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평점 :

각인이라 불릴 만큼 짧은 순간의 승부, 첫인상.
첫 시작 세 줄의 법칙에 사로잡힌 '첫 문장 증후군'에게 반가운 책 <내가 사랑한 첫 문장>.
신이 내린 선물 첫 문장.
대부분은 첫 페이지 세 줄 정도는 자세히 읽은 후 그 책을 계속 읽을지 그만둘지 결정한다고 하네요. 그야말로 첫 문장은 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군요. 독자들은 그저 가볍게 시작하는 첫 문장이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처럼 소설가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됩니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는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사로잡는 첫 문장을 남긴 쟁쟁한 소설 23권을 소개하고 있어요. 읽지 않았거나 완독하지 못한 책이 사실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첫 문장만큼은 입소문에 익히 들어 아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의 소설들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 저자의 개인적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지만, 다행히 코드가 맞아 그가 소개한 책 대부분이 만족스럽네요.

저자의 독서경험담이 재미나요.
당시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읽던 책에는 심드렁하던 차에 만난 카프카와의 인연.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 덕분에 독일어 공부까지 하며 원서 통독에 시간을 바치기도 했다는데, 저도 카프카쯤은 읽어줘야지 할 땐 그저 끌리지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관심 없었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온 《변신》의 오마주 '사랑하는 잠자'편을 읽고 그제야 카프카의 매력에 반했던 경험이 있네요. 인연이 없던 책과의 만남은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자의 좋은 책 판별법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모름지기 잘 지은 첫 문장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아야 한다'며 미스터리한 느낌이 드는 첫 문장을 선호하더라고요.
23권의 첫 문장 스타일도 참 각양각색입니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처럼 400글자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문장도 있고, 700페이지 두께를 자랑하면서도 첫 문장은 겨우 세 단어인 허먼 멜빌의 《모비 딕》도 있고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첫 문장의 롤. 리. 타. 캬~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탄성을 자아내기도 하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책 《내가 고양이로소이다》의 첫 문장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일본어 원어로 읽을 때 더 멋지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을 읽어가다가... 이런, 정작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은 뭐지?
탁 하고 떠오르는 첫 문장이 없다는 사실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상 깊은 첫 문장은 로맨틱하거나 지적인 소설에서 찾는 암묵적 방식만 따르면 비소설 선호 독서위주로 한 저로서는 내가 기억할 만큼 사랑한 첫 문장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유명세에 알고 있는, 남들이 사랑하는 첫 문장들만 있을 뿐이지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은 달달한 느낌을 준 표지가 너무 사랑스러워 무작정 끌렸던 책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내가 사랑한 표지' 같은 것에 더 할 말이 많을지도요 ^^;
윤성근 저자의 말처럼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심오한 수수께끼"인 첫 문장.
내 경험이 축적되고 지금 내 삶의 관심사에 따라 몇 년 전에는 전혀 끌리지 않았던 첫 문장도 이제는 가슴에 남는 명문장이 될 수도 있겠고요. 언젠가는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으로 저도 한 보따리 풀 수 있는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