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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Top 100 <오두막>의 저자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이브>. 작가 특유의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이지만,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 소설 구성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자존감 치유와 회복이라는 소재는 작가의 특징으로 꼽을만 한데 <이브>의 주인공이 십 대 소녀여서 다른 책보다 더 부모 입장에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어요.
지구와는 시공간이 다른 피난처라 불리는 곳. 처참한 몰골로 해안에 떠밀려 온 릴리가 몸을 치료함과 동시에 깨진 정신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치료 중 릴리는 자주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그곳에서 우주의 탄생과 아담의 탄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릴리를 태초의 증인으로 이끈 이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 불리는 마더 이브. 하지만 릴리는 왜 자기가 증인이 되었는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세 개의 세계가 충돌합니다. 릴리가 지구에서 겪은 회상의 공간, 환각이라 여기는 에덴 그리고 현재 있는 피난처. 릴리의 혼란과 마찬가지로 읽는 저도 처음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초반부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또 재미없지는 않고. 이해하려고 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읽은 책이었다고나 할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릴리는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 여깁니다. 망가진 릴리의 몸은 피난처에서 지내며 고쳤지만, 정신과 마음 그리고 영혼은 치료할 수 없었죠. 그녀를 보러 온 학자에게서 받은 진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은 사악한 괴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게 볼품없고 결점투성이였어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수치심이 깊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런데 거울을 건넨 자는 그녀를 릴리스라 부르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부추기는군요. 아담에게 배신당한 이브가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이브는 영원히 에덴에 남을 것이고 그러면 역사는 바뀔 거라는 겁니다.
가치 없는 존재이기에 한 가지 선한 일을 해야만 나아질 수 있다고 믿게 된 릴리는 실행에 나서지만 아담에게마저 거부당한 릴리. 죽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때마침 '영원한 이'가 찾아옵니다.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릴리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지극히 종교적입니다. 아마 유신론자가 이 클라이맥스 부분을 읽으면 무한감동받을 수 있겠는데 저는 오히려 그 부분만큼은 감흥이 덜했어요.
이 소설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주목한 점은 아담과 릴리의 공통점이었습니다. 혼자라는 외로움 속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아담이 어둠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돌아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우리에게 죽음의 그림자 병이 생긴 이유를 돌아섬으로 설명하더군요. 뱀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성경 속 에덴과 관련한 이야기, 이브와 릴리의 존재 이유 등을 스토리 속에 녹여내면서 작가의 해석이 썩 괜찮게 들리더라고요.
요즘 읽고 있는 책,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대담 <JOY 기쁨의 발견>에서 읽은 내용과 소설 <이브>가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 책에선 기쁨의 근본적인 비밀 중 하나로 신뢰를 드는데, <이브>에서도 돌아섬의 반대 의미로 신뢰를 들고 있어요. 고통과 좌절, 괴로움으로부터 오는 가치를 이해하는 것과 그런 절망을 겪을 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이야기 역시 릴리와 우리 자신들에게 해 줄 말인 것 같습니다.
결말이 궁금해 중간에 책을 놓기 힘들 정도이긴 했습니다. 검은 피부의 마더 이브, 영원한 이와 신부의 관계, 천사와 수호자, 아담과 뱀, 릴리와 릴리스... 어떤 부분은 쉽게 이해되고 어떤 부분은 읽다가 검색해야 할 정도로 낯선 용어가 나오기도 했고,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릴리의 내면에 주목한 작가는 희망을 잃은 릴리가 어떤 과정을 겪으며 변화하는지 판타지 구성에 잘 버무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신뢰란 일생에 단 한 번 내리는 선택이 아니고, 매 순간 강물이 흐르듯 선택하는 거야.
너에게는 신뢰할 자유와 돌아설 자유가 모두 있다. 이처럼 사랑은 심오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다.
분노와 슬픔에 빠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쁨을 놓쳐서는 안 돼요.
아가, 너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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