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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품격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 글.사진 / 상상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25년차 여행기자 박종인의 고품격 인문 기행이란 타이틀답게 <여행의 품격>은 깊은 울림을 주는 여행책이네요. 여행책 읽다 눈물 핑 돌기는 또 처음이에요.
대한민국 35곳을 소개합니다. 가본 곳도 있고 처음 알게 된 곳도 있는데, 이미 가 봤던 장소만 비교해볼 겸 훑어보니 이런... 그동안 나는 헛여행한 건가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깊이가 남다르더라고요.
"봄이 오면 농부는 씨를 뿌린다. 나는 여행을 한다.
여름이 오면 농부는 비를 맞는다. 나는 여행을 한다.
가을이 오면 농부는 들판을 거닌다. 나는 여행을 한다.
겨울이 오면 농부는 숲으로 간다. 나는 여행을 한다."
박종인 여행기자는 "모든 사람이 사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여행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눈곱만치라도 알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가 여행하는 법을 새겨들어야겠어요.
홍천 8경이 홍천 9경으로 바뀌게 한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숲.
이곳을 만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픈 아내를 위해 약수 뜨러 다니다가 만든 숲이라고 해요. 25년 만에 웅장하게 이룬 은행나무숲이 이제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언젠가부터 유명해진 원대리 자작나무 숲.
우리나라 풍경이라고는 믿기 힘든 하얀 자작나무 숲을 거니는 건 로망이기도 한데요.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나무도 많이 상했다고 해요. 칼로 조각까지 했다니. 이 숲은 경제림으로 만든 거라 2050년 무렵 벌목 예정이라고 합니다. 벌목용으로 사라지기엔 아까운데 목적이 바뀌면 좋겠어요.
천안 아우내장터와 무명씨들 편에서는 감사의 순례길인 천안을 소개합니다.
천안은 예로부터 어마어마한 인재들의 고향이더라고요. 하지만 그 못지않게 무명씨들의 땅이기도 합니다. 아우내장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인 유관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죽어서도 평안하지 못한 소녀의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저릿합니다. 유관순의 묘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었다가 택지 개발로 무연고 분묘들을 합장해버리는 바람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시 대거 합장된 무연고 분묘들은 현재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는군요.
서울 북촌에 관한 이야기는 깜짝 놀랄만한 역사가 숨어있었습니다.
박종인 여행기자는 반드시 수정돼야 할 역사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북촌을 잘못 알고 있었더라고요. 북촌 하면 떠올리는 조선시대 양반마을? 실제로는 근대 한옥마을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은 권문세가 주거지로 알고 있던 북촌. 현재 북촌은 조선시대와 관계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마을이라고 해요. 나라가 사라지며 오히려 북촌은 친일파들이 독차지한 야산이었다는데, 조선어학회 소속이자 민족 운동가였던 정세권 님이 조선인 마을 건설을 목표로 이곳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 전부를 한 사람이 만든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북촌 관광책자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무명 집장사로 평가절하하며 언급이 안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시대라는 환상은 그만하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그 외에도 몇몇 장소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강원도 양구 북쪽에 자리한 펀치볼마을은 이름이 재미있죠. 화채 담는 그릇을 닮았다 해서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불렀던 이름이라고 해요.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곳에 인제 주민 160세대가 집단 이주해 형성된 마을의 역사를 약방을 운영하며 지키는 할머니의 이야기와 함께 소개합니다. 충주 중원고구려비를 발견한 유창종 전직 검사의 일화도 있습니다. 원래는 진흥왕순수비를 찾던 거였는데 이걸 발견했다는군요. 삼국시대 살벌한 전쟁을 벌였던 중원 땅에 얽힌 전쟁사를 이야기하며 국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비가 있는 그곳. 죽기 전에 한 번은 가 봐야 할 답사지라고 합니다.
<여행의 품격>은 이 땅에 흔적 남긴 역사를 통해 여행의 의미를 깊고 풍성하게 합니다.
"땅은 늙는다. 사람들 흔적을 안고 함께 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