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신자살 - 개정판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평점 :
변호사 고진 시리즈 세 번째 <정신자살>. 그냥 자살도 아니고 정신자살이라니. 신체는 그대로 놔두고 정신을 자살하면 식물인간처럼 되는 건가? 지능이 떨어지게 되는건가? 호기심 동하게 하는 제목이죠.
1년 전 찾지 말라는 메모 한 장만을 남기고 돌연 가출한 아내. 아내 한다미가 사라진 후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 남편 길영인의 시선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이제 겨우 서른 초반이지만 살 욕심도 없고 존재 자체가 괴로운데 차마 자살은 못 하는 어중간한 인생을 하루하루 살고 있죠.
삶의 본능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깨는 데에는 막대한 음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게는 그런 정도의 의욕도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살아 있다. - 책 속에서
그러던 차에 정신자살연구소를 발견합니다. 정신의 치유는 어렵고 더디나 파괴는 쉽고 한순간이라며 육체의 죽음이 두려운 사람에게 정신을 파괴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데. 육체의 죽음이 두려워 자살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유혹이 됩니다.
육체를 보존한 '정신'만의 '자살'이라니. 삶과 죽음의 끝없는 고뇌를 할 것인가, 정신을 파괴한 삶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인가의 기로에 선 남편. 자살할 용기가 없는 남편 길영인은 결국 그 시술을 받으러 갑니다.
4년 전 판사직을 그만두고 오직 뒷길에서만 사건 의뢰를 받는 고진 변호사. 정공법보다는 법률의 맹점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번에는 펜션 살인 사건에 얽히는데요.
우연히 펜션에 하루 머문 고진 변호사는 그곳에 투숙했던 여자의 피살 사건으로 이유현 경감(드디어 승진!)과 뭉칩니다. 처음엔 단순히 부부 싸움 끝에 벌어진 우발적 살인으로 생각했다가 피살자의 남편이 사라진 한다미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부 두 쌍의 치정 문제로 얽힙니다. 연적인 남편들끼리 살인이 있던 밤 통화를 했다는 기록까지 나오면서 이들의 악연이 심상찮아 보입니다.
피살자의 남편마저도 살해되면서 결국 한다미의 남편 길영인이 강력한 용의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나 잘 도망 다니는지 이유현 경감과 고진은 매번 허탕만 칩니다.
용의자 길영인이 고객인 정신자살연구소도 훑어야겠죠. 그런데 정신자살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는 고진과 이유현 경감과 이미 몇 년 전에 인연이 있던 사이였습니다. 당시 내담자에게 살인하도록 부추긴 의심을 받았던 이탁오 박사. 증거가 없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지만요. 이탁오 박사와 고진 변호사는 묘하게 닮았습니다. 인간 본성을 꿰뚫어보려는 왕성한 호기심 덕분에 범죄마저도 유희적인 놀이처럼 다루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양심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악을 선택해. 각자의 저울은 천차만별이라도 그 눈금은 하등 다르지 않은 게 인간이야. - 책 속에서
소설 <정신자살>에서는 고진 변호사와 이유현 경감의 콤비 비중은 덜해 그들의 쿵짝놀이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살짝 심심했지만, 인간의 바닥까지 꿰뚫어 들어가는 차가운 시선을 가진 이탁오 박사의 섬뜩함은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엔 사회파 소설 분위기를 안고 가는군요.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거나 사회의 탓으로 돌리며 자살 원인을 분석해봤자 자살률은 조금도 줄지 않기에 사고의 전환을 해봤다는 이탁오 박사. 아픔의 근원인 마음을 고칠 수 없다면 마음을 파괴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마음을 죽임으로써 고통도 사멸한다는 정신자살. 그 이론만큼은 은근 끌리는걸요.
결말은 뜬금없이 호러로 진행되어 헉!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고진과 이유현의 콤비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나름 진지모드인데, <정신자살>의 결말은 일 푼어치도 생각 못 한 결말로 흘러가 나름 충격 먹었어요. 결말은 독자에 따라 취향 많이 탈 것 같아요. 와... 도진기 작가님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하다니. 점점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다섯 작품 중 <붉은 집 살인사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까지 세 편 읽었습니다. 이제 영화화 된다는 <유다의 별> 읽을 차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