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209/pimg_7960121633300192.jpg)
임상심리학자이자 범죄심리학자로 임상-수사심리학자로도 불리는 김태경 교수의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 지금까지 알려진 강력범죄를 떠올려보면 사건의 잔혹함과 범인만 생각날 뿐 피해자가 먼저 생각나진 않습니다. 우리가 외면한 사건 뒤에 남겨진 사람을 생각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피해자가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들려줍니다.
범죄 피해자 심리 치료 및 트라우마 상담 전문가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에겐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부적절한 관심한 불필요한 지지 행동은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고통은 잊히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트라우마 치료입니다.
김태경 교수가 살인사건 유족을 살인사건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솔직히 그동안 얼마나 피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살인으로 사망한 가족에 대한 애도는 트라우마적 비애라고 부릅니다. 자연스러운 죽음과 살인으로 인한 죽음이 유족에게 어떻게 달리 경험되는지 유족의 목소리로 보여줍니다.
최소 1년가량이 걸린다는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애도가 시작될 수 있고, 애도가 시작되어야 삶의 재건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는 회복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회복을 방해하는 여러 외부 요인도 등장합니다. 중요한 건 유족의 시간과 주변 사람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적 참사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유족이 너무 오래 비통해하는 것처럼 느끼며 되려 유족을 비난하는 상황을 심심찮게 봐왔지 않았던가요.
범죄자에게만 집중하며 정작 피해자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무관심한 사회. 범죄 자체보다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오해와 편견이 난무합니다. 권선징악적 가치를 내제화한 사람은 일종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피해자다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를 비합리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낙인찍기 일쑤입니다. 범인에게는 묵비권이 있음에도 피해자에게는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2차 가해를 하기에 이릅니다. 합의를 하지 않으면 독하다고 하고, 합의를 하면 역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사회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합니다.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의 합의에 대한 이야기도 짚어주는데요. 대부분의 피해자는 범인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합의 요청에 응한다고 합니다. 합의금 없는 합의서까지도 써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인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죠. 하지만 합의서를 제출하는 순간 자책감과 허무감은 짙어지고 피해자의 회복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가 청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게 아니고, 상대를 위해 용서를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도 아님을 짚어줍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자의 형사사법 절차상 경험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신고 순간부터 경찰 출동, 고소, 사망 고지, 수사 과정, 재판 과정 등에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피해자의 사례로 들려줍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지더군요. 신고 전화에 대응하는 이의 말이나 사망 고지할 때의 태도 등 피해자로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긴 여정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그제서야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신고부터 재판까지 사건과 관련한 절차 과정에서 수없이 받는 2차 가해.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나면 미뤄두었던 치유 작업이 겨우 시작됩니다.
형이 확정되면 사건은 종결되지만, 범죄가 남기는 상흔은 깊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 당사자의 신체·정신·관계 영역에서 끼치는 영향과 피해자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을 세심하게 짚어봅니다. 더불어 이웃 및 범죄 피해자 지원 실무자가 받는 고통까지도 다룹니다.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피해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는 범죄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표적으로 삼는 순간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보이는 연민과 배려가 필요하지만, 2차 가해임을 인식조차 못 한 채 주변인이 흔히 하는 행동과 말도 많습니다. "죽은 아이는 그만 잊고 둘째 낳아서 허전한 마음 채워요."라는 이웃의 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상대의 고통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해가 정확하며 자신의 언행이 충분히 공감적이라고 믿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2차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 맞춥니다. 피해자가 건강한 이웃으로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줍니다.
범죄 피해 트라우마를 입은 아이는 성인과는 굉장히 다르다고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건 후 아이가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유무죄를 가르는 중요한 단초가 되면서도 사실상 아동 범죄 피해자의 특유함에 대한 일반인과 형사사법 관계자의 이해 폭은 넓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범죄 유형별 아동의 독특성을 알려주며 아이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해 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살아서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얼마나 이 사회가 무신경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피해자를 그저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소비해 버리는 공동체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범죄 사건을 조망하고 피해자를 공동체 일원으로서 보호하고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고민하는 김태경 교수의 이야기가 울림을 줍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209/pimg_796012163330019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