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망각 요법과 기억 회복 치료 등 정신의학적으로 파고든 심리 스릴러여서 메디컬 소설 분위기도 맛봤습니다. 제대로 된 심리 스릴러 소설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리즈 위더스푼 출연 영화화 확정이라니 책 읽기 전부터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릴러일 거란 짐작은 해봤네요.

 

변호사 출신,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편집자 등의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띄는 웬디 워커 작가. 다른 장르의 책은 이미 출판 경력 있지만 이 책으로 심리 스릴러 작가로서도 성공적인 데뷔를 했습니다. 변호사가 아닌 정신의학과 의사 출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뇌과학적 정보가 매끄럽게 스토리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열다섯 살 제니는 고등학교 파티장에 간 날 밤, 숲 속에서 잔인하게 강간 당합니다. 문신 새기듯 제니의 등 깊숙이 문양까지 남긴 범인.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된 제니는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사건에 한해 기억을 삭제하는 치료 요법인 망각 치료를 받게 되는데. 

 

 

 

하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제니가 기억을 못 하면 괴물을 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딸의 회복이냐 놈을 잡아서 벌주는 걸 바라느냐에서 갈등하는 제니의 부모. 아예 없던 일로 치는 걸 회복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의 엄마. 반면 아빠는 악마를 대면해야 회복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제니에게 기억을 돌려주기 위해 제니의 가족 상담을 맡았습니다.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는 피해자 제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주변 인물들의 비밀이 얽히며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초반 '나'의 목소리로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데, 지독히도 무감하게 설명하고 있어 갑갑~~한 느낌까지 받을 지경이었어요. 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며 설명하는데 일부러 이런 분위기로 진행하는 걸 거야 생각하며 일단 작가에 대한 무한 신뢰 상태에서 읽어나갔습니다. 한마디로 초반엔 작가 문체에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한 소설이었어요. 

 

 

 

제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치료를 하게 된 원인은 제니의 자살 미수 사건 때문입니다. 망각 치료를 한 제니에게서 어떤 후유증도 보이지 않아 다들 성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이미 경험한 신체 반응은 우리 두뇌에 프로그래밍 되기에 제니는 강간을 기억하지 못했어도 공포는 몸속에 살아있었던 겁니다. 나아지고 있다 믿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던 부모는 제니가 손목을 그어버린 일로 심한 자책감에 빠집니다.

 

제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치료에서 제니뿐만 아니라 제니의 부모 상담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니 엄마의 과거가 드러납니다. 계부와의 도착적인 관계였던 과거와 남편 회사 사장과의 불륜이라는 현재 상황.

 

우리는 한 사람에게 온전한 자아를 내보이지 않기에 우리 모두 다른 누군가에게 뭔가를 숨기고 산다며 각자가 가진 비밀을 슬쩍 보여줍니다. 소설에서는 제니 엄마 샬롯의 상황을 지탄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치료의 일환으로 바라봅니다. 착한 샬럿, 나쁜 샬럿으로 구분해서 말이죠. 그녀의 비밀을 통해 딸 제니 사건에서 왜 그토록 망각 치료를 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드디어 용의자가 드러나고 제니의 기억 중 일부가 회복되면서 사건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마약 판매하러 파티에 왔던 용의자. 그의 알리바이는 입증된데다가 그가 목격한 것 때문에 새로운 용의자는 의사의 아들이 될 상황에 이릅니다. 증거와 목격담에 딱 들어맞는 용의자가 된 의사의 아들. 아직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제 '나'는 제니와 제니의 가족을 돕고자 하는 의사인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기억 회복의 논란성에 대한 학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독자에게도 의심 부스러기를 흘립니다. 학계에선 기억은 회복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에 회복한 기억이란 거짓이라는 것을요. 제니의 회복된 기억에 왜곡과 오류가 있을 거라는 암시를 주죠. 

 

부모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디자인이 돼 있다. - 책 속에서

 

 

 

아들이 수사에 휘말리지 않게 막으면서 동시에 제니의 치료를 성공할 방도를 고민하는 '나'. 꼭두각시들을 춤추게 하는 인형술사가 된 셈입니다. 의혹의 씨앗은 적당한 햇볕만 있으면 잡초처럼 무럭무럭 자란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기억과 의혹이 뒤섞이면, 기억이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의혹과 섞여 아주 살짝 변질된다는 것을요.

 

'나'는 아들에게 쏠릴 이목을 돌릴 허수아비로 그 지역 최고위층이자 권력가, 성공과 야망이 강한 남자 '밥'을 끌어들입니다.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에서는 망각 요법을 한 제니와 동일한 치료를 받은 해군 특수부대원 숀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 PTSD와는 별개인 만성 불안증을 보인 숀의 치료 과정, 제니의 엄마 샬롯과 아빠 톰의 상담 과정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변화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런 변화를 끌어내는 '나'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점이었어요. 심리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특히 흥미롭게 읽을만한 소설입니다.

 

반전 없는 소설은 거품 빠진 맥주 마시는 기분이죠.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는 착실하게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묵직한 소설이라는 말 그대로 마지막까지 그 무게를 이어갑니다. 스토리가 무척 탄탄한 소설이니 초반 딱딱하고 무감한 문체만 적응하면 끝까지 읽어내는데 순식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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