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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씽킹 -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가리 카스파로프 지음, 박세연 옮김, 믹 그린가드 정리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평점 :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던 사건, 1997년 가리 카스파로프와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의 체스 경기. 이후 우리는 그가 새로운 세대의 체스 기계가 등장할 때마다 대결을 벌이며 인공지능의 탄생과 진화를 목격한 체스 챔피언으로서의 세월을 잊어버린 채, 기계에게 패배한 체스 챔피언이란 것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은퇴 후 '책임 있는 로봇 연구 재단'의 최고자문위원회 위원을 맡으며 옥스퍼드대학교 마틴스쿨의 객원연구원으로 인류미래연구소에서 학문간 통섭과 인간과 기계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그의 행보는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처절하게 경험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체스 기계와의 대결을 경험하며 인공지능의 역사를 함께 했기에 오히려 인공지능의 한계와 인간 지성의 위대함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1985년 서른두 대의 체스 컴퓨터와 다면기 방식으로 대결해 32대 0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그해 스물두 살의 나이로 최연소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뒤 12년 후.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와의 한판 승부는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에서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았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역전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였습니다. 하지만 딥블루는 창조성과 직관을 발휘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2억 가지 경우의 수를 순식간에 계산하는 무자비한 기계였습니다. 그 대결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고백 <딥 씽킹>.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신기술을 수용하여 미래를 이끌어갈 것인가, 아니면 변화의 흐름에 끌려다닐 것인가?" - 책속에서
1990년대 초 이미 체스 프로그램과의 대결에서 몇 번 패한 경험도 있었고, 2003년 딥주니어와의 승부에선 무승부를 겨루는 등 가리 카스파로프는 체스 기계의 진보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했습니다.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체스 컴퓨터의 역사를 통해 인공지능 기술의 혁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봅니다.
체스 기계의 실력은 1960년대 초보자 수준에서 1970년대 강력한 플레이를 거쳐, 1980년대 후반 그랜드마스터 등급이 되었고, 1990년대 말 세계챔피언을 꺾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로 도약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체스는 인공지능의 초파리 역할을 상실합니다. 이제 새로운 초파리가 등장했죠. 바둑입니다.
2016년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젝트 딥마인드의 알파고는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 이세돌을 꺾게 됩니다. 딥블루의 시대가 저물고 알파고의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기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관점 변화에서 이뤄진 결과물입니다. 앨런 튜링이 꿈꾼 인간의 생각을 실질적으로 모방하는 컴퓨터에만 얽매였던 관점을 벗어나면서 혁신이 이뤄집니다.
"무언가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그 원칙을 언제 포기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 책속에서
"나는 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라고 말한 가리 카스파로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딥블루와의 매치를 생각하면 그조차도 씁쓸해진다고 고백하네요.
우리가 기억하는 딥블루와의 매치는 재대결이었습니다. 1996년에 이미 한 차례 대결해 가리 카스파로프가 승리했던 전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면은 무척 실감 나서 읽는 저도 긴장하며 읽게 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컴퓨터와의 매치에서 승리를 거둔 마지막 세계챔피언이기도 합니다. 이때 IBM은 여섯 번의 게임에서 두 번을 이겼는데 이것으로 주가는 상승했고 IT기업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적 대결이 된 딥블루와의 재대결. "과거의 성공은 미래 성공의 적이다."라는 말처럼 가리 카스파로프에겐 이전의 승리가 악재로 작용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딥블루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IBM 입장에서는 첫 번째 대결에서 깨달음을 얻는 좋은 패배로 작용했습니다.
IBM이 주최자이면서 참가자인 두 번째 대결은 은밀하게 적대적인 낯선 분위기로 일관되었다고 합니다. 게임 규정, 일정 등 다양한 조건에 대한 합의를 안이하게 내준 결과는 그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받기 쉬운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두 번째 대결에서 승, 패, 무, 무, 무 그리고 패. 총 여섯 게임동안 그의 상태를 묘사한 장면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만듭니다.
그 대결에서 벌어진 자잘한 실수들과 소동이 의도적이었는지 가리 카스파로프가 제기한 의문들에 대해 IBM은 자료 공개 없이 묻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원한 것은 얻었으니까요. 더 이상 딥블루는 체스를 두지 않고 은퇴했습니다. 가리 카스파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딥블루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IBM이 승리를 얻기 위해 공정한 경쟁의 정신을 배반했을 뿐."
알파고와 이세돌 바둑 대결에서 경험한 패배의 허탈감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겁니다. 알파고는 인간이 개발했으니 결국 인간의 승리라는 자축 아닌 자축이 쏟아졌죠. 딥블루와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대결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이미 벌어졌더라고요. 재밌군요.
그는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해 낙관주의입니다. 기계의 판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체스 훈련의 행태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기에 더욱 인지 근력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는 건 그저 컴퓨터를 모방할 뿐, 창조적 혁신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고 말이죠. 지식을 습득하고 기억하는 기능은 우리가 두뇌 설계 방식에 따라 창조적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한다는 것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믿음과 경험칙을 토대로 의사결정을 합니다. 이것이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체스판에서 한 일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인간 특유의 오류와 인지적 약점을 인식한다면 오히려 이런 의사결정은 인간만의 특징으로 남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인간 생각의 위대함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가리 카스파로프는 <딥 씽킹>에서 체스와 체스 기사에 대한 맹목적인 편견부터 걷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컴퓨터 체스의 탄생과 혁신 그리고 인공지능의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이길 수 없다면 함께하라는 그의 말처럼 기계와 인간의 협업에 초점 맞춰 기술 진보에 관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가리 카스파로프는 체스 컴퓨터의 진화를 최전선에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행보를 보면, 인공지능에 관한 담론에 한 발 들이밀어도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 생각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