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 -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보랏빛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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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작품 번역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김정숙 번역가의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명암>. 2년 전 처음 <명암>을 읽었을 때 느낌이 지금도 선명할 정도로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역작입니다. 처음엔 미완 소설이라는 것에 찝찝함도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더 곱씹을 만한 여지를 준 소설이었어요.

 

미완임에도 어마어마한 분량인 <명암>. 1916년 5월부터 12월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나쓰메 소세키 최후의 장편소설입니다. 집필 중 타계한 나쓰메 소세키. 2016년은 <명암> 탄생 100주년이자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2017년은 나쓰메 소세키 탄생 150주년이 된 해였습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 그동안 열네 작품을 만났습니다. 다양한 비유와 비평이 깃든 그의 소설은 메이지에서 다이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겪은 개인, 가족, 사회, 국가의 규범과 가치를 고민하게 합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공감되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풍자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B급 코드 냄새를 풍긴 <도련님>, 사색의 묘사가 돋보인 <풀베개>, 이후 소세키식 연애관이 등장하는 <산시로>, <그 후>, <문>에 이르는 소세키 전기 3부작, 자전적 소설 <한눈팔기> 등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었어요.

 

<명암>은 이전의 소설에서 보여준 인간 심리, 마음 작동의 흐름 묘사가 신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동안 은근히 무시하던 여자 비중을 <명암>에서는 제대로 다룹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달라졌어요!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죠.

 

신혼부부 쓰다와 오노부를 중심으로 친지, 친구, 첫사랑까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아침드라마로 딱 좋은 가족소설입니다. 그동안 나쓰메 소세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동정심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는데,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고 경제관념 부족한 남편 '쓰다' 만큼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어요. 아내에게 체면은 어찌나 챙기려 드는지, 거짓말이 먹혀들자 득의양양해하는 쓰다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 푹푹.

 

 

 

<명암>은 아내 오노부의 내면 묘사가 볼만합니다. 그녀는 결혼 상대를 스스로 선택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신세대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반년 만에 쓰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결혼하고서도 여전히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받는 쓰다. 그렇다고 백수는 아니고 직장을 잡아 일을 하긴 합니다. 하지만 체면치레용 씀씀이에는 못 미치는 벌이인지라 아버지에게 돈을 못 받게 되자 아내에게 면이 안 선다며 골이 난 거죠.

 

 

 

아내 오노부를 대할 때면 자상한 남편이라기보다는 조금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남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버리고 친구와 결혼해버린 첫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이유를 명쾌하게 알지 못해 사실 첫사랑에게 애태운다기보다는 미련이 남은 겁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인물이 몇 있는데 그들의 부추김이 결국 흥미진진해지는 코스에서 소설이 딱 끝나버린 첫사랑과의 재회 장면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만 하면
행복해질 가망은 얼마든지 있는 거야. - 책 속에서

 

아내 오노부는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었던 만큼 결혼생활이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한 것은 자기 안목으로 자기 남편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전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면 여자가 남자를 다룰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백하는 것만 같아 자존심 상한다 이거죠.

 

이러니 찰떡처럼 사이좋은 부부인 척 행세하면서도 오노부의 마음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남편 쓰다를 사랑한 만큼 쓰다에게 한껏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돈을 못 주겠다는 아버지 대신 여동생이 빌려주겠다 하니 자존심 상한 쓰다. 마침 아내가 돈을 융통해와서 이번엔 아내와 손발이 좀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다 여동생에게 제대로 한소리 듣습니다.

 

쓰다와 오노부는 남의 호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겁니다. 돈은 갖고 싶지만 돈을 내민 호의는 필요 없다는 식의 행동을 한 쓰다와 오노부에게 여동생이 일장연설하는 장면은 통쾌하기까지 하네요.

 

 

 

2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시누이에게 당하는 오노부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일었는데, 이번에 읽을 땐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남편이란 아내의 애정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해면동물에 불과한 걸까."며 공허함에 사로잡힌 오노부의 마음은 안타깝지만,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인 셈이더라고요.

 

남편과 여동생의 대화 중에 "오빠는 언니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소중히 하는 사람이 또 있으니까요"라는 폭탄 발언을 엿들은 이후 더 불안해진 오노부. 절대 사랑을 추구한 오노부에게 의심이라는 한 조각이 들어차게 되니, 앞으로 오노부의 행보가 어떨지. 이쯤 되면 정말 막장드라마로 전개될 법 합니다.

 

 

 

김정숙 번역가의 <명암>은 기존에 읽었던 것과 살짝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역시 번역가에 따라 읽는 맛도 달라집니다. 김정숙 번역가는 조금 더 청년들의 화법을 많이 사용한 느낌입니다. ~했네 대신 ~했어, ~하는 건가 대신 ~하는 거지? 식으로요. 아이고, 아이~ 같은 추임새도 곧잘 등장해 조금 더 아기자기 발랄하게 읽힙니다.

 

<명암>의 부제를 '완전한 사랑'이라 붙여도 될 만큼 절대사랑을 꿈꾸는 오노부를 통해 부부간의 사랑, 행복의 실체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명암이 교차하는 풍성한 인물 라인도 한몫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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