 시련 앞에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불행할 게 뭐냐?”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즘 들어 참 좋아하는 ‘쿨’한 태도이지 않은가. 겉으로만 ‘척’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이다.
하지만 2부 ‘변화’에서부터 에필로그까지 읽으면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라다크 사람들이 서구화되어가는 과정을 접하며 독자들은 순수가 말살당하는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를 목격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보면 근래 들어 이런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새와 쥐만이 다닐 수 있다는 가늘고 험준한 상로(商路) 조로서도를 넘나들던 마방들이 멍하니 서서 발파작업을 바라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중국정부가 야심차게 시행 중인 ‘시짱자치주(티벳) 중국화’의 일환으로 4~5천m급 고산지대에 도로가 건설 중인 광경 말이다. 반년은 족히 걸리는 윈난-티벳-네팔의 무역여정은 분명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과거 중국 왕조들의 핍박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촘촘히 얽힌 생의 ‘고리’를 잡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두거나 남에게 돌려줬다. 지금은 다르다. 물가는 누가 조정하는지 모르겠고, 가뜩이나 물가가 전반적으로 올랐는데도 유류세가 또 오른다니 어떻게 해볼 방도도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지만 버스비와 택시비는 무섭다. 이러니 행복할 수가 없다. 헬레나의 주장은 결국 마르크스를 복기한 것과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상호협력 대신 멀리 떨어진 곳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내릴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모든 수준에서 수동성과 심지어는 무감각이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오래된 미래>의 129쪽에는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 중 하나가 적혀 있다. 헬레나가 인터뷰한 ‘체왕 팔조르’라는 사람이 1975년에는 “여기는 가난 같은 건 없어요.”라고 말했다가 1983년에는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라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대체 라다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라다크 사람들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서구화의 오만은 문화의 피(被)침투자에게 엄청난 수준의 열등감을 선물한다. 서구화는 가속된다. 사람들이 ‘나이키’ 모자를 쓰고,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켈빈클라인’ 짝퉁 청바지를 입는다. 돈이 사람을 야비하게 만들고, 지역사회는 찢어지며, 평화롭게 공존하던 종교들이 서로 비방하다가 결국 장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서구화의 세례는 이렇듯 잔인하다. 왜 이런 역사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일어난 것일까? 헬레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새로운 빠른 기술이 결국은 시간을 절약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하기보다는 서두른다. 매우 바쁘나, 비(非)역동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명병’이다. 우리에게 이런 분석은 케케묵은 반찬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마다 않고 먹는다.
서구식 개발의 ‘한국 버전(?)’은 북한에서 구호로 사용하는 이른바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나는 일산에서도 서쪽 외곽에 사는데,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산에서 파주 쪽으로는 거의 다 논이었다. 경의선 하나만 딸랑 있고, 군데군데 야트막한 지붕의 마을들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전벽해이다. 가장 크다는 호수공원(가온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들어서는 중인데, 문자 그대로 ‘가관’이다. 고개를 90도를 꺾어야 지붕 끄트머리가 겨우 보이는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대나무처럼 솟아 있고, 아직 입주하지 않은 아파트들이 이곳의 앞날, 그 ‘복작복작’거릴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예고하고 있다. 광역버스들도 하나 둘 노선을 연장시켜 들어오고, 분당과 함께 신도시 경쟁을 하던 이곳 일산을 곧 있으면 가뿐히 뛰어넘을 기세이다. 각종 문화시설들도 입점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후면 이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가족과 함께 구경삼아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일산 두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으면 얼마나 징그러울까? 이곳은 사람도 많고, 돈도 많고, 따라서 탈도 많은 나라가 아닌가.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는데 괜스레 목이 갑갑해졌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선진문명과 기술의 포화를 기꺼이 반기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개그맨 최효종氏의 말마따나 우리나라에는 그나마 통용되는 미덕이 있어 “쇠고랑을 차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넉넉한 인심이 오고 가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발도상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현대화의 피해를 마냥 TV뉴스나 신문, 혹은 인터넷기사를 통해 접하며 방관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집’에도 불이 나 있다. 불신, 갈등, 편견, 못된 권력, 인공적 결핍,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한 절망감, 깨진 결속, 오만한 잣대, 스스로 거만해지는 방법을 통해 애써 수동적 인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나친 아집, 사치. 이렇게 순서 없이 뒤죽박죽 적어 봐도 쓴 것보다는 안 쓴 것이 더 많을 정도로 더러운 것들이 넘쳐나는 ‘우리집’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대하다. 아니, 헬레나의 말마따나 그걸 ‘방기(放棄)’한다. 나쁜 것들이 노크를 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동요를 부르며 내쫓아도 시원찮을 판에 우리는 환경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면서도 끝없이 올라가는 GNP의 ‘승리’를 보며 “아, 우리는 잘 사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법륜 스님의 말마따나 다 우리 잘못이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고 닦아” 마침내 ‘균질화’되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서구화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살 길을 모색한다. 어찌 보면 파렴치한 행동이다. 아니, 파렴치한 행동이 맞다. 라다크 사람들이 이전의 삶을 돌아가는 일은 헬레나의 말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라다크에 있었던 때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지금 라다크에는 문명화된 채로 태어난 내 나이 또래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낙후된 곳이라고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더러 올바른 생각을 갖고 예전의 삶을 고수하려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형세는 큰 파도를 앞에 둔 작은 돛단배와 같다. 헬레나가 책을 마무리하며 내리는 결론은 단 하나이다. 조화를 위한, 즉 ‘공존’과 ‘공생’을 위한 대안으로써 라다크의 옛 모습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녀는 당시 책을 쓸 때,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았는지 “아직 기회는 있다.”고 거듭 역설했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해도 희망의 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비관론이 더 현실적이라는 역공을 받는다. Discovery Channel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뉴욕의 기상캐스터가 환경파괴와 재앙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결코 절약을 하지 않을 거예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자연재해로 뉴욕 전체가 날아가 버리면 됩니다. 그때 즈음이면 모두 놀라서 콘센트에 꽂힌 코드들을 최대한으로 빼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려고 하겠지요.” 문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편리한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복기가 허공의 메아리로 남지 않고자 하기 위해서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창피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