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 인간의 선량함,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뇌과학자의 질문
김학진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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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남다른 도덕성으로 자기중심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타인의 욕구를 우선시할 때 가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라면?


fMRI를 사용해 인간의 경제적·사회적 의사결정과 관련된 뇌 메커니즘을 연구하며, 공정성 판단과 이타적 선택의 신경학적 기제를 밝히는 연구들을 진행해온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뇌과학자 김학진 저자는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에서 선량한 선택의 이면에 대해 알려줍니다. 5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일반인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고, 최신 뇌과학적 증거와 더 많은 사례를 추가한 책입니다.


모든 친사회적 행동과 이타적 동기의 근원에는 타인의 인정과 호감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보상 추구 동기 때문이라니! 속물처럼 여겨져 뭔가 배신당한 느낌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뇌가 선택한 가장 유리한 작동 원리라면 어떨까요. 사랑, 공감, 이타성 같은 고귀한 본성으로 여겨지는 인간 심리들이 사실은 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귀함이 훼손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의 호감을 좇는 단순하고 순수한 동기가 성장해 이뤄내는 위대한 결과의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비로소 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 책 속에서


좋아요에 집착하며 타인으로부터 주목받고 관심을 얻으려 하는 행위에는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자기과시욕이 숨어있습니다. 이것을 인정 욕구라고 합니다. 때로는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으로, 때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 같은 모습으로 발현합니다. 


뇌는 평판을 위협하는 행동을 피하고 평판에 득이 되는 행동을 취한다고 합니다. 우리 뇌가 반사적으로 보상의 가치를 계산한다는 연구 결과가 신기했습니다. 머릿속에 계산기가 들어있다니요! 뇌의 복내측 전전두피질 영역입니다. 미간에서 뇌 안쪽으로 5센티미터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합니다. 뇌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보상을 얻기 위한 과정을 되풀이하는 인지적 구두쇠라고 합니다. 복내측 전전두피질에서 과거의 선택 경험을 토대로 보상 예측 정보를 빠르게 탐지하고 선택의 가치를 계산하는 겁니다.


이 가치 계산은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말이지요. 내부 감각 신호에 의존했던 선택들이 점차 외부 감각 신호에 의존한 선택으로 변화합니다. 옆에서 누가 먹으니까, 점심시간이 되었으니까 먹는 것처럼요. 그리고 한국 사회처럼 경쟁 문화에 노출된 경험이 길수록 타인과의 상대적 차이에 근거해서 가치를 다시 계산하는 과정이 습관처럼 자동화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금전적 보상을 받을 때와 칭찬 같은 사회적 보상을 받을 때 놀라울 만큼 유사한 뇌 활동 패턴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신경학적 수준에서 차이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회적 보상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타인의 지속적인 관심과 호감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과도한 인정 욕구는 인정 중독이 되기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분노조절장애와도 관련 있습니다. 일상적인 감사, 사과 표시는 오히려 실망감을 느끼거나 무시당했다고 느끼며 지나칠 정도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게 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집단 간 갈등의 이면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뇌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기적 집단은 타인을 위한 선택에서 직관적인 것에 가까운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아닌 배내측 전전두피질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외부 신호를 통합해 분석적인 가치 계산을 하는 겁니다.


타인의 관찰에 의해 자동적으로 촉발되는 도덕적 행동의 기저에 숨겨진 뇌과학적 원리를 자동적 평판 인식이라 부릅니다. 의식적인 지각 없이도 실제로 남을 돕는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반사 행동처럼 보이는 이타적 행동의 기제를 이해하기 위해 이타적 동기가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을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에서 짚어줍니다. 자신도 모르게 친사회적 행동을 학습하고 내재화하는 인정 욕구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도덕성과 이타성으로 포장된 인정 욕구가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형태로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심리학에서 유명한 연구인 죄수의 딜레마는 모두 합리적이고 논리적 선택을 했을 때 오히려 모두가 규범을 어기는 파국의 상태에 이르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국가 간 경쟁적인 자원 남획, 환경 훼손, 분쟁 등 다양한 관계와 결정들을 설명하는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짜증 유발 운전자 1위가 진입로나 출구에서 끼어드는 운전자인데 2위가 놀랍게도 누구든 끼워주는 앞차라고 합니다. 너그럽게 아량을 베푼 운전자 역시 공공의 적이 되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이타적 행동은 오히려 질투심과 동일한 심리 반응을 유발한다고도 합니다. 이타적 처벌자의 등장입니다. 규범을 어기는 구성원에 대해 처벌하는 이타적 처벌자는 무너진 형평성의 회복을 위해 행동합니다. 복수와 무척 유사합니다.


이는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타성과 공정성을 인정 욕구가 발현되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보는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금전적 이익이 생기는데도 공정하지 않으면 거절하는 결과를 낳은 최후통첩 게임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로 믿어온 불공정성 판단 역시 감정 반응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겁니다.


공감의 신경학적 기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공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서적, 직관적인 공감은 익숙한 자기중심 관점인 겁니다. 반면 관점 이동은 인지적, 분석적인 낯선 타인 관점입니다. 자신의 것과는 다른 타인의 신호, 의도, 신념 등을 파악하는 능력이 관점 이동 능력입니다. 둘은 매우 다른 신경학적 기제로 작동하고, 공감과 관점 이동이 균형을 이룰 때 타인과 소통하는 데 최적의 기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선량한 사람의 본심에 인정 욕구가 있다는 이야기가 실망감을 들게 하나요? 선행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의도를 의심하게 될까요?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는 자신의 감정이 인정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파악하고 자각하는 자기 인식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숨은 인정 욕구를 인식할 때 오히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스스로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발견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인정 욕구를 이용하면 더 많은 이들에게 이타적 행동을 유도하며 사회적 목표를 실천할 수 있게 만드는 정책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선뜻 남을 돕고, 불공정에 분노하고, 선량하고 정의롭고자 하는 이유를 인정 욕구에서 찾아, 인정 욕구를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근원을 파헤치는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이타주의를 선택하는 뇌의 작동 원리를 통해 인정 욕구를 이해하고, 건강하게 발현해 도덕성과 이타성이라는 궁극적 지향점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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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킹 하다 앳 홈 - 24만 유튜버 하다앳홈이 알려주는 쉽고 맛있는 홈베이킹 64
박정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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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 유목민도 정착하게 만드는 유튜브 하다앳홈표 레시피를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이킹 하다 앳 홈>으로 구독자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64가지 메뉴의 레시피와 영상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베이킹 팁을 만나보세요. 쿠키, 스콘, 파운드케이크, 타르트, 케이크, 빵, 커드까지 기본 홈베이킹 요리책으로 제격입니다.


홈베이킹 하면 복잡한 도구부터 생각납니다. 하지만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도구는 지양하는 하다앳홈 레시피. 홈베이커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다앳홈 영상 문구인 "쉽고, 맛있는 하다앳홈 베이킹"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기본 베이킹 재료들은 어떤걸 구입하고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도 꼼꼼하게 다루고 있고, 자주 쓰이는 도구들과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갖추면 되는 도구를 구분해 소개합니다.


어렵게만 여겼던 베이킹이 하다앳홈 레시피로 이제는 수월해집니다. 저는 결과물을 위해 솔직히 너무 많은 시간을 쓰긴 싫어서 공정을 최소화하해 누구나 따라 하기 쉬운 가정식 베이킹을 선보이는 하다앳홈이 참 좋아요. 게다가 대중적 맛을 내는 레시피니 실패 걱정도 없어요.


초보자도 비교적 쉬운 공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쿠키류에서는 하다앳홈의 인생 레시피로 꼽히는 영국식 스콘도 등장합니다. 타르트팬 하나면 충분한 파이와 타르트 레시피, 복잡한 과정 없이도 고급스러운 맛을 내는 머핀과 파운드케이크·브라우니, 일상 속 완벽한 휴식을 선사하는 케이크와 빵 레시피, 담백한 빵이나 쿠키에 곁들이면 좋은 커드와 스프레드 레시피까지 소개되었어요. 잼류는 사실 손이 좀 가는 편이지만 한 번 만들어두면 꽤 오래 보관 가능하니 그 정도 수고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인 만큼 대신 계량만큼은 정확해야 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베이킹은 재료들 간의 화학적 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계량이 필수라고 해요. 소수점까지 계량 가능한 정밀 전자저울과 일반 저울 2개를 구비하면 무난하다고 합니다.


홈베이킹은 오븐을 얼마나 잘 다루냐도 중요하죠. 내 오븐에 맞는 사용법을 지켜야 결과물이 만족스럽습니다. 책에서 오븐 사용시 체크해야 할 부분도 잘 짚어주고 있어요. <베이킹 하다 앳 홈>은 오븐을 사용한 레시피가 기본이지만, 노오븐 레시피도 있습니다. 노오븐 레시피는 딱 제가 원하는 메뉴여서 정말 반가웠어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홍차 덕후 하다앳홈과 잘 맞을 겁니다. 홍차와도 커피와도 어울리는 하다앳홈 티푸드가 예술이에요. 아예 얼그레이가 들어간 레시피도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베이킹은 어렵다는 편견을 사라지게 하는 쉽고 맛있는 하다앳홈 레시피. 홈베이커들의 든든한 베이킹 선생님이 되어줄 책 <베이킹 하다 앳 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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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계획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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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등단 4년차 1989년에 발표한 <조인계획>. 풋풋함이 느껴지면서도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속도감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표 번역가 양윤옥 님의 번역이라 이번에도 옮긴이의 말까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침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요즘 딱 어울리는 소재입니다. 스키점프가 등장하거든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스포츠 미스터리 소설로 스노보드와 스키가 등장하는 소설을 이미 읽어본 저는 무서운 추리소설이 아니어서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소설이구나 싶더라고요. <조인계획>은 이후 그가 쓴 스포츠 미스터리 소설들의 씨앗이 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겨울 스포츠를 사랑하는 작가인 만큼 설산의 분위기와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애정하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스키점프 경기에서 넘어지는 사고는 으레 있는 일이지만, 그날따라 삐걱거리는 움직임을 보이며 세 명의 선수가 똑같은 꼴로 실패를 합니다. 무명 선수들이기에 딱히 화제에 오르지 못한 채 이 일은 잊히고 그렇게 세월이 흐릅니다.


합숙 훈련 중 스물두 살의 천재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생깁니다. 조인鳥人이라 불린 1980년대 세계적인 스키점프 선수 마티 뉘케넨을 이어갈 동계 스포츠계의 유망주였던 니레이의 사망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었던 겁니다. 독약의 정체는 투구꽃에서 분리된 아코니틴이라는 맹독성 물질로, 니레이가 먹는 비타민제 캡슐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누가 이 유망주를 살해한 걸까요. 은퇴 후 니레이의 코치가 된 미네기시, 만년 2위 선수 사와무라, 닛세이자동차팀의 스기에 쇼, 니레이의 여자친구이자 쇼의 누나인 스기에 유코, 닛세이자동차팀의 감독 스기에 다이스케 감독까지 니레이가 속한 팀 주변인물과 상대팀 관련자들이 등장합니다. 형사도 등장하긴 하지만 형사의 추리는 그저 거들 뿐. <조인계획>은 형사물이 아닌 스키점프 관계자들의 이야기에 초점 맞추면 재미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범인을 일찍 오픈하는데, 살해 동기와 범행 과정은 베일이 갇힌 채 진행합니다. 천재 선수 니레이를 질투해서 저지른 범행이라기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데다가 니레이의 기술을 복제한듯한 상대팀 스기에 쇼의 기술 향상에 의문을 계속 표하고 있어 독자의 신경을 그쪽으로 이끕니다.


게다가 밀고자로 설정한 인물도 있습니다. 범인을 알고 있는 밀고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밀고자는 대담하게도 범인에게 자수하라는 편지까지 남기고, 곧이어 경찰에게도 범인을 지목한 편지를 보내 결국 범인이 체포되게 만듭니다. 이쯤 되면 참 재미있는 상황인 셈이지요. 범인은 구류된 상태로 밀고자가 누구인지 되려 추리를 해나가거든요.


독자는 니레이를 살해한 범인의 동기는 무엇인지, 알리바이가 있는 범인이 어떻게 독약을 먹인 건지, 탐정 역할을 하는 밀고자는 누구인지, 스기에 쇼의 최근 급부상한 실력 비밀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숨 가쁘게 달려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소설 도입부에 등장했던 기묘한 점프 실패 사건이 연결되며 스포츠 세계의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니 이쯤에서 한 번 충격파를 맞습니다. 책을 덮을 때까지 충격파는 더 이어집니다.


"개성이라는 건 일상생활에서나 발휘하면 돼요. 승부에 개성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항상 승리하는 점프를 하는 게 중요하지요." - 책 속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스포츠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스노보드를 책으로 배울 뻔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었는데, <조인계획>에서도 더 높이, 더 멀리 날고자 하는 스키점프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건 잔혹한 묘사가 전혀 없는데도,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깔린 욕망이 스산하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인간이 날개 없이 얼마나 멀리까지 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스키점프. 천재 선수 니레이는 도약 때 '날아오른다'는 표현 대신 '앞의 바람에 뛰어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니레이의 점프를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은 절망과 좌절, 질투의 감정이 뒤섞이고, 한계를 향한 스포츠인의 노력이 꿈을 넘어 집착과 광기에 이르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조인계획>에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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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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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자이자 범죄심리학자로 임상-수사심리학자로도 불리는 김태경 교수의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 지금까지 알려진 강력범죄를 떠올려보면 사건의 잔혹함과 범인만 생각날 뿐 피해자가 먼저 생각나진 않습니다. 우리가 외면한 사건 뒤에 남겨진 사람을 생각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피해자가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들려줍니다.


범죄 피해자 심리 치료 및 트라우마 상담 전문가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에겐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부적절한 관심한 불필요한 지지 행동은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고통은 잊히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트라우마 치료입니다.


김태경 교수가 살인사건 유족을 살인사건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솔직히 그동안 얼마나 피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살인으로 사망한 가족에 대한 애도는 트라우마적 비애라고 부릅니다. 자연스러운 죽음과 살인으로 인한 죽음이 유족에게 어떻게 달리 경험되는지 유족의 목소리로 보여줍니다.


최소 1년가량이 걸린다는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애도가 시작될 수 있고, 애도가 시작되어야 삶의 재건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는 회복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회복을 방해하는 여러 외부 요인도 등장합니다. 중요한 건 유족의 시간과 주변 사람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적 참사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유족이 너무 오래 비통해하는 것처럼 느끼며 되려 유족을 비난하는 상황을 심심찮게 봐왔지 않았던가요.


범죄자에게만 집중하며 정작 피해자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무관심한 사회. 범죄 자체보다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오해와 편견이 난무합니다. 권선징악적 가치를 내제화한 사람은 일종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피해자다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를 비합리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낙인찍기 일쑤입니다. 범인에게는 묵비권이 있음에도 피해자에게는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2차 가해를 하기에 이릅니다. 합의를 하지 않으면 독하다고 하고, 합의를 하면 역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사회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합니다.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의 합의에 대한 이야기도 짚어주는데요. 대부분의 피해자는 범인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합의 요청에 응한다고 합니다. 합의금 없는 합의서까지도 써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인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죠. 하지만 합의서를 제출하는 순간 자책감과 허무감은 짙어지고 피해자의 회복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가 청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게 아니고, 상대를 위해 용서를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도 아님을 짚어줍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자의 형사사법 절차상 경험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신고 순간부터 경찰 출동, 고소, 사망 고지, 수사 과정, 재판 과정 등에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피해자의 사례로 들려줍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지더군요. 신고 전화에 대응하는 이의 말이나 사망 고지할 때의 태도 등 피해자로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긴 여정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그제서야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신고부터 재판까지 사건과 관련한 절차 과정에서 수없이 받는 2차 가해.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나면 미뤄두었던 치유 작업이 겨우 시작됩니다.


형이 확정되면 사건은 종결되지만, 범죄가 남기는 상흔은 깊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 당사자의 신체·정신·관계 영역에서 끼치는 영향과 피해자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을 세심하게 짚어봅니다. 더불어 이웃 및 범죄 피해자 지원 실무자가 받는 고통까지도 다룹니다.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피해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는 범죄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표적으로 삼는 순간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보이는 연민과 배려가 필요하지만, 2차 가해임을 인식조차 못 한 채 주변인이 흔히 하는 행동과 말도 많습니다. "죽은 아이는 그만 잊고 둘째 낳아서 허전한 마음 채워요."라는 이웃의 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상대의 고통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해가 정확하며 자신의 언행이 충분히 공감적이라고 믿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2차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 맞춥니다. 피해자가 건강한 이웃으로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줍니다.


범죄 피해 트라우마를 입은 아이는 성인과는 굉장히 다르다고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건 후 아이가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유무죄를 가르는 중요한 단초가 되면서도 사실상 아동 범죄 피해자의 특유함에 대한 일반인과 형사사법 관계자의 이해 폭은 넓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범죄 유형별 아동의 독특성을 알려주며 아이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해 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살아서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얼마나 이 사회가 무신경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피해자를 그저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소비해 버리는 공동체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범죄 사건을 조망하고 피해자를 공동체 일원으로서 보호하고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고민하는 김태경 교수의 이야기가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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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 한 글자로 시작된 사유, 서정, 문장
고향갑 지음 / 파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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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스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극작가 고향갑 산문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경기신문에 현재도 연재하고 있는 고향갑의 난독일기 코너에 실린 글과 미발표글을 엮은 책입니다.


모든 글의 표제어는 한 글자입니다. 겨우 한 글자이지만 '한 글자'를 넘어 '수만 글자'와 함께 사는 '한 글자'임을 이야기합니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 전혀 다른 둘이 만나면서 하나가 되는 모습처럼 하나와 둘을 애써 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묻습니다. “둘이 모여 하나를 품고, 품은 하나 속에 둘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이치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표제어 <둘>에서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의 삶을 알기에 그늘진 삶이 슬며시 배어있는 고향갑 작가의 글은 담담한 서정 속에서도 애환이 보이기도 합니다. 글노동자로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은 글이고 밥은 밥일 뿐이지만 자본이 주인인 세상에서 넘어진 하루를 일으켜 세우는 건 글이 아니고 돈이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시를 읽는 것처럼 은유 가득한 문장도 있고, 일기를 읽는 것처럼 현실어로 채워진 문장도 있습니다. 고향갑 작가의 한 글자에는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담겼기에 공통의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문학은 손으로 꺼내는 가슴속 언어라고 합니다. 문학을 거꾸로 읽으면 학문입니다. 하지만 거창한 학문이 아닌 문학다움만을 지키려 합니다. 비장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의 글은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69편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같은 표제어로 나라면 어떻게 페이지를 채워나갈지 생각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글을 먼저 읽고 나서 표제어를 확인하면 뜻밖의 울림을 주는 기발한 표제어도 많습니다. 짧은 글쓰기를 연습하려는 이들에게도 본보기가 되는 산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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