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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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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삶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 데프 보이스.
청각장애자 농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몇몇 있는데 <데프 보이스>는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들리는 아이, '코다'라 불리는 이들의 삶에 초점 맞춘 책입니다. 농인 문화, 코다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어차피 들리지 않는다며 귀머거리라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그른 잣대로 농인을 대하는 상황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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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사무직 출신 '아라이'. 경찰 비자금 문제로 내부고발자였던 그는 공무원 생활을 접고, 수화 통역사 자격을 취득해 새 삶을 준비 중입니다. 그런데 아라이는 애초에 스스로 수화를 배울 마음도, 수화 통역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청각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돕고 싶다거나 비장애인과 그들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를 가졌지만, 아라이는 달랐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모두 농인이지만, 아라이만 청인이었던 겁니다. 그는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들리는 아이, 코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배운 수화를 사회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불편할까 싶었는데, 유쾌하지 않은 과거가 있었던 거예요. 17년 전 농인 용의자 취조 때 수화 통역을 잠깐 맡았는데, 당시 취조는 엉터리였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신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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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작은 딸이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 하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소녀의 눈빛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법정 통역 의뢰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번 용의자는 제대로 농인 교육을 받지 못해 제스처에 가까운 단순한 동작만 가능한 농인이라 수화 통역사에게도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묵비권이란 단어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를 보며 취조 단계부터 엉망이었을 거라 예상하는 아라이. 그나마 기지를 발휘해 공판이 취소되고, 그를 눈여겨 본 NPO 펠로십 단체에서 그를 영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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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만난 이들 중에 농인이지만 변호사가 된 사람도 있었어요. 그는 후천적 농인이었는데 그가 아무리 열심히 발버둥 쳐도 부모에게는 '흠이 있는 아이'였던 겁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아닌 보통 아이가 되길 바란 부모의 기대감 속에 놓였던 그의 인생사를 보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농인 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데프 보이스>에는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인 데프 패밀리, 난청자, 중도실청자 등 다양한 농인과 농아인의 삶이 나옵니다. 그에 따라 수화, 구화법 수준도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수화 통역사는 수화 기술뿐만 아니라 마음이 통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수화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데요. 수화 통역사들이 사용하는 수화와 실제 농인이 오랜 기간 사용해 온 수화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대응수화와 일본수화로 나뉘는데 꽤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수화로 대화할 때 아라이의 자연스러운 수화 덕분에 실컷 수다떨 수 있어 속이 시원할 정도라는 농인의 말이 인상깊습니다.
선천적 농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본수화를 자연스럽게 먼저 습득하는 코다 역시 농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코다의 위치가 농인 사회에서든 청인 사회에서든 경계에 걸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코다 스스로가 농인 사회에서 이미 멀어져버린 상황도 많고요. 우리 편이냐 적이냐 묻던 소녀의 물음에 아라이는 이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아라이의 기억을 통해 코다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땐 농인인 부모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이해는 하면서도 들리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에 자기만 가족과 다르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어했습니다. 그는 들리는 '농인'으로 가족과 세상 사이의 통역을 해 왔습니다. 코다라는 단어가 생긴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든다는 말에 그동안 흔들린 자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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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아이에게 선천적 농인인 부모가 하는 말, 그것은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목소리입니다. 소리가 들리는 사람은 모르는 찬란한 세계, 데프 보이스. 이 소설에서는 오직 들리는 아이와 들리지 않는 부모 간의 홈사인으로 드러납니다.
농인과 코다의 삶을 중심으로 17년 전 살인사건과 또 다른 살인사건의 관계를 파헤치는 가운데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 <데프 보이스>는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 계층과 코다 수화 통역사 간의 신뢰와 믿음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뭉클한 감동은 기본!
부제 법정의 수화 통역사를 생각해 법정 공방이 치열하게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법정 신은 극히 일부네요. 하지만 그동안 알지 못했던 농인 문화를 소개하면서 훌륭하게 공감대 끌어올린 소설입니다. 작가가 코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 이입이 잘 되어 있고, 자극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않았어요. 제18회 마쓰모토 세이초 상 최종 후보작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이 책은 낯설지만 우리 주변의 삶이기도 한, 농인문화를 꼭 접해보시라는 의미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