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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평점 :
끝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시간을 겪다 보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만날 수 있습니다. 상반된 감정 속에서 매일을 어찌어찌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는 발레 전공자의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 때 발레 학원을 시작으로 무용과 입학, 발레단 활동을 하다 이제는 대학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정옥희 저자는 하나의 직업군이자 사회 현상으로서의 발레에 대해 관찰해 온 풍경을 들려줍니다. 무언가를 전공한다는 것의 보편적 경험이기에 예체능 전공자가 아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발레에 대한 지식을 얻는 건 덤입니다.
말 대신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발레. 새로운 언어를 감지한 이들이 무용수가 됩니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세하고 매혹적인 언어와도 같습니다. 무용수들은 움직임으로 소통하고 생각합니다. 몸에 축적된 감각은 오래 기억되어 나이가 들어도 음악만 들으면 자동 반응을 할 정도라고 합니다.
정옥희 저자는 일찍 목표가 들어앉은 삶을 살았습니다. 꿈을 찾지 못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하는 많은 학생들과 달리 무용과를 목표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고, 발레단 입단을 목표로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이처럼 딱딱 목표가 정해져 있는 삶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론 중간에 바꿀 기회가 있을 때 두려움에 멈추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기 마련입니다.
세계적인 몇몇 대단한 발레리나가 아니고서야 발레를 전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최근 큰 이슈로 떠오른 발레계 소식이 있더군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파리오페라발레의 수석무용수가 된 한국인 박세은 발레리나가 위상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성 있는 발레리나는 1% 부자를 보는 것처럼 뭔가 멀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프로페셔널 발레단의 군무 무용수로 활동했던 발레 전공가인 저자의 목소리가 평범한 우리들의 삶과 맞닿아있어 공감이 큽니다.
발레 하면 너무나도 완벽한 동작에 마리오네트처럼 인형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정확한 동작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니 앞으로 발레를 관람하는 눈이 달라질 것 같아요.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콩쿠르를 거치며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웬만해선 흔들림 없는 프로페셔널로 성장하기까지 그 여정을 펼쳐 보입니다.
학생 신분으로 중국 광저우 발레단에 입단해 1년을 지냈을 때의 경험도 파란만장합니다. 그때의 경험은 한국에 돌아와서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발휘됩니다. 다국적 무용수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같습니다. 그들의 어려움, 외로움, 고립감을 헤아릴 줄 알게 됩니다.
프리마 발레리나만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군무 무용수는 일부러 신경 써서 바라보지 않는 이상 그저 배경으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던 저자는 그렇기에 오히려 조금 더 성숙한 관찰자가 되어 발레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며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군무 무용수는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는 감각이 고도로 발달된 존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프로의 정신은 너무 떨거나,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쉽사리 나태해지지 않으면서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책 속에서
오로지 대학 입학을 위해 달려온 우리나라 무용 전공자들은 특히나 대학 생활하면서 우울증을 많이 겪는다고 합니다. 1년에 겨우 몇 명만 뽑는 프로페셔널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니 요가나 필라테스 자격증을 따거나 대학원 진학을 하기도 합니다.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다가오는 발레. 사람들은 발레를 좋아한다는 기호를 내세우고 싶어 하면서도 발레 무용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가득한 현실을 거침없이 지적하기도 합니다. 임신은 은퇴라는 공식이 있다시피 하다 보니 엄마 발레 무용수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도 친정 엄마 찬스가 없는 한 육아와 병행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프로로서 품질 유지를 위해 그토록 완벽주의와 성실함을 지켜온 발레 무용수의 삶이 임신과 동시에 단절되는 겁니다.
발레가 등장하는 만화, 영화 등을 소개하기도 하고 발레에 대한 기본 지식과 더불어 일반인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급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합니다. 발레 취미 1도 없는 저조차도 포인트 슈즈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하더라고요.
<방구석 미술관> 책에서 드가의 발레 작품을 소개할 때 알게 된 발레리나의 역사 속에 자리했던 성 노동자로 전락했던 어두운 시절을 저자 역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루이 14세가 발레를 직접 출 정도로 사랑했기에 그 덕분에 발레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는군요. 그럼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철저한 외모지상주의, 낡은 인권 감수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냅니다.
초심자가 프로가 되기까지 그 여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자기 파괴적으로 달리는 것은 다름을 짚어줍니다. 프로에겐 이번 공연이 끝이 아니니까요. 그만두지 않고 지금의 일을 치열하게 해나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애증의 파노라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