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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남들보다 더디더라도 이 세계를 걷는 나만의 방식
한수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공감 에세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내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에세이는 아닐까 걱정 살짝 하면서 펼쳤는데, 이 책은 저랑 궁합 잘 맞았어요. 책덕후들의 추천도서다운.
2015년에 출간한 <우울할 때 반짝 리스트> 개정판입니다. 한수희 작가는 세종우수도서에 2년 연속 선정, 매거진 <어라운드> 칼럼리스트로 고정 팬층 있는 글빨 쎈 작가더라고요.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제목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나온 대사라고 합니다. 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하는 인생인 것 같다고. 언제나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그런데 지금 와 돌아보니 그건 원이 아니라 나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인생은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것. 열심히 걸어도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걷고 있다는 말이 마음에 위로를 줍니다.
한수희 작가는 삶을 마주하는 세 가지 자세로 담담할 것, 씩씩할 것, 우아할 것을 이야기하는데요. 이 모두가 조화를 이뤘을 때 온전한 나다움에 한발 다가서는 것 같아요.
텃밭 딸린 농가 주택 사서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로망 한 번쯤 하지 않나요?
한수희 작가도 그런 동경을 제대로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서는 온전한 나를 찾기 힘들고 그렇게 해야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 하지만 어딜 가든 현실은 따라온다는 문장을 읽고 의기소침해졌다는군요. 생각해보니 저도 무언가에 엄청 꽂혔다가 겨우 한두 마디 말에 열기가 와륵 식어버린 경험이 많아 슬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동경은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나타나는 생각은 아닌지. 저는 특히 30대 초반 즈음에 유난히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었는데 내 인생을 제대로 마주하려는 시도조차 할 생각이 없을 만큼 불안하고 두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사는 건 사는 것 같지도 않고, 막연한 동경 그것을 해야만 내 의지대로 하는 것 같은 느낌.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조금씩 욕심을 버리면서 그 시기는 어찌어찌 흘렀네요. 그런데 비우기와 포기의 경계선은 어딜까요. 속 시원해지느냐 찝찝함이 남느냐 같은 감정의 찌꺼기 차이가 있더라고요. 손에 잡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것 대신 담담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씩씩하고 우아하게 실패하는 법을 들려준 에피소드도 좋았어요. 상처를 직시하는 게 두려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지는 않아야 합니다. 영화 <도희야>, <비긴 어게인>에 나오는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패와 실수가 없을 수 없는 인생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상처, 두려움, 불안감도 받아들여야 인생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인생에 관한 에피소드도 제 상황과 닮아 공감되더라고요. 완벽한 일, 성공, 행복이 모두 따라올까요. 좋아하는 일을 실제로 한다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수희 작가는 북카페를 잠시 차린 경험을 통해 제대로 실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한번 해보았다는 충족감은 남죠. 안 해봤다면 언제나 가슴 한편에 남아있을 텐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아함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잘 늙는다는 것, 지금의 제 목표이기도 해요. 제대로, 잘 늙는 여자가 된다는 의미는 뭘까. 한수희 작가는 사노 요코와 노라 에프런처럼 솔직하고 씩씩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시니컬하지만 정말 그분들은 나이대에 맞는 감각을 유지했던 분들이죠. 당당한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마스다 미리.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단 생각을 할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지 않나요. 거창하지 않는 소박함이 매력적입니다.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묻어 나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한수희 작가는 책과 영화로 깨달은 게 많았어요. 공감하며 읽고 본 덕분에 사색의 힘이 잘 드러난 에세이입니다. 힘내어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책과 영화를 별도로 소개하고 있어요.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는 삶을 마주하며 인생을 걷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직선보다는 느리지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나선. 영화 <안경> 속 사쿠라 할머니의 대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초조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