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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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같은 책이네요. 1999년 출간되었다가 절판 후 2016년에 복간한 책 <은빛 물고기>.

스르륵 넘겨보다가 시인이 제대로 된 자연에세이를 쓴다면 딱 이런 분위기겠다 싶었는데 역시 고형렬 저자는 시인이더라고요. 문체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조금 낯설게 읽혔지만 금세 빠져들었습니다. 소설처럼 기승전결도 확실하고 클라이맥스 부분은 오싹할 정도로 강렬했어요.

 

 

 

 

김훈 소설가가 추천한 책이기도 하네요. 그가 말하는 '비통한 아름다움'이 어떤 감각인지 <은빛 물고기>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답니다.

 

<은빛 물고기>는 우리나라 첨연어의 한살이에 동행한 고형렬 시인의 사색이 담긴 자연에세이입니다. 1990년부터 10년 가까이 연어의 생사의 터전을 찾아다니며 조사, 집필했다니 엄청난 노력과 애정이 스며든 책이죠.

 

 

 

어머니의 고향 삼척의 오십천, 저자의 유년의 고향 양양의 남대천은 연어가 돌아오는 모천이라고 해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 살다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연어. 한때는 강 상류인 깊은 산 속에까지 올라왔었다지만, 이제는 산간마을에서는 연어의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예전에는 경남의 강 곳곳에도 볼 수 있었다는데 연어의 회귀 남방한계선은 점점 북상한 상태라고 해요. 이유는 오염과 개발이죠. 저자의 고향 양양에서도 연어 인공부화장이 모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자연생태를 삼자의 눈으로 관찰해 풀어낸 밋밋한 글이 아니라 <은빛 물고기>에서 고형렬 시인이 사색하는 부분이 인상 깊어요. 회귀의 약속을 지키는 연어들의 일생이 신기해서 접근한 주제치고는 그 깊이가 장난 아니었어요. 고형렬 시인이 연어와의 동행에서 배우고 느낀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의 삶에 닿습니다.

 

"은빛 물고기는 머무르지 않는 바다의 나그네들이다." - p117

 

 

 

10여 년 가까이 연어를 쫓아다녔기에 <은빛 물고기>를 읽다 보면 연어의 생태지식도 든든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연어는 성냥개비만한 치어 상태에서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성숙한 상태까지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더라고요. ​앨러번, 프라이로 불리는 치어, 어린 연어는 파르, 젊은 연어는 스몰트,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릴스,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하는 켈트. 이 한살이가 우리나라 연어는 대략 3년 정도라고 해요.

그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고 있는데, 연어들이 겪는 고난의 행로 속에 자연의 법칙이 아닌 인간 때문에 생기는 일들은 허무함을 넘어 분노가 치솟기도 했습니다.

 

무조건 바다로 나가고 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때를 기다리고 재는 습성이라든지, 아무도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돌아갈 때를 알고 정확하게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 회유의 비밀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현대성을 가진 거의 모든 지혜들이 지름길을 찾고 생략하려 하지만 연어들에게는 지름길과 생략이 없다. 연어는 그 자체가 진리다." - p222

 

 

 

오호츠크 해, 베링 해로 식이회유를 하고 다시 산란회유를 하는 연어의 일생에 동행하며 여러 계절의 단상을 읊는 고형렬 시인의 묘사도 예술입니다. 따스하면서도 무료한 봄날의 기운을, 살이 에이는 듯한 북빙양을 함께 느끼며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듯했어요.

 

자연이 정해준 대법칙을 따르는 연어.

하지만 해양과 하천 오염, 낚시 등 연어의 적은 이제 너무 많아졌습니다. ​살아서 돌아오는 회귀율이 대략 1.3%. 동해까지 2%였지만 정치망에 걸려 회귀율은 또 낮아집니다. 게다가 이제는 격식 있는 죽음도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연어 대부분은 연어다운 일생을 마감하지 못하고 채포장에서 건져 올려져 인공으로 수정되거든요.

 

채포장을 운 좋게 벗어난 연어의 마지막 삶을 그리는 장면은 감동의 다큐멘터리였어요. 채포장에서든 자연의 강 상류에서든 똑같이 죽음을 앞둔 상태지만, 사람의 손이 닿는 장면에서보다 자연의 법칙대로 맞이하는 죽음이 더 경외로울 수밖에요.

 

알을 밴 암컷 연어의 뒤를 쫓는 수컷 연어의 행동, 산란 과정에서는 그 어떤 먹이도 먹지 않고 금식하며 살생하지 않는 연어의 습성, 눈부신 은빛의 물고기가 모천으로 회귀하면서부터 흉측하게 변하는 몸... 이 모든 것들이 놀라웠어요. 아릿한 동정의 마음과 더불어 생명의 반짝임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회귀의 약속을 지키는 연어들의 삶에서 고형렬 시인은 생명의 흐름과 활기를 담은 몸의 즐거움이라는 육락肉樂을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의 근원으로 가는 탯줄의 입구인 모천으로 향하는 연어를 보며 하천의 모성에 투항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생명은 생명에게 공양된다."(p341)며 아등바등하는 인간의 삶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약속, 사랑, 인연이라는 회귀의 삶을 사는 은빛 물고기 연어의 한살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슬며시 발견하게 됩니다.

 

작년에 읽은 책 중 개인적으로 최고의 책으로 꼽을만한 자연에세이 <메이블 이야기 / 판미동>​에 이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책 <은빛 물고기 / 최측의농간>. 국내 작가 책에서 이런 문체와 감성이 담긴 자연에세이가 나올 거라고는 사실 기대 안 했던 터라 더 반가웠던 것 같아요.

최측의농간 출판사에서 복간하지 않았다면 이런 책이 있었다는 걸 까마득히 몰랐을 테죠. 복간 유행 시점이긴 한데 <은빛 물고기>처럼 덜 알려졌지만 놓치기 정말 아까운 책을 복간하는 것처럼 복간 열풍이 이렇게 쓰이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 용어가 언급되는 편인데 주석이 잘 달려있어 읽는 데 무리없었고, 다만 한자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충분히 더 사용했더라면 고형렬 시인 특유의 담백하고 청량한 문체가 한결 빛날 것 같단 생각은 해봅니다.

 

※ 오타 발견한 부분은 출판사 문의해서 확인했는데 읽는 분들 참고하시라고 덧붙여 둡니다.

164쪽 영어들은 연어들은 그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 178쪽 바다의 면접이 좁아지고 물의 뭍의 면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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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2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묵직하네요.. 요즘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비장함이 깃들어 있어서 좋더군요..
읽다 보니 왜 김훈이 이 책에 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