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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로 읽는 세상
김일선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평점 :
의식하며 살진 않지만 우리 삶에 녹아들어 있는 공통의 기준, 단위. 언제 어디에서나 곁에 있지만 존재를 잊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계속 '측정'하며 산다고 합니다. 방의 밝기, 온습도, 수압, 핸드폰 충전 상태 등 무엇인가를 재는 행위의 연속이라는 걸 짚어줍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 영향력을 그다지 인지하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단위로 읽는 세상>은 인간 지식의 결정체, 문명을 이룬 도구, 더 분명한 소통을 위한 언어로서의 단위를 파헤쳐 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객관적인 것이 있다면 숫자입니다. 모호함이 없다는 점에서 '가능한 한 빨리'같은 언어의 다른 요소들과 구분되죠. 하지만 숫자로 무언가를 표현하려면 다른 보조 수단이 필요합니다. 바로 단위입니다. 숫자에 단위가 붙어야 비로소 객관적이면서 의미를 가진 표현이 되는 겁니다. 대상을 객관화하는 수단인 숫자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단위가 만나 타인과의 소통에서 최소한의 객관성을 얻는 거죠.
재미있는 건 평점, 별점 같은 수치로 보여주면 더 객관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실상 대부분 객관적이지 어렵지만 말이죠. 내 걸음으로 30분과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한 30분은 다를 수 있습니다. 도보 10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숫자 자체가 가진 객관성에 편승해 마치 결과가 객관적인 듯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죠.
길이, 넓이, 부피, 무게, 시간, 속도, 밝기, 전압, 전류 등 물리량을 표현하는 단위는 있지만 기쁨, 분노 등을 나타내는 단위는 없습니다. 아직 실체 파악이 안 된 미지의 대상들은 단위가 없습니다.
단위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기준이 점차 변한다고 합니다. 예전엔 1미터를 쇠막대기를 기준으로 했다면, 요즘 통용되는 1미터의 정의는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단위의 개념이 대중의 이해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원자 운동 수준에서 정의 내립니다.
기술의 발달로 시계에 분침, 초침이 달리면서 인간의 삶도 분, 초 단위로 관리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스포츠, 금융시장, 우주선 발사 등 기술이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각각의 문화권마다 다양한 단위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왔지만 단위계들도 경쟁과 적자생존을 겪었습니다. 사용되다가 사라진 단위들도 많습니다. 가장 흔한 예로 우리나라의 '평'. 1평은 키가 180cm인 사람이 누워서 양팔을 벌렸을 때 만들어지는 정사각형을 생각하면 됩니다. 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최소의 면적이죠. 이제 평 대신 제곱미터를 사용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평이 더 직관적으로 와닿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동산계에선 법규를 피해 가기 위해 평 대신 사용할 '형', 'PY'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냈죠.
단위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 이야기 등 단위들의 역사를 통해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의 흥미진진한 경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터법을 사용하는데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는 곳은 미국, 미얀마, 라이베리아 세 나라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혼용해서 사용해왔습니다. 신체 사이즈나 TV 화면 사이즈처럼 인치 사용에 더 익숙한 것들이 꽤 많습니다.
종이, 카메라 렌즈, 시력, 술잔, 연비 계산 등 일상이 편리해지는 단위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단위를 주제로 한 알쓸신잡을 보여준 <단위로 읽는 세상>. 지식 정보 면에서 유용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 알아두면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네요. 올바른 단위 표기 방법에 관한 정보는 생각 외로 우리가 잘못 알고 쓰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만만하게 봤던 단위가 만만하지 않더라는 것. 어이없게도 단위를 혼동해 큰 사고로 이어진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99년 나사의 '화성 기후 궤도선'이 286일을 날아 비로소 화성 궤도에 진입 중 추락한 사고는 단위를 혼동한 결과였다네요.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처럼 사용하는 단위가 달라 생긴 숱한 문제를 보면 나라마다 단위가 다른 것이 세계화에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문명을 이룬 도구로서의 단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단위를 이야기한 책, 단위로 읽는 세상. 청소년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교양과학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