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방 - 법의인류학자가 마주한 죽음 너머의 진실
리옌첸 지음, 정세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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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외 현장에서 유골과 시체를 마주하고 신원을 찾는 일에 앞장서는 리옌첸 법의인류학자가 뼈에 새겨진 기억을 읽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뼈의 방>. 


관계맺음엔 약하지만 전문분야에서의 능력은 뛰어났던 브레넌 박사가 등장하는 미드 <본즈>의 최애청자였던 저는 <뼈의 방>이 무척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습니다. <본즈>를 보면서 뼈에 대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법의인류학자들에겐 특별한 보물 공간인 '뼈의 방'이 있다고 합니다. 기증받은 유골을 모아둔 곳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거나 가족이 인수하지 않으려 하는 시신 혹은 단체에서 연구 용도로 기증한 시체의 유골들입니다.


미국 국경을 넘다가 사막에서 실종된 이들을 찾아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던 사람들 대부분의 죽음 원인이 급격한 탈수라고 합니다. 미국의 비밀 묘지라 불리는 곳에서 2017년에만 412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곳에서 찾은 No. 170422145 유골. 유류품과 뼈의 DNA 검사를 통해 유골의 신원을 밝혀냅니다. 실종된 고메즈는 번호로 불리던 것에서 이름을 되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법의인류학은 뼈를 분석하여 유골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망 원인을 찾는 법의학자와는 그 역할이 조금 다릅니다. 의류를 전문으로 하는 법의학의류분석가도 있습니다. 상황의 배후 사건을 알아내는 법의고고학자도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협업으로 죽은 이의 신원, 다잉 메시지를 읽어냅니다.


인류학이란 단어가 붙은 것처럼 법의인류학은 생활방식, 음식 환경 모두 연구한다고 합니다. 전쟁 범죄, 대량 사망 사건의 조사에 참여하며 번호를 붙였던 뼈에게 이름을 되찾아줍니다. 집단 무덤을 발견할 때의 끔찍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전쟁, 전란이 있었던 곳엔 어김없이 처참한 유골 상태의 집단 무덤이 발견된다고 해요. 


죽은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법의인류학자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실종자의 유족들도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고나면 비로소 회복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는 역할을 하는 법의인류학자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최신 기술을 이용해 기후변화, 환경변화, 음식문화 등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고, 머리카락에서 성별, 체형, 식습관, 운동습관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뼈는 그 사람이 한때나마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뼈는 살아 있을 때와 세상을 떠난 뒤에 겪은 일을 모두 담고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리옌첸 법의인류학자는 2014년 세월호 참사도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5명의 실종자가 있는 세월호 참사. 인양 과정에서 발생한 추문도 정확히 알고 있고, 유골 추가 발견을 은폐하다 2017년에 적발된 사건 때문에 특히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외모를 바꾼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중국 전족, 19세기 코르셋, 태국 카렌족 사례에서는 유골을 통해 여성들에게 강요된 사회적 표준과 당대의 사회 및 정치 구조를 밝혀내기도 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 성냥 제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사건도 있습니다. 2015년에 인 중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청소년 유골에서 아래턱 괴사 흔적을 발견했고 인의 독성을 증명한 첫 사례라고 합니다. 유골 덕분에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치른 대가, 사회의 성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는 뼈에 새겨진 흔적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의 잔인성을 보여준 사건도 있습니다. 미국 마리아나 제도에서 전사한 일본군 유해 중 절반 이상이 머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리품으로 두개골만 남겨 기념품화한 사례처럼 유골의 존엄성을 해친 사례가 역사상 부지기수입니다.


'인체의 신비전'을 관람한 분 계신가요. 비위 약한 사람은 절대 관람못하는 그 전시를 저는 2009년에 봤었는데 정말 신기하면서도 충격적이었거든요. 공포 영화 <아나토미>를 본 탓에 끔찍한 생체실험에 대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혼이 이탈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뼈의 방>에서는 '인체의 신비전' 주최측이 서류 공개는 하지 않으면서 자발적 기증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의문을 표합니다. 동의 없이 시신이 양도된 것이라면 윤리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유골도 한때 '사람'이었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뼈의 방>. 전시 관람 과정이 죽은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몸 안의 인생 기록이라 불리는 뼈. 이 책은 고인의 생전 경험을 바탕으로 뼈에 담긴 문화와 역사, 생명을 통해 뼈가 들려주는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의학, 법의학, 역사, 사회학, 풍속문화,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연계되어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가르쳐주는 뼈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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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의 마인드 : 결정적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힘 -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조건 이기는 멘탈 트레이닝
짐 아프레모 지음, 홍유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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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 이면에 담긴 진짜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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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 함부르크에서 로마까지, 산책하듯 내 몸과 여행하다
울리 하우저 지음, 박지희 옮김 / 두시의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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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명 언론지 <슈테른> 30년 경력 저널리스트 울리 하우저의 걷기 단상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함부르크에서 로마까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3개국을 100일 동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작은 배낭을 멘 채!


언젠가 여든다섯 살 노인이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자주 맨발로 땅을 밟고 다닐 거라고, 더 많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겠다고" 한 말 때문에 이런 용기를 내어 걸어보기로 결심한 울리 하우저.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걷기도, 맨발에 샌들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도 어슬렁어슬렁 걸어보기도 하면서 어쨌든 두 발로 약 2,000 킬로미터를 걷는 여정을 펼쳐 보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 익숙한 것을 버리는 중이었다." - 책 속에서


걷다 보면 평소 자주 지나다니던 도로가 보이기도 합니다. 저 길로 갔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이번 여정은 오롯이 두 발이 이끄는 대로 가는 거니까요. 이 위대한 여정은 시작되었고 첫날밤부터 숲속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꺼낸 등산화를 신고 간단한 옷과 휴대폰, 충전기만 챙긴 작은 배낭에 그래도 침낭은 잘 챙겨갔나 봅니다.


숲속의 아침은 서늘하고 맑은 공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저도 아침의 숲을 사랑합니다. 휴양림에 가면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고요한 숲을 만끽하는 걸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 숲의 냄새를 맡고 난 후엔 끊을 수 없는 믹스커피를 손에 들고, 또 한참을 숲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울리 하우저 저자가 숲에서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고요한 숲속 적막을 깨뜨리며 신나게 달리기도 하면서 숲의 악동이 된 것 마냥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저자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유럽 대륙의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고 하듯 순례자들의 길의 역사를 따라가보기도 하고, 발길 닿는 대로 오솔길을 숲길을 논길을 강가를 따라 걷습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충분한 행복을 차곡차곡 모으기로 했다. 불행한 시간이 오더라도 견뎌낼 수 있는 기쁨의 창고를 만들 생각이었다." - 책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 유심히 관찰해본 적 있나요. 태어나 걷는 법을 배운 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걸어 다녔지만, 정작 '어떻게' 걷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걷기 여행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움직임을 자세히 느껴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근육을 가장 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글루테우스 막시무스'라는 공룡 이름처럼 불리는 엉덩이 근육은 자신의 역할을 할 겨를이 없을 지경입니다.


"내 무릎은 이제야 앉아있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제는 내딛는 발에 온전히 내 몸을 맡깁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결정의 순간, 인생에 나를 맡겨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걷다가 조금 지치면 쉬면서 회복하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보행 전문가의 조언도 받아 가며 걷는 여정. 하지만 의족 제작 회사를 방문했다가 양말 지적 당하고, 신발도 수선해야 하고, 걸음걸이도 오른쪽 발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치료용 신발 제작 장인과의 만남에서는 좋은 신발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도 듣습니다. 뼈 26개, 관절 30개, 근육 60개, 100개가 넘는 인대와 200개 이상의 힘줄로 이루어진 발. 평생 앉아만 있던 사람이 걷는다는 것에 대해 진중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걸어서 여행하다 보면 역사가 달리 보인다고 합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나 홀로 사색은 물론이지요. <걷기를 위한 걷기>에서는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부터 신변잡기를 포함해 역사, 환경, 사회 문제 등 알쓸신잡 같은 정보가 쏟아집니다. 걷기는 꽤 효율이 좋은 활동이라 다른 신체 활동에 비해 거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머리로 전해지고 뇌가 그것을 고맙게 받아서 사용한다고 말이죠. 산책, 걷기의 효용을 아무리 설토한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그 감각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위기의 순간도 간간이 있었지만 큰 탈 없이 여정을 끝마친 저자의 마지막 말은 "아아, 이번 여행은 정말 최고였어."입니다. 걷기를 하는 동안 그는 혼자였으면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여정에 도움을 줬습니다. 사실 그의 인맥 수준이 놀라울 정도라 부럽더라고요. 그가 간 장소와 만난 사람들을 정리한 마지막 페이지는 그가 걸은 길에 동참하고픈 이들을 위한 소중한 리스트입니다.


오랜 세월 제대로 걷는 법을 잊어버린 몸이 다시 되살아나는 여정을 그린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저자처럼 100일간의 도보 여행은 힘들지라도 지금 당장은 평소보다 더 걸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앉아서 일하고 차를 타며 이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걷기의 설렘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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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일주 가이드북 - 대한민국 전국여행 백과사전!, 2021-2022 최신 개정판
유철상 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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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일주의 로망을 로망으로만 간직한 분들 참 많으시죠. 까짓것 언제든 갈 수 있는 우리나라인데 싶어 오히려 더 미루게 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명소들. 로망을 실천으로 바꿔줄 단 한 권의 책 <전국일주 가이드북>. 주말마다 조금씩 클리어해보는 건 어떨까요.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여행 트렌드에 맞춰 <전국일주 가이드북>도 시즌 2로 전면개정판이 나왔습니다. 5년 전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보다 100여 곳이 더 늘어난 약 1,300곳의 여행지가 소개되어 있네요. 지역별, 테마별 여행 전문가 4명이 작심하고, 준비하고, 계획을 짜서 전국일주에 쉽게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행 가이드북입니다.


이 책은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전국일주입니다. 고속도로로 코스를 구분해 이동 편한 루트를 소개합니다. 1번 경부고속도로, 동해안 7번국도, 60번 서울양양고속도로 등 11개 대표 도로를 따라 크게 구분했고, 일정 구간별로 또다시 쪼개어 일정을 세분화했습니다.


1번 경부고속도로는 서울 서초구에서 부산 금정구까지 연결되지만, <전국일주 가이드북>에서는 수원의 명소부터 소개하고 있어요. 서울 명소와 수도권 일부 지역은 빠져있으니 참고하셔야 합니다.


제가 사는 곳인 만큼 수원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눈여겨보게 됩니다. 수원 화성 위주로 소개되어 있는데 요즘 핫한 카페골목도 소개되어 있는 걸 보고 SNS 핫플레이스도 잘 반영했구나 싶더라고요. 대신 수원 화성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세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명소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개별적으로 찾아봐야 합니다. 한 권에 전국을 담고 있으니 세세한 것까지는 싣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전체 루트를 계획하는 데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여행을 하면서 유용한 알짜 팁도 있고, 놓치면 아쉬운 주변 명소까지 챙겨줍니다. 볼거리, 체험, 숙소, 맛집 정보의 핵심이 소개되어 있어요. 계획 없이 그 지역을 방문했을 때 1박 정도의 여유 시간이 생기면 지역별 동선에 맞춰 잘 짜놓은 이 책의 코스가 유용하겠더라고요.


<전국일주 가이드북>을 보면서 촬영지가 몇몇 눈에 띄더라고요. 촬영지 테마 여행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로 떠나는 2박 3일 일정의 코스를 소개하는지라 주말여행으로도 딱 좋습니다. 아, 그렇다 보니 제주도와 섬도 빠져있습니다.


한국관공공사가 추천하는 대한민국 언택트 추천 100선 리스트로도 실려 있는데, 이왕이면 이 책에 소개된 지역은 바로 펼쳐볼 수 있게 페이지 표시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여행 트렌드를 잘 반영한 개정판입니다.


요즘은 사전예약을 해야만 관람 가능한 곳이 많으니 전체적인 일정을 계획했다면 일일이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는 건 필수죠. 흔한 국내여행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더 못 가본 곳들이 수두룩한 대한민국. 놓치기 쉬운 명소를 이번 기회에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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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죽음을 배우다
리디아 더그데일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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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대학교 의과 대학 임상 의료 윤리센터 소장이자 의과 대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리디아 더그데일이 의사로 근무하며 목격한 형편없는 죽음.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책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나는 후회한다. 그때 왜 터너 씨를 살렸을까." 첫 문장부터 강렬합니다. 무슨 일이길래 의사로서 한 사람을 살린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요. 암 병동의 코드블루 상황에서 만난 터너 씨. 이미 심장이 멈춘 터너 씨를 간신히 살려냅니다. 심폐소생 과정에서 약해져있던 갈비뼈는 이미 부러졌습니다. 다시 심장이 멈출 경우 심폐소생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가족들. 그날 밤에만 두 번의 심폐소생을 했던 터너 씨는 연이어 세 번째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치료에 초점을 맞추느라 생명이 지닌 유한성을 무시한다고 합니다. 온몸에 전이된 암세포가 환자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고, 어떤 생명유지장치를 사용해도 암을 치료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적극적인 생명 유지를 선택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잘 죽는 데 실패한'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환자는 병원 문턱을 넘는 순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온 상품처럼 취급된다." - 책 속에서


의학계 효율도 공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컨베이어 벨트일 뿐이라는 걸 짚어줍니다. 죽음을 피하고 미루려는 노력은 무조건 옳을까.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는 환자가 현명하게 죽을 기회를 빼앗는 현대 의료 시스템을 화두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명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500년 전 중세 유럽의 라틴어 소책자 『아르스 모리엔디』(죽음의 기술)에서 실마리를 얻습니다. 흑사병 한가운데서 태어난 책입니다. 좋은 죽음과 좋은 삶에 대한 실용적 지혜를 담은 책입니다. 흑사병의 참상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을 안내한 이 책 덕분에 아르스 모리엔디라는 하나의 장르가 될 정도로 관련 책이 쏟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잘 죽는 법에 대해 고민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고민은 20세기 이후 멈췄습니다. 잘 죽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20세기부터는 '삶의 기술'이 대신합니다. 죽음을 외면한 거죠.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획기적인 의학 발전으로 죽음을 뺀 나머지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현대인은 제대로 죽는 법을 모른다." - 책 속에서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죽음을 피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죽음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워집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는 잘 죽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과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죽음을 일깨우는 '메멘토 모리'의 대표 사례가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낸 정물화 바니타스 회화입니다. 보통 해골, 모래시계, 튤립 같은 물건이 등장하지요.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 시작점입니다.


외로운 죽음을 피하려면 공동체의 중요성도 인지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공동체를 형성할 순 없습니다. 사는 동안 꾸준히 건강한 관계를 맺어둬야 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완화 치료에는 아르스 모리엔디가 제안하는 조언과 비슷한 것을 실천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용서할게, 용서해 줘, 고마워, 사랑해, 안녕."이라는 말이 가진 힘은 관계를 바로잡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저자는 가족공동체, 사회공동체, 의학공동체로 분류해 죽음을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실험적 치료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장단점을 통해 병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려 기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짚어줍니다. 현대 병원이 가진 장례 의식의 문제점도 짚어주며 의미 있는 의례를 고민하게 합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는 병원이 아픈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급성 질환자를 위한 기관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입원치료를 포기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단순히 나이만으로 따지지는 않습니다. 쇠약함을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고 합니다. 입원이 건강을 무조건 개선하지는 않음을, 헛된 치료를 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판단을 내리도록 조언합니다.


매일 공동체 속에서 유한함을 인식한 채 사는 삶. 매일 삶에서 함양해나가야 할 덕목들을 짚어주는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현실적인 시선으로 죽음을 바라보지 못한 터너 씨 가족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는 건 곧, 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수많은 죽음의 현장을 목도한 의사의 목소리로 더 나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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