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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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열 번째, 춘분 지나고까지는 기존 소세키 장편소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단편인 듯 장편소설인 이 책은 다양한 시점 변화를 사용해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느낌에다가, 추리소설 느낌도 살풋 났거든요. <춘분 지나고까지>라는 제목은 이 글을 춘분 지나고까지 쓸 예정이라 붙여진, 참 허무한 제목이기도 합니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은 매번 그 소설이 쓰인 시기에 소세키가 살던 집이나 기억할만한 장소 등을 곁들여 소개합니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는 이 소설을 연재하기 전 한참 쉬었던 소세키의 정황을 알려주고 있어요. 평소 신경증과 위염 증세가 있던 소세키가 큰 고비를 한번 넘기는 시점입니다.

 

대학 졸업 후 취직 준비 중인 게이타로. 평범함을 싫어하는 로맨티스트며 모험을 꿈꾸는 자라 자처합니다.

제 눈에는 게이타로 같은 유형이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었어요. 졸업 후 취직은 해야 하니 이것저것 알아보러 다니지만, 취직이 어디 맘대로 되지는 않고. 점점 더 눈앞의 평범함이 자신의 무능력 때문인 것 같아 끙끙 앓기만 하기도 하고, 점집에 점을 보러 가듯 운에 빌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아주 강한 의욕도 그렇다고 포기도 아닌... 오히려 이 점이 더 보편적 인간상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그보다 먼저 뭔가 경탄할 만한 사건을 만나고 싶은데, 전차를 타고 이리저리 아무리 돌아다녀도 전혀 소용이 없네. 소매치기도 못 만난다니까" 하고 말하는가 하면 "이보게, 교육은 일종의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속박이네. 아무리 학교를 졸업해도 먹고사는 게 힘들다면 그게 무슨 권리라고 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지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뭣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니 말일세. 지독하게 사람을 속박하네. - 책 속에서


 

게이타로는 지금껏 무엇 하나 자신의 힘으로 뚫고 나왔다는 자각이 없었다. - 책 속에서


그러다 친구 스나가의 친척에게 소소한 일을 의뢰받는데요, 바로 누군가의 뒤를 밟는... 게이타로가 평소 꿈꾸던 탐정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이때 점을 봐주는 노파가 말하길, 나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손해라며 망설임을 콕 짚어내지요. 하지만 한번 그르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거라고도 합니다. 게다가 자기 것 같기도 하고 남의 것 같기도 한, 긴 것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한,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한 뭔가를 말하며 알쏭달쏭하게 합니다. 게이타로는 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막 움직이려던 차에 계기를 만들어 준 것으로 생각하며 스나가 친척이 의뢰한 일을 맡게 됩니다.


한편 비범한 경험이 풍부했던 방랑자 모리모토라는 남자가 뱀 조각을 새긴 지팡이를 남겨두고 사라집니다. 평소 그의 경험담을 듣는 것을 좋아했던 게이타로는 점집 노파가 말한 알쏭달쏭한 예언을 뱀지팡이와 연결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뱀지팡이를 들고 다니지요. 자취를 감춰버린 모리모토에게 받은 뱀지팡이는 앞일을 추측하게 하는 매개체처럼 쓰입니다.

 


비 오는 날 」 챕터에서는 소세키 작가의 막내딸 죽음을 의미하는 글을 쏟아부으며 진혼곡처럼 펼쳐두기도 합니다. 소세키는 이 책을 쓰기 전 막내딸이 돌연사하는 아픔을 겪는데요, 그런 경험을 한 소세키의 상황이 의식적으로 담긴 책이었어요. 

 


게이타로 외에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스나가 라는 부잣집 도련님인데, 게이타로에게 스나가는 경멸과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스나가 역시 게이타로처럼 백수 신세지만 스나가는 일을 하려는 목적 자체를 가지지 않은, 소세키의 말마따나 고등유민에 속한 자입니다. 소세키 중기 삼부작 소설 중 하나인 <그 후>의 다이스케처럼 말이지요.


소세키의 소설에는 이런 고등유민 유형이 자주 등장하는데,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집안의 자식이지만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사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 고민이 대개 사랑과 관련되어 있지요. "내 머리는 내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p287)처럼 스나가에게 한 여인의 존재란... 썸에 끌려다니기 싫은 마음이 있는 한편 알게 모르게 사랑의 질투를 하는 이중적인 면을 보입니다. 여자의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어보기도 하는데 대개 '이건 날 낚으려는 의도?' 이렇게 생각을 마무리 짓는 편입니다.


소세키식 사랑에 대해서는 그동안 그의 책을 소개할때 조금씩 언급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송태욱 번역가의 한 마디가 대박 공감되었어요. "통속도 소세키를 만나면 통속성을 잃는다." 처럼 소세키 손에만 들어가면 뻔한 사랑도 묘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삼각관계가 나오지만, 말로 뭔가 딱 짚어 표현하긴 어려운데 이건 소세키식 사랑이라고 할만한 느낌이랄까요.



 

<춘분 지나고까지>를 읽으면서 사실 이번 이야기는 소세키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파악이 또렷하게 되더라고요. 각자가 이 사회를 사는 모습을 보여주되 일상잡변기라고나 할까요. 이 책 해설을 맡은 정혜윤 라디오 PD의 말처럼 더 오래 생각할수록 뭔가 알 것만 같다가도 그 알 것 같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오리무중인 심정에 공감할 정도였어요.

이 책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한 뱀지팡이는 부활을 의미하는 뱀으로서, 어둠을 포용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고 보면 스나가는 마지막에 여행을 떠나는데요. 소세키의 소설 <문>에서는 문을 열고 넘어서지 못한 인물을 그렸다면, <춘분 지나고까지>의 스나가는 한 발 내디딘 셈이 아닐까 싶어요.


게다가 이 책이 신선했던 건 시점 변화가 많아서였기도 했네요. 단편인 듯 아닌듯한 분위기였다 했는데, 처음과 끝은 게이타로 3인칭 시점이고 중간에는 여러 인물이 1인칭과 3인칭 시점으로 왔다 하며 하나의 장편소설 안에서 다양한 시점 변화를 볼 수 있답니다.

조금은 독특했던 <춘분 지나고까지>. 일상 묘사 위주로 강한 임팩트는 없어 좀 밍밍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책 덮고나서도 재미없었어 말은 안 나오는걸 보면 소세키식 소설에 이쯤이면 제대로 빠져들어 있다고 해도 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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