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살의 - JM북스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손지상 옮김 / 제우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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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꽃>, <암흑소녀>, <성모> 등 화제의 미스터리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의 반전 미스터리 소설 <유리의 살의>.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질 못해서 최근엔 살짝 거리를 뒀던 장르여서 오랜만에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시 이 맛에 읽는 거지! 싶을 정도로 <유리의 살의>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사람을 죽였다고 스스로 신고하는 첫 장면부터 영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가 자리 잡습니다. 누군가를 살해한듯한 여자의 혼미한 정신 상태에 어떤 사건인지 궁금해집니다.


잠시 후, 여자는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그런데 고3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기억이 사라져 있습니다. 현재 마흔하나에 결혼까지 한 마유코. 갑자기 남편까지 있는 중년의 나이에, 사람을 죽인 용의자 신세가 되었다는 거에 충격을 먹습니다.


마유코는 20년 전에 벌어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수십 분 만에 기억을 잃습니다. 마유코의 부모는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로, 당시 마유코 역시 범인으로부터 도망치다 과속하던 차에 치여 뇌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유코를 친 자동차 운전자가 지금의 남편입니다. 사고 1년 후에 기억장애를 가진 상대와 결혼했다니. 벌써 의심 한 자락을 던지는 작가입니다.


기억장애가 있는 용의자라니. 자수는 했지만 범행은 기억 못 하는 마유코를 두고 형사는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모두 마유코가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전개는 마유코가 살해한 피해자의 정체에 있습니다. 바로 부모를 살해했던 묻지마 살인범이었던 겁니다. 무기징역을 받고도 환각 상태 심신 미약 판정을 받아 감형을 받고 가석방된 그가 마유코에게 죽은 겁니다.


마유코는 부모님의 복수를 했던 걸까요. 그렇다면 기억장애가 있으면서 어떻게 복수를 실행했을까요. 용의자의 기억은 없지만 동기가 확실해지니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고구마 백만 개쯤 선사하는 마유코의 기억은 읽는 내내 답답증을 안길 뿐입니다. 수십 분 만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시전하니 형사도 이젠 알아서 상황 요약을 줄줄 읊을 정도입니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날카로운 물체의 감촉이라든지, 죽어가던 남자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니 마유코는 어쨌든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체포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면 분명 죽인 것도 완전히 잊어버렸을 거라며 말이죠.


<유리의 살의>에는 마유코의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 유카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간병을 맡게 된 유카는 오빠와 남동생에게 서운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더 부끄럽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며 간병에 대한 보상을 자꾸 찾는 자신의 모습에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감당이 되지 않자 시설에 입소했지만, 마음이 계속 불편합니다. 간병이란 보고 싶지 않은 부모의 모습까지 봐야만 하는 거고, 당사자가 되니 점점 꼬여가고 뒤틀립니다. 어머니는 대가 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주었는데, 자신은 손해 안 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를 간병한다는 것에서 형사 유카와 마유코 남편의 상황이 겹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에서 남편의 행동이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역시 초반에 작가가 던진 의심대로 사건의 진실은 남편의 손아귀에 있는 걸까요.


"인간이 지닌 감정 가운데 가장 격렬한 감정일 터인 살의조차 내 마음에는 남지 않아.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게,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 - 책 속에서


수십 분마다 내 존재를 잊은 채 한 줌 남은 기억을 더듬어가는 삶이라니,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메멘토>처럼 기억상실과 살인이라는 소재는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인 것 같아요. 거기에 독자의 예상을 깨뜨리는 절묘한 반전은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우린 이제 밋밋한 플롯만으로는 자극을 덜 받으니까요.


<유리의 살의>에서도 메일과 일기로 자기 기억을 유지하면서 부모님의 복수를 원한 마유코의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 숨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인 미스터리물을 읽으며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도 맞닥뜨릴지 모르겠어요. 반전 이후의 여운이 꽤 있는 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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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 10만 명이 함께한 서울시교육청 인문학 강좌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1
백상경제연구원 지음 / 스마트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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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드림 콘서트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청소년뿐만 아니라 인문학 초보도 읽기 좋은 옴니버스 형식의 책입니다. 코로나로 지속가능한 온라인 학습으로 전환한 서울시 대표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2.0은 유튜브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요,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에서는 400여 개 강좌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나봐야 할 열 가지 주제를 선정해 수록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삶의 바탕이 되는 인문학.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는 청소년에게 삶의 본질적 물음을 던지로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인 생각의 싹을 틔우는 출발점이 되는 책입니다. 신화, 철학, 문학, 미술사, 스토리텔링, 영화, 환경, 인공지능 등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한 주제를 다룹니다.


신화하면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 정도만 알고 있었다면 이번엔 켈트 신화의 매력을 한 번 만나보세요. 세상 모든 요정들이 대부분 켈트 출신이라고 합니다. 켈트 신화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문화 콘텐츠 곳곳에서 이미 만나고 있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세계관에 등장하고 있거든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 영웅, 상상의 동식물처럼 신기한 존재가 많은 만큼 상상력의 보고인 신화.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는 신화가 무엇인지,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근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하게 하는 신화에 대해 알려줍니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신화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지혜와 사랑을 합쳐 만들어진 단어가 철학입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만큼 선입견 큰 것도 없지요.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는 철학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지혜를 사랑하면서 자신을 채워가는 삶이 바로 '철학함'이라고 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이야기할 때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결 구조를 통해 자유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나'를 찾아가는 자아발견에서는 다양한 고전 문학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등 딱딱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미래의 생존을 위해서 어떤 태도로 이 땅의 생명체들과 공존해야 하는지, 온택트 문명에 선 우리가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탄생했던 뉴노멀 현장을 살펴보는 등 나의 목소리를 내며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삶을 위해 가져야 할 인문학적 태도에 대해 들려줍니다.


글쓰기에 도움 되는 스토리텔링 작법에 대한 주제도 흥미로웠어요. 이슈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깊은 질문을 낳게 하는 동력이 될 노하우를 알려줍니다.


양식의 억압에서 벗어나 문화혁명 시대에 이르른 오늘날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복잡한 미술사를 쉽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시각적 진실에 근거한 모방 시대에서 어떠한 예술도 허용하는 다원주의적 시대에 들어선 예술의 역사와 방향과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다루고 있는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는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취향 발견 계기를 마련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와 미래가 요구하는 콘텐츠의 융합과 통섭, 재해석의 정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인문학이 아닌, 학문의 경계를 허물며 흥미진진하게 접근하는 방식은 창의성의 무한함을 일깨웁니다. 다양한 그림과 사진, 도표로 밋밋함 없이 진행하는 구조도 흥미를 끌어당깁니다. 해당 주제에서 함께 보면 좋을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있어 더 많은 콘텐츠를 접목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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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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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기욤 뮈소 작가하면  로맨스 소설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던 터라 제 취향상 먼저 손이 가지는 않았었는데 이번 기욤 뮈소의 신작 <인생은 소설이다>는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구성으로 쓰인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서 드디어 기욤 뮈소 작가의 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최근 그의 작품에 작가가 주인공인 소설은 끌리더라고요.


<인생은 소설이다>에는 두 명의 작가가 등장합니다. 먼저 스코틀랜드 출신 소설가 플로라 콘웨이는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작가입니다. 데뷔작에서부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며 세 권의 책을 썼지만, 단 한 번도 언론에 나서지 않아 신비주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세 번째 소설은 프란츠 카프카 상을 수상했음에도 시상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플로라는 현재 심신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6개월 전 아파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도중 실종된 딸 때문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고 적막한 집. 찾는 '척하기'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분은 꺼림칙해집니다. 현관문도 굳게 잠겨 있고 혼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조건인데도 딸의 종적이 묘연합니다.


도대체 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납치라면 누가 왜 어떻게 한 건지 경찰 수사도 지지부진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실종 사건은 언론과 대중에게 흥미로운 먹잇감이기도 합니다. 딸의 실종이 그저 오락거리 대상이 되었습니다. 악의적인 기사에다가 용의자 취급받는 작가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플로라의 소설을 담당하는 출판사 대표는 이제 그만 플로라에게 글을 쓰기를 종용합니다. 플로라의 소설을 독점하고 있어 출판사도 플로라가 성공할수록 함께 명성을 얻었기에 플로라의 책이 나오지 않게 된다면 타격이 커집니다. 출판사를 부자로 만들어준 플로라는 딸이 태어나자 육아에 전념하며 공백기를 가지겠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소설에서 딸로 바뀐 셈이죠. 하지만 이제 그 딸이 사라졌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글이 제격이라며 소설을 쓰도록 설득하는 출판사와 이제는 껄끄러운 관계가 됩니다.


"고통은 작가에게 이상적인 연료가 될 수 있어." - 책 속에서


이쯤 되면 출판사 대표가 범인일까? 하는 생각이 들법하지만 기욤 뮈소 작가는 여기서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게 꼭두각시 인형처럼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플로라는 깨닫습니다. (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갓능력이었어요.)


여기서 두 번째 작가가 등장합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가 다짜고짜 작가를 불러내며 작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등장인물이 자신의 의지로 독자적인 행동을 한 겁니다.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겪는 이는 플로라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로맹 오조르스키 작가입니다.


로맹은 글쓰기에 매달리느라 결혼생활이 파탄나 아들의 양육권도 잃고 그 역시 삶의 의미가 없어진 상태에서 스무 번째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열아홉 권의 소설은 모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잘나가는 작가였는데 이혼 과정에서 생긴 악의적인 모함 때문에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매번 눈 덮인 에베레스트 산 아래에서 맨발로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 책 속에서


출판계 전설로 불리는 재스퍼 역시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한 플로라의 출판사 대표가 한 것처럼 비슷한 말을 합니다. 작가로서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기면 아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아빠를 무척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소설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픽션 세계 속에서 헤매는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인생은 소설이다>.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이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며 등장인물이 자신을 창조한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두 세계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현실세계로 나오는 길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문학 세계나 예술 세계에선 종종 가명을 사용해 문학적 분신을 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얼굴 없는 작가로 알려진 엘레나 페란테처럼 끝끝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들도 있고요. <인생은 소설이다>에서는 유명 작가로 사는 두 사람의 압박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표 인기 작가인 기욤 뮈소의 작가관과 소설관이 반영된 걸까요. 지금 우리 삶에서 유행하는 부캐처럼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플로라는 로맹의 클릭 한 번으로 존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는 그렇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 플로라와 로맹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반전의 반전을 거듭합니다. 계속 의심 들게 하는 (엉뚱한 곳에!) 상황을 유도하는 기욤 뮈소의 매력적인 전개와 기발한 반전 요소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어요.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스타일도 양념처럼 등장해 읽는 맛이 좋았습니다. 페이지 터너라는 명성에 걸맞게 술술 잘 읽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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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대지 3부작 세트 - 전3권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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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고 상 역사 최초 3년 연속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타임>이 고른 역사상 최고의 판타지 소설 100선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한 N. K. 제미신 작가의 '부서진 대지' 3부작. 2019년 1월 한국어판으로 출간되며 1권을 읽자마자 대박! 외쳤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드디어 2020년 11월 대망의 완결편이 출간되어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는 아쉬움 속에 대작을 읽어내려갔습니다.


1권을 읽었을 땐 반지의 제왕이 가진 중후함과 매드맥스의 비주얼이 느껴진다고 감상평을 했었는데 완결편 <석조 하늘>에 이르러서는 와... 그 이상의 감동이 몰려왔어요. 제노사이드와 모성이라는 키워드를 이렇게 풀어내는 대작이었다니, <석조 하늘>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정수라는 걸 느꼈습니다.


SF와 아프로퓨처리즘 판타지의 매력적인 조화가 빛나는 소설 <부서진 대지> 시리즈. 평소 성과 인종 차별 문제에 앞장선 N. K. 제미신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뿌리깊은 차별과 증오의 역사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는 한 문장이 인상 깊었는데요. 고요 대륙의 활기찬 도시 유메네스에서 일어난 종말의 시작을 그렸습니다. 에너지를 볼 수 있고 조종하는 조산력을 가진 불가사의한 존재 오로진. 훈련받지 않은 오로진은 위협에 본능적으로 반응을 해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일 수 있기에 일반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아이콘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에쑨도 자신의 능력과 정체를 숨기며 평범한 척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유메네스에서 갑작스레 발생한 재앙은 대륙 곳곳을 파괴해버리고, 마을에 닥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쓴 능력 덕분에 에쑨은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게다가 에쑨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이 자식에게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남편은 분노 끝에 아들을 죽이고 딸은 데리고 도망가 버리는 일까지 겹치며 남편을 쫓는 에쑨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들에 빠져드는 시간이었어요. 산도 움직일 수 있는 조산력을 가진 오로진과 그런 오로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호자, 인간형 생명체이지만 돌로 이뤄진 스톤이터가 주축을 이룹니다.


재앙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계절이라는 다섯 번째 계절이 닥친 고요 대륙. 인간의 멸종을 부를 만큼 강력한 계절에 대한 비밀은 2권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조금씩 밝혀지지만, 3권 <석조 하늘>에 이르러 그 비밀의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까지 드러나면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세계관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에쑨과 딸 나쑨, 그리고 스톤이터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며 지금 이 시점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장면 전환이 이뤄져 지루함 없이 전개됩니다. 딸 나쑨의 능력도 생각보다 강력해 그 어미의 딸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더군요. 하지만 에쑨의 일생에 워낙 빠져들다 보니 나쑨의 이야기에서는 조금 심드렁해졌던 건 사실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나쑨을 바라보게 되어 종종 '저러면 안 되는데...' 물가에 내놓은 애를 바라보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딸을 찾아 나선 엄마의 고생담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기이한 방식으로 하늘 높이 떠 있는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수정 조각인 오벨리스크와 달, 대지와 관련한 비밀이 밝혀지는 여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 대지의 분노로 발생하는 재앙은 샤머니즘과 SF의 조합이 멋지게 버무려진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대지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그 자식을 인간의 만용 때문에 잃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번째 계절을 몰고 왔습니다. 대지의 자식은 달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달을 잃었는지 3권 <석조 하늘>에서 스톤이터의 눈으로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생물마학과 유전공학의 최정점으로 만들어진 스톤이터의 비밀도 밝혀집니다. 까도 까도 계속 놀라움을 던져주는 작가입니다.


딸과 헤어진 지 2년여의 시간 동안 에쑨과 나쑨이 겪은 일들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입니다. 외로움과 복수심이 혼재한 엄마와 딸 둘 다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분노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차린 에쑨은 결국 더는 조산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산력을 쓸 때마다 돌로 변하는 벌을 받게 된 겁니다.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오로진인 에쑨이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다니 이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대지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요. 슬프게도 에쑨과 나쑨의 해결책은 궤를 달리합니다. 대지와 생명 사이의 해묵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에쑨은 사라진 자식인 달을 붙잡고 대지와 화해를 청하며 다섯 번째 계절을 끝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쑨은 위기의 순간에 진짜 가족보다 더 애틋한 가족이 되어줬던 수호자의 죽음을 계기로 인류 멸망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세상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오로진의 세계를 묘사하는 장면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에쑨의 껌딱지 스톤이터인 호아의 이야기도 마음에 쏙 들고요.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가 없는 삶을 사는 스톤이터의 존재를 오로진만큼이나 묘합니다.


완결편 <석조 하늘>에서 밝혀지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의 비밀은 정말 경악스럽습니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아요.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법을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인간의 약탈적인 면모가 결국 대지의 분노를 일으키게 한 소설의 배경은 부족과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멈추지 않고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는 현재 지구와 인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에쑨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 여정을 봐서인지 에쑨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입니다. 해결 방향이 다른 나쑨과는 대결 구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성을 내세운 에쑨이 안타까워지기도 했고, 불안한 시기를 보낸 나쑨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이 최고조에 달하도록 긴장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클라이맥스 장면도 압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로 시작한 다섯 번째 계절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세요.


2권을 읽을 때만 해도 넷플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완결 편 <석조 하늘>까지 다 읽고는 마음이 바뀌었어요. 웅장한 영상미도 보고 싶지만, 이런 대하 서사를 어떻게 세심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여운이 가득한 소설입니다. 판타지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멋진 소설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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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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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아프로퓨처리즘 판타지의 매력적인 조화가 빛나는 소설 <부서진 대지 3부작>. 


제노사이드와 모성이라는 키워드를 이렇게 풀어내는 대작이었다니, 완결편 <석조 하늘>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정수라는 걸 느꼈습니다.


딸과 헤어진 지 2년여의 시간 동안 에쑨과 나쑨이 겪은 일들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입니다. 외로움과 복수심이 혼재한 엄마와 딸 둘 다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분노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차린 에쑨은 결국 더는 조산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산력을 쓸 때마다 돌로 변하는 벌을 받게 된 겁니다.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오로진인 에쑨이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다니 이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대지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요. 슬프게도 에쑨과 나쑨의 해결책은 궤를 달리합니다. 대지와 생명 사이의 해묵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에쑨은 사라진 자식인 달을 붙잡고 대지와 화해를 청하며 다섯 번째 계절을 끝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쑨은 위기의 순간에 진짜 가족보다 더 애틋한 가족이 되어줬던 수호자의 죽음을 계기로 인류 멸망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흑화 조짐이 조금씩 보여서 저도 모르게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계속 나쑨의 이야기를 읽을 땐 불안해했었나 봐요)


"타인의 절망과 절박함을 무기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항상 있었지." - 책 속에서 


세상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오로진의 세계를 묘사하는 장면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에쑨의 껌딱지 스톤이터인 호아의 이야기도 마음에 쏙 들고요.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가 없는 삶을 사는 스톤이터의 존재를 오로진만큼이나 묘합니다.


완결편 <석조 하늘>에서 밝혀지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의 비밀은 정말 경악스럽습니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아요.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법을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인간의 약탈적인 면모가 결국 대지의 분노를 일으키게 한 소설의 배경은 부족과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멈추지 않고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는 현재 지구와 인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에쑨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 여정을 봐서인지 에쑨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입니다. 해결 방향이 다른 나쑨과는 대결 구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성을 내세운 에쑨이 안타까워지기도 했고, 불안한 시기를 보낸 나쑨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이 최고조에 달하도록 긴장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클라이맥스 장면도 압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로 시작한 다섯 번째 계절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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