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밍들의 세계 - 주목받는 작가 8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양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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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G에 게재된 1700여 편의 SF 중 엄선된 단편 앤솔로지 <나와 밍들의 세계>. 현재 한국 SF 소설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 8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이들 중 수년 내 장편 SF로 이슈가 될 작가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시간여행 소재를 넘어 인공지능 시대와 밀접해진 우리의 현실을 조금 더 실감 나게 그려낸 작품들이 많다는 게 두드러지게 느껴졌어요.


인간은 실패에서 배우는 동물이라지만 아버지는 물론 자신도 인간이 아니라며 자조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양진 작가의 <나의 단도박수기>.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마지막 베팅 중인 긴박감 넘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이 인상 깊습니다. 위험한 의뢰를 받아 빚을 청산해 보려 하지만, 과연 무사히 의뢰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우주선을 몰며 워프하는 우주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스토리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한탕의 유혹에 빠진 인물상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배경만 다를 뿐 인간 군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유정 작가의 <나와 밍들의 세계>는 이 책의 표제작으로 삼을 만한 소설이라는 데 공감할 만큼 전개 방식이나 스토리 구성이 독특합니다. 죽어가는 길고양이를 데려와 살린 주인공. 그런데 그 살리는 방법이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양가적인 감정을 낳게 합니다. 죽어가는 생명체를 살아 있는 생명과 연결해 주는 기계를 통해서 진짜 아픈 몸은 저편에서 간신히 생명 유지만 한 채 있지만, 주인공의 눈에는 다른 이의 모습으로 한 그 고양이가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설 속 '나'는 고양이의 이름입니다. '밍'은 고양이를 살린 여자입니다. 각자가 가진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지며 지냅니다. 눈물이 핑 돌게 하는 먹먹한 스토리에 여운이 깊습니다. 둘의 관계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체가 한 편의 아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으로 개종할 수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박하루 작가의 <최애 아이돌이 내 적수라는데요?>. 공장에 보급하는 흔한 제조형 로봇이 인간 아이돌을 마음껏 응원하고 군무를 추고 싶어 신체 개조를 한다는 설정이 재밌습니다. 그런데 스케일이 생각보다 커집니다. 안드로이드 권리 연대 내부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는데. 안드로이드 시점에서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를 나름 표현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연여름 작가의 <시금치 소테>는 제 취향에 잘 맞아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입니다. 사고로 아이를 잃고 남편과 별거한 채 자살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 자살 생존자가 된 주인공. 생존자가 부정적 사고를 유발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제거 시술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기억 삭제와는 달리 정보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채로 그저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도록 감정의 고리를 끊는 방식이라니, 읽으면서도 솔깃해집니다. 부정적 사고가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여정이 압축적으로 표현되면서 주인공의 내밀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분입니다. 시금치 그림만 봐도 시금치를 싫어하던 아이 생각이 불쑥 들어 우울해지는 주인공. 나중에 기억 제거 시술을 한다면 시금치에 관한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주인공의 내면의 감정 폭풍에 긴장한 채로 읽게 되지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하게 끌어가는 방식이 멋집니다.


오른쪽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기뻐하는 주인공을 기괴한 상황으로 시작하는 남세오 작가의 <피드스루>. 임플란트처럼 생물학적 신체와 기계로 된 몸을 연결하는 부품을 뜻하는 피드스루. 인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인공 신체 시대라면 상상해 볼 법한 스토일 것 같아요. 오른쪽 손목을 부상당해 기계로 대체해야 하는 주인공에게는 총상을 입고 머리 아래로는 아직 인공 신체를 연결하지 못한 불쌍한 딸이 있습니다. 스릴러 느낌을 팍팍 안겨주는 스토리에다가 그로테스크한 묘사 덕분에 상상하며 읽는 맛이 꽤 맵습니다.


천선란 작가의 <초인의 나라>. 실종되었다가 7일 만에 돌아온 아이들. 다섯 아이가 사라졌다가 한 아이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온갖 소문이 난무했지만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하지만 살아 돌아온 아이들이 결국 모두 사고와 자살로 죽게 되자 당시 아이들을 상담했던 주인공이 글을 남기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SF 소설에 초자연 미스터리가 끼어든 상황이라니 장르 붕괴의 매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대극 분위기를 물씬 내는 스팀펑크 스타일이 매력적인 김성일 작가의 <라만차의 기사>. AI 시스템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가난한 시대가 된 배경에서 AI가 장악한 풍력발전소로 출정하는 기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공지능에게서 기술을 빼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흥미진진합니다.


배지훈 작가의 <유니크>는 의식 저장이라는 소재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확장합니다. 인간이 죽기 전에 스캐닝 기술을 받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살아가는 스캔드. 살아있을 때의 재산이나 법적 권리가 스캔드에게 고스란히 귀속됩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도 스캔드의 입지는 탄탄합니다. 그런데 스캐닝을 받은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겁니다. 태양계 최고의 재벌이었던 인간이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셈입니다. 자신의 스캔드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한국과학문학상, 과학기술창작문예상, 황금드래곤문학상 등 수상 경력 있는 저자도 있고, 꾸준히 소설을 쓰고 있는 샛별들의 작품들까지. <나와 밍들의 세계>에 수록된 8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다채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어 취향 호불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거친 느낌도 있지만 풋풋한 상상력과 뜻밖의 감동을 머금은 매력적인 소설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SF 소설 마니아라면 한국 SF의 현재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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