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치매를 앓는 여든두 살 할머니 모드. 좀 전의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단기 기억이 없지만, 기억을 못한다는 것 자체는 아직 인지하는 수준입니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내가 이미 물어봤구나, 겪었구나,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구나 정도는 파악하죠.

 

집안 곳곳과 주머니엔 항상 뭔가를 적어둔 메모가 가득합니다. 10분의 기억력을 가진 남자가 메모와 문신이란 방법으로 기억하는 영화 메멘토에서처럼 할머니 모드 역시 기억을 붙잡을 메모가 필수입니다.

 

무슨 말과 행동을 하다가도 찰나의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 그때마다 최대한 기억을 짜내보려고 하는데 다른 건 다 잊어도 한 가지만은 바로 기억해냅니다.

 

바로 친구 엘리자베스가 실종되었다는 것을요. 엘리자베스와 연락이 안 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엘리자베스의 실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의 아들 말로는 그저 잘 있다고만 하니 수상쩍기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직접 알아볼 수밖에요.

 

엘리자베스 실종 사건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옛 기억이 드러납니다. 할머니의 친언니 수키의 실종. 결혼했던 수키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사건입니다. 당시에도 언니를 찾아 나서며 형부를 의심해보기도 하고, 결혼 전 언니가 잘 대해줬던 하숙인을 눈여겨보기도 합니다. 사고가 생긴 건지, 살아는 있는지 수키 언니의 행방은 도무지 알 길 없었고, 수키의 실종은 미제로 남게 되었었죠.

 

지금 엘리자베스를 찾아 나서는 일과 그때 수키 언니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묘하게 비슷합니다. 치매 노인이 친구의 실종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점점 뒤섞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는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뭔가 하려고 했던 것들의 기억을 잃으며 지금 이 순간의 의미가 사라지는 삶을 사는 치매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종이에 적힌 기억이 전부인 삶이라니.

 

게다가 할머니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하는지 소설로 읽는 저도 어느 순간은 짜증이 솟구치기도, 한편으론 아련한 동정심이 생기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딸 입장과 치매를 겪는 노인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면서요.

 

치매 때문에 생기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치매라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물 콧물 짜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치매 노인 스스로의 감정이 잘 묘사되어 있어요. 치매에 걸린 자신을 창피해하고 겁이 나는 감정을 슬며시 바라볼 땐 가슴이 묵직해지기도 합니다.  

 

사랑스러운 핑크 바탕에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채워진 표지를 보곤 어떤 의미인지 감이 안 왔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니 표지의 소품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더라고요. 레코드 판, 복숭아 통조림, 립스틱과 빗, 새장, 분갑... 이 모든 것이 기억 매개체였습니다.

 

당시엔 미처 몰랐던 것들, 아니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깨닫고 있었을지도요. 모드 할머니가 잊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을 보며 내 인생에 잊지 못할 기억의 조각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하네요.

놀림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면 내가 인간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내가 농담을 이해할 만큼 지적인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는 셈이니까.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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