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전민식 지음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에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등단한 전민식의 세 번째 소설 《13월》은 소수에 의해 이 사회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체제, 감시 사회화된 현대, 개인정보의 개방성에 관해 폭로하고 있다. 꽤 무거운 주제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일 수 있다.

 

1988년 서울의 한 조리원에서 일어난 화재에서 한 명의 산모 사망기록에도 남지 않는 신생아 한 명의 행방불명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정부산하기관 목장연구소라 불리는 비밀기관 소속으로 '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관찰대상과 심적 거리를 두며 일거수일투족 남자를 관찰하는 여자 수인, 그리고 마이크로 칩을 자신도 모르게 몸에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관찰대상인 남자 재황. 수인에게 허락된 건 인식기의 불빛 이동 경로를 보며 사견 없이 관찰 기록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수인은 재황의 스물여섯 번째 관찰자였다. 관찰대상에 따라 움직이는 관찰자의 삶은 보통의 일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료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수인이 바라보는 재황은 순수하고 선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껏 집, 도서관,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만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정확한 시계처럼 생활했던 밥이 요즘 들어 변화하기 시작한다. 몇 년 만에 만난 보육원 고향 지기인 PC방 사장 겸 포주 노릇을 하는 광모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광모와 재황은 서로 걸어가는 길이 다르고 재황에게는 지우고 싶은 과거였지만 외부로부터 언제나 방패가 되어 줬던 광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끊으려 해야 끊을 수 없는 가족의 의무 같은 족쇄였다. 

 

『 선하게 산다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 - p39

 

이 관찰의 목적은 인류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라는 정도의 정보만을 가진 수인은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내부에 의문이 소리없이 쌓이고 있다. 특이할 것 없는 인간의 평생을 관찰해서 뭘 얻겠다는건지, 이 실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하필 왜 밥인지... 수인은 지성 있고 순수한 밥이 광모라는 친구 때문에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일을 하게 된 것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얼른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자신의 원래 궤도로 돌아오길 내심 기다리게 된다.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미래를 설계할 힘은 있다고 믿는다. 이런저런 사이 결국 광모의 손아귀에서도 못 벗어나고,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 표절이 밝혀지는 등 그가 쌓아올린 것들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있는 것을 연민의 심정으로 대하게 되는 수인이다. 용역 깡패일까지 하며 지금까지 이룬 걸 포기하는 그의 모습에 그저 보고 기록하면 그만인 존재인 관찰자의 한계를 느낀다.

 

 

 

 

『 명심하게. 대상의 삶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대상은 물론 우리 자신의 미래까지도 위태로워진다는 걸 말이네. 』 - p51

 

『 인간이 평등하다고? 다 웃기는 소리야. 인간이 지구를 더럽히기 시작한 이후 그런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너희 같은 놈들한텐 애초에 오기도 힘들지만 만약 기회가 왔을 때 놓치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몰라. 』 - p 97

 

 

지금까지 무심한 척 살아왔지만 자신의 부모에 대한 궁금증,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하는 재황에게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은 무엇일까.

 

 

 

 

프란시스 골턴에 의해 우생학 논쟁이 일어난 19세기의 일은 현재에도 여전히 암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의 능력이나 성질이 선천적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며 유전자만 잘 조절하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완벽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의 우생학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눈먼 자들의 오용으로 엄청난 악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3월》은 인간을 퇴화시키는 수많은 위험 중 부적격자를 옹호하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의 윤리와 도덕은 결국 인간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믿고, 적격자를 선별해내고 적격자의 능력을 찾아내고 부적격한 유전자를 제거해 결국 소수에 의해 이 사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요소인 무분별한 애정, 자비, 옳은 결정 앞에서 망설이거나 주저, 회피하는 것 등은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최고의 유전자를 주고 환경은 최악으로 조성해 준 밥의 조건은 바로 이런 인간의 질적 향상을 위해 실험대상으로 삼는 수많은 자료 중 하나일 뿐이다.

더불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내 위치를 단 몇 초 만에 알아내는 세상에서 현대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가, 운명에 끌려다니는가.......

인간 개량의 목적 아래 운명 혹은 우연 따위의 단어가 무서워지는 《1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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