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살의 - JM북스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손지상 옮김 / 제우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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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꽃>, <암흑소녀>, <성모> 등 화제의 미스터리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의 반전 미스터리 소설 <유리의 살의>.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질 못해서 최근엔 살짝 거리를 뒀던 장르여서 오랜만에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시 이 맛에 읽는 거지! 싶을 정도로 <유리의 살의>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사람을 죽였다고 스스로 신고하는 첫 장면부터 영화를 보는 듯한 이미지가 자리 잡습니다. 누군가를 살해한듯한 여자의 혼미한 정신 상태에 어떤 사건인지 궁금해집니다.


잠시 후, 여자는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그런데 고3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기억이 사라져 있습니다. 현재 마흔하나에 결혼까지 한 마유코. 갑자기 남편까지 있는 중년의 나이에, 사람을 죽인 용의자 신세가 되었다는 거에 충격을 먹습니다.


마유코는 20년 전에 벌어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수십 분 만에 기억을 잃습니다. 마유코의 부모는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로, 당시 마유코 역시 범인으로부터 도망치다 과속하던 차에 치여 뇌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유코를 친 자동차 운전자가 지금의 남편입니다. 사고 1년 후에 기억장애를 가진 상대와 결혼했다니. 벌써 의심 한 자락을 던지는 작가입니다.


기억장애가 있는 용의자라니. 자수는 했지만 범행은 기억 못 하는 마유코를 두고 형사는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모두 마유코가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전개는 마유코가 살해한 피해자의 정체에 있습니다. 바로 부모를 살해했던 묻지마 살인범이었던 겁니다. 무기징역을 받고도 환각 상태 심신 미약 판정을 받아 감형을 받고 가석방된 그가 마유코에게 죽은 겁니다.


마유코는 부모님의 복수를 했던 걸까요. 그렇다면 기억장애가 있으면서 어떻게 복수를 실행했을까요. 용의자의 기억은 없지만 동기가 확실해지니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고구마 백만 개쯤 선사하는 마유코의 기억은 읽는 내내 답답증을 안길 뿐입니다. 수십 분 만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시전하니 형사도 이젠 알아서 상황 요약을 줄줄 읊을 정도입니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날카로운 물체의 감촉이라든지, 죽어가던 남자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니 마유코는 어쨌든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체포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면 분명 죽인 것도 완전히 잊어버렸을 거라며 말이죠.


<유리의 살의>에는 마유코의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 유카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간병을 맡게 된 유카는 오빠와 남동생에게 서운한 게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더 부끄럽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며 간병에 대한 보상을 자꾸 찾는 자신의 모습에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감당이 되지 않자 시설에 입소했지만, 마음이 계속 불편합니다. 간병이란 보고 싶지 않은 부모의 모습까지 봐야만 하는 거고, 당사자가 되니 점점 꼬여가고 뒤틀립니다. 어머니는 대가 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주었는데, 자신은 손해 안 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를 간병한다는 것에서 형사 유카와 마유코 남편의 상황이 겹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에서 남편의 행동이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역시 초반에 작가가 던진 의심대로 사건의 진실은 남편의 손아귀에 있는 걸까요.


"인간이 지닌 감정 가운데 가장 격렬한 감정일 터인 살의조차 내 마음에는 남지 않아.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게,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 - 책 속에서


수십 분마다 내 존재를 잊은 채 한 줌 남은 기억을 더듬어가는 삶이라니,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메멘토>처럼 기억상실과 살인이라는 소재는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인 것 같아요. 거기에 독자의 예상을 깨뜨리는 절묘한 반전은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우린 이제 밋밋한 플롯만으로는 자극을 덜 받으니까요.


<유리의 살의>에서도 메일과 일기로 자기 기억을 유지하면서 부모님의 복수를 원한 마유코의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 숨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인 미스터리물을 읽으며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도 맞닥뜨릴지 모르겠어요. 반전 이후의 여운이 꽤 있는 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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