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작가의 소설은 처음 접했는데, 악의 기원이라는 소재에 끌려 무작정 읽어버렸어요. 856페이지 빼곡하게 들어찬 분량의 압박. 초반을 잘 넘기기만 하면 스토리의 결말이 궁금해져 두꺼운 분량쯤은 별것 아니게 하는 흡인력이 있네요.
프라임스쿨 학생인 열여섯 살 다윈 영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 친구네 가족들의 이야기가 얽힙니다. 다윈 영의 여자 친구 루미 삼촌인 제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들의 공방.
30년 전 집에서 살해당한 그 삼촌은 다윈 영의 아버지 친구였어요. 문화부 교육 차관이자 프라임스쿨 위원장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다윈 영의 아버지. 30년 가까운 세월을 죽은 친구를 그리워합니다. 삼촌의 죽음에 의문을 가진 루미는 다윈과 정보를 공유하며 죽음에 얽힌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섭니다. 삼촌 앨범에서 사라진 단 한 장의 사진이 빌미가 되는데요, 사라진 사진에는 과연 무엇이 혹은 누가 찍혔을지. 그 사진은 인류 진화의 퍼즐을 맞출 수 있는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의미하는 미싱 링크 역할을 하죠.
책 표지의 후드 입은 남자의 그림은 이 사건에서 중요한 단서입니다. 제이 삼촌은 후드 입은 이에게 살해당했는데, 당시 9지구의 폭동과 관련한 이들이 즐겨 입는 옷차림이었거든요. 폭동이 실패하면서 9지구는 생명의 활기가 사라지게 되고, 이후 상위 지구에서는 후드가 금기시되었습니다.폭동 중에 상위 지구로 몰래 넘어온 사람들을 척결하며 대대적인 사람 청소를 했던 1지구.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살아남은 사람은 있었어요. 하지만 그 죄는 대를 이어받아 갑니다. 계급 사회이기에 출신 자체가 이미 죄가 되는 현실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연결해 온 사슬을 끊어 낼 수 없는 것처럼, 부모 자식 간에 죄물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입니다. "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가 주는 기쁨에도 역시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일 텐데"라는 다윈 영과 친구의 대화에서처럼요.
가족 이야기일 뿐이지만, 스토리 자체의 스케일은 어마어마하네요.한계를 넘어서까지 자식에게는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고픈 부모,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이 뭘 믿으며 살 수 있는지 존재의 방황을 겪는 다윈. 박지리 작가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은 대개 악이라면서도 사랑으로 진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폭동의 진실, 계급 사회에서 겪는 자격지심 등을 통해 세상과 나의 존재 의미를 다룬 대화도 상당합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가해자이면서 교묘하게 범죄를 감춘 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열여섯 살 다윈 영의 성장소설입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명분을 내세웠던 아버지를 보며 실상 자기의 안위를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역시 아버지보다 나은 다윈이었어요. 아버지의 죄를 이용해 자신의 순결성을 드러내려는 얄팍한 이기심을 깨닫는 다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작가가 제 의문을 풀어줬습니다. 도덕적 잣대에 걸맞은 행동인지 의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기에 또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네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다윈이어서 솔직히 설마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어요. 의외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는 순간, 제목을 다시 읊어보면 약점과 모순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