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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
파시 일마리 야스켈라이넨 지음, 김미란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핀란드의 무라카미 하루키로 알려진 작가 파시 야스켈라이넨. 하루키 팬이 아니다 보니 비교는 못하겠지만, 그런 명성을 얻은 작가니 일단 읽어볼 만하겠다 싶더라고요.
북유럽 소설답게 기묘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스멀스멀~ 일상이 평온한 북유럽은 오히려 문학 쪽에서는 어두운 악을 드러내는 소설이 인기라고 하더군요. 판타지 스릴러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은 어른용입니다. 전 연령이 읽는 판타지가 아니라 섹슈얼적으로 성인용이에요.

작가 지망생이자 임시 교사로 일하는 엘라. 학생의 에세이를 읽다 기묘하게 뒤틀린 장면을 발견하는데. 그 학생이 건넨 책은 원작 내용과 결말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원작에서 등장인물만 차용한 책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원작이니 귀신이 곡할 노릇.
게다가 이렇게 줄거리가 바뀐 소설이 한 두 권이 아니었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소냐의 총에 라스콜니코프가 총에 맞아 죽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뫼르소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 걸로 바뀌어 있고,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사자 아슬란이 인간 아이들을 위해 목숨 바치는 대신 백색마녀를 물어 죽이며 끝나는 겁니다. 소설 좋아하는 독자로서는 줄거리가 바뀌는 기묘한 사건이라는 소재에서 구미가 확 끌릴 겁니다.
도서관 사서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니 엘라는 더더욱 이 일이 수상쩍습니다. 그런던 차에 갑자기 위대한 아동 작가 라우라 화이트가 주관하는 래빗백 문학회의 회원 자리를 제안받습니다. 라우라 화이트의 부름으로만 회원이 될 수 있는 래빗백 문학회는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 협회이니 겨우 단편 하나 선보인 엘라로서는 크나큰 기회가 온 겁니다. 몇 십 년의 세월 동안 겨우 아홉 명의 회원으로만 유지하고 있고, 아주 오랫동안 그 누구한테도 허락되지 않았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래빗백 문학회의 축하파티 날, 믿기 힘든 사건이 생기는데. 갑작스러운 눈보라가 집안으로 휘몰아치더니 라우라 화이트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린 겁니다.
라우라 화이트 실종 사건과는 무관하게 엘라는 문학회 회원으로 입성하는데. 래빗백 문학회 회원 간에 이루어지는 게임 문화는 무척 기묘하네요. 다른 회원에게 게임에 도전할 권리가 있고, 거부하면 자격 박탈이 되는 게임 규칙. 질문으로 이루어지는 이 게임은 답변자가 완벽하고 정직한 답을 토해내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나오게 해야 합니다.
문학사 연구 조사 훈련을 받은 전적이 있는 엘라는 게임을 통해 문학회와 라우라 화이트의 비밀을 캐내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한 회원이 라우라 화이트의 집에서 훔친 책 두 권이 도서관의 책들을 감염시킨 것과 엘라 이전에 이미 천재적 재능을 가진 열 번째 회원이 있었지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소설광들을 흥분시킬만한 스토리로 이어지네요. 작가들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을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문학회 회원들은 하나같이 성공한 작가들입니다. 공상과학, 추리, 연애, 청소년 소설은 물론 시나리오 작가 등 작가로서 나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게임을 하는 과정에 알아낸 은밀한 비밀을 소설에 써먹고 있었어요.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죽은 천재 소년이 남긴 노트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소설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전부 그 죽은 소년한테서 훔친 거였다는 말이 되는 거죠. 엘라는 문학사에 큰 스캔들을 낳을 이 비밀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애초에 천재 소년의 죽음도 사고가 아닌 살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라우라 화이트의 기묘한 과거사도 한몫하게 됩니다.
"소재를 찾는 일에는 사냥을 하는 것 같은 묘미가 있어요." - 책 속에서

여기까지는 정말 엄청난 흥분을 안겨주는 스토리였어요. 그런데 소설 마지막 페이지가 얼마 안 남은 상태에 이르러서도 라우라 화이트의 실종과 관련해서는 답이 없어 조마조마 해지기 시작합니다.
소설 초반 엘라의 아빠가 들려준 라우라 화이트의 책에 등장한 생쥐 대왕 이야기에 관한 부분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생쥐 대왕이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건 분명한데 속 시원하게 파악이 안되니 답답한 면은 있었네요. 어쨌든 판타지라는 걸 잊지 말아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들면 납득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뭔가 결말은 살짝 아쉬워서 영화로 만들어지면 좀 더 명쾌하게 이해되려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네요.
대신 에필로그까지 긴장과 스릴을 끝까지 유지하며 심장 바운스 시키는 장면들은 제대로 멋졌어요. 다른 이의 경험이 자신의 소설에 딱 맞을 때 눈빛을 반짝이는 작가들을 묘사하는 부분, 게임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부작용이 생긴 작가의 속내 등 재미 포인트는 많습니다.
라우라 화이트의 대사 중 인상 깊은 게 있어요. "모든 책은 자기만의 고유한 세균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사람이 읽을 때마다 조금씩 변한단다."라는 말을 합니다. 라우라 화이트는 집 안의 책은 그 집에서만 읽어야지 회원들에게 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묘하게 수긍되는 이야기예요.
파시 야스켈라이넨 작가의 <라우라 화이트가 사라진 밤>. 스산한 어둠이 자리 잡은 북유럽 판타지 소설의 맛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스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