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대지 3부작 세트 - 전3권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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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고 상 역사 최초 3년 연속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타임>이 고른 역사상 최고의 판타지 소설 100선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한 N. K. 제미신 작가의 '부서진 대지' 3부작. 2019년 1월 한국어판으로 출간되며 1권을 읽자마자 대박! 외쳤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드디어 2020년 11월 대망의 완결편이 출간되어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는 아쉬움 속에 대작을 읽어내려갔습니다.


1권을 읽었을 땐 반지의 제왕이 가진 중후함과 매드맥스의 비주얼이 느껴진다고 감상평을 했었는데 완결편 <석조 하늘>에 이르러서는 와... 그 이상의 감동이 몰려왔어요. 제노사이드와 모성이라는 키워드를 이렇게 풀어내는 대작이었다니, <석조 하늘>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정수라는 걸 느꼈습니다.


SF와 아프로퓨처리즘 판타지의 매력적인 조화가 빛나는 소설 <부서진 대지> 시리즈. 평소 성과 인종 차별 문제에 앞장선 N. K. 제미신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뿌리깊은 차별과 증오의 역사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는 한 문장이 인상 깊었는데요. 고요 대륙의 활기찬 도시 유메네스에서 일어난 종말의 시작을 그렸습니다. 에너지를 볼 수 있고 조종하는 조산력을 가진 불가사의한 존재 오로진. 훈련받지 않은 오로진은 위협에 본능적으로 반응을 해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일 수 있기에 일반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아이콘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에쑨도 자신의 능력과 정체를 숨기며 평범한 척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유메네스에서 갑작스레 발생한 재앙은 대륙 곳곳을 파괴해버리고, 마을에 닥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쓴 능력 덕분에 에쑨은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게다가 에쑨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이 자식에게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남편은 분노 끝에 아들을 죽이고 딸은 데리고 도망가 버리는 일까지 겹치며 남편을 쫓는 에쑨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권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들에 빠져드는 시간이었어요. 산도 움직일 수 있는 조산력을 가진 오로진과 그런 오로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호자, 인간형 생명체이지만 돌로 이뤄진 스톤이터가 주축을 이룹니다.


재앙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계절이라는 다섯 번째 계절이 닥친 고요 대륙. 인간의 멸종을 부를 만큼 강력한 계절에 대한 비밀은 2권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조금씩 밝혀지지만, 3권 <석조 하늘>에 이르러 그 비밀의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까지 드러나면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세계관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에쑨과 딸 나쑨, 그리고 스톤이터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며 지금 이 시점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장면 전환이 이뤄져 지루함 없이 전개됩니다. 딸 나쑨의 능력도 생각보다 강력해 그 어미의 딸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더군요. 하지만 에쑨의 일생에 워낙 빠져들다 보니 나쑨의 이야기에서는 조금 심드렁해졌던 건 사실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나쑨을 바라보게 되어 종종 '저러면 안 되는데...' 물가에 내놓은 애를 바라보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딸을 찾아 나선 엄마의 고생담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기이한 방식으로 하늘 높이 떠 있는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수정 조각인 오벨리스크와 달, 대지와 관련한 비밀이 밝혀지는 여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 대지의 분노로 발생하는 재앙은 샤머니즘과 SF의 조합이 멋지게 버무려진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대지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그 자식을 인간의 만용 때문에 잃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번째 계절을 몰고 왔습니다. 대지의 자식은 달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달을 잃었는지 3권 <석조 하늘>에서 스톤이터의 눈으로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생물마학과 유전공학의 최정점으로 만들어진 스톤이터의 비밀도 밝혀집니다. 까도 까도 계속 놀라움을 던져주는 작가입니다.


딸과 헤어진 지 2년여의 시간 동안 에쑨과 나쑨이 겪은 일들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입니다. 외로움과 복수심이 혼재한 엄마와 딸 둘 다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분노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오벨리스크의 문을 열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차린 에쑨은 결국 더는 조산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산력을 쓸 때마다 돌로 변하는 벌을 받게 된 겁니다.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오로진인 에쑨이 더는 힘을 쓸 수 없게 되다니 이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대지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요. 슬프게도 에쑨과 나쑨의 해결책은 궤를 달리합니다. 대지와 생명 사이의 해묵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에쑨은 사라진 자식인 달을 붙잡고 대지와 화해를 청하며 다섯 번째 계절을 끝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쑨은 위기의 순간에 진짜 가족보다 더 애틋한 가족이 되어줬던 수호자의 죽음을 계기로 인류 멸망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세상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오로진의 세계를 묘사하는 장면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에쑨의 껌딱지 스톤이터인 호아의 이야기도 마음에 쏙 들고요. 죽고 싶은데도 죽을 수가 없는 삶을 사는 스톤이터의 존재를 오로진만큼이나 묘합니다.


완결편 <석조 하늘>에서 밝혀지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의 비밀은 정말 경악스럽습니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아요.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법을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인간의 약탈적인 면모가 결국 대지의 분노를 일으키게 한 소설의 배경은 부족과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멈추지 않고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는 현재 지구와 인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에쑨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는 여정을 봐서인지 에쑨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입니다. 해결 방향이 다른 나쑨과는 대결 구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성을 내세운 에쑨이 안타까워지기도 했고, 불안한 시기를 보낸 나쑨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이 최고조에 달하도록 긴장감을 유발하는 작가의 클라이맥스 장면도 압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로 시작한 다섯 번째 계절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세요.


2권을 읽을 때만 해도 넷플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완결 편 <석조 하늘>까지 다 읽고는 마음이 바뀌었어요. 웅장한 영상미도 보고 싶지만, 이런 대하 서사를 어떻게 세심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여운이 가득한 소설입니다. 판타지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멋진 소설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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