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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평점 :
지식의 저격수 이반 일리치의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인 12세기 수도사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을 해설하면서 우리가 배우고 책을 읽는 방식에 의문을 던집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12~13세기 역사를 통해 그전까지 통했던 수사식 읽기에서 책 중심 접근법으로 변화한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동안 책의 역사와 읽기의 역사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으로 수사식 읽기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제야 읽기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디다스칼리콘』의 첫 문장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를 통해 후고의 읽기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후고의 사상에서는 타락한 인류가 지혜와 재결합해야 한다는 것, 치유 개념이 핵심입니다.
단순한 읽기가 아닌 더 수준 높은 공부에 대한 안내서였던 그의 책은 '읽기'에 필요한, 읽기가 계발하는 덕목을 알려줍니다. 읽는 사람이 과시를 목적으로 지식 축적을 추구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지혜로 나가려 할 때 익혀야 할 습관을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 - 책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후고가 말하는 공부를 위한 노력은 읽는 사람 자신의 '자아'에 불이 붙어 빛이 반짝이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후고의 세계관에 따르면 읽기는 죄가 빛을 막아버린 세계에 다시 빛을 가져오는 치료제인 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반 일리치는 후고의 비유적 표현을 해설해주면서 후고의 사상, 읽기의 본질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최근에 읽은 『셜록의 기억력을 훔쳐라』에서 접한 기억의 궁전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는 거였어요.
후고에서 기억력 훈련은 읽기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기억력 훈련은 고대 웅변가들이 이용한 기억 기술이었지만 점차 사라졌었다고 해요. 후고는 고전적인 기억 훈련을 진지하게 소생시킨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합니다. 정보를 꺼내는 유일하고 주요한 수단으로 기억을 제안합니다.
이 과정에서 "배움의 시작은 읽기에 있지만, 그 절정은 묵상에 있다"며 묵상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후고가 말하는 묵상은 수동적이고 정적주의적인 태도로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 집중적인 읽기 활동이며 신체적 활동으로 표현합니다. 읽는 사람은 자신의 박동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행들을 이해하고, 박자를 다시 포착하여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할 때는 입안에 넣어 씹는 것으로 관련짓습니다.
"후고는 읽을 때 수확을 한다. 행들로부터 열매를 딴다." - 책 속에서
페이지의 행은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라고 합니다. 열매를 딸 때 자신의 귀를 위한 활동으로 소리 죽인 중얼거림과 암송 활동을 제안하고 있고요. 행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을 위한 읽기 기술인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하는 소리 내지 않고 읽기 방식은 읽기의 역사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후고가 몸 전체로 평생의 읽기와 관련되는 틀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왜 강조했는지 당시 배경을 알면 도움 됩니다.
당시에는 인쇄술 발달, 책 레이아웃의 변화, 색인 강조 등 텍스트가 페이지에서 벗어나고, 알파벳이 라틴어에서 벗어나는 시기였습니다.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는 읽기 외 사실적 지식을 늘릴 목적을 가진 학자식 읽기가 등장하게 되었죠.
이제 책은 읽는 사람이 하던 일을 미리 보기 좋게 해 주었습니다.
저자 자신이 주제를 고르고 자신의 질서를 집어넣고, 눈에 보이는 페이지는 말의 기록이 아니라, 생각을 거친 주장의 시각적 표현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서 텍스트의 창조자로 변했습니다.
12세기 후고의 책을 왜 지금 다시 주목해야 할까?
지금 우리 세대가 후고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또다시 읽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니까요. 이반 일리치 저자는 <텍스트의 포도밭>을 통해 후고가 고민했던 부분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독서가이드 『디다스칼리콘』으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재발견한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의 본질을 찾는 여정을 해보세요. 곱씹어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