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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건너는 아이들
코번 애디슨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올해 우리나라 형법에 무려 17년여 만에 형법체계에서 <인신매매죄>라는 새로운 범죄가 편입되었다. 기존에는 약취유인죄로 다뤘지만 이제는 성매매, 성적착취, 장기적출 등을 목적으로 한 모든 종류의 인신매매 행위를 처벌 할 수 있게 된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기지 않는 사슬의 형태로 존속된 노예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는 죄악으로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적인 행위이다. 고대에는 승전국의 노예 형태가 대부분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강제 유괴의 형태로 이뤄진 매매로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직접 인도 뭄바이를 잠입 취재하며 완성시킬만큼 법조계에서 일하는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잘 어우러져 실화인지 소설인지 구분하기 힘들만큼의 사실감과 긴장감 그리고 스펙타클한 전개감이 돋보이는, 국제인신매매를 소재로 한 <태양을 건너는 아이들>.
인도 상위 중산층 집안의 열일곱살 아할리아와 두살어린 시타 자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축이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지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몰려와 삽시간에 가족을 잃은 두 자매. 학교 수녀님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에 얻어 탄 어느 트럭 운전수에게 납치된다. 단 하루만에 가족이 바다에 몰살당하고 두 자매는 납치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두 자매에게는 파도가 부셔 버린 기억속에서의 세상만이 존재할 뿐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한편 워싱턴에서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토머스는 자신의 어린 딸의 유아돌연사를 겪은 아버지로서의 슬픔, 회사 동료와의 외도, 인도인 아내와의 별거, 훤한 대낮에 벌어진 유괴 사건의 목격, 회사에서의 입지.. 등으로 인해 삶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법률구조단체 CASE 인도 뭄바이 지부에서 일하며 어린 두 자매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토머스는 인신매매가 혐오스러운 범죄이긴 했으나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뭄바이에 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단 하나의 분명한 목표였던 연방판사직을 위해 경력을 쌓아가려는 목적이었을 뿐이었다. 인신매매는 전 세계의 비극이지만 딴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었다는 토머스처럼 나 역시 제3세계의 먼 나라 이야기일뿐... 테이큰, 트레이드, 휴먼 트래픽킹, 맨온파이어..등 영화속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구출 액션에만 빠져들었을뿐,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고뇌해본적이 없던것이 사실이다.
<태양을 건너는 아이들>의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고 지켜주지만 수치심의 구렁에서 빠져나갈 방법 따위는 없었다. 영원한 수치심 속에 사는 것이 숙명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뭄바이 매음굴 급습으로 언니 아할리아는 구조되었지만 동생 시타는 이미 헤로인 밀수 운반책으로 이용되어 머나먼 프랑스로 옮겨졌고 시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심장이 죄여오는 느낌이었다. 포주와 인신매매범, 부패 공무원, 십자군 같은 변호사, 노예신세로 전락해 버리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온갖 학대의 사연이 존재하는 지하세계의 암흑으로 뛰어든 토머스의 이야기와 두 자매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스피디한 진행을 이뤄 손에서 놓기 힘든 마력을 지니고 있다.
치유되려면 의지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인생이란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 p 228
먼저 구조되었던 언니 아할리아가 사설보호소에서 부활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희망의 푸른 연꽃을 꽃피우며 외로움과 고된 생활에 지쳐있을 동생 시타를 기다리는 마음을 보면 목이 메여온다. 동생 시타는 자살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면서도 세상이 그들의 자유를 앗아가든, 그들의 순결을 훔쳐가든, 그들의 가족을 짓밟고 터무니없는 물길로 휩쓸어가 버리든, 그들의 추억만은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오로지 시간만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시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굴하지 않고 견뎌낼 작정이었다. 시타에게 남은 것은 과거밖에는 없는 현실.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미래가 없는 현실. 두번의 탈출 실패로 시타는 결국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언니의 얼굴을 머릿 속에 그려 봐도 어두운 그림자만 떠오를 뿐 과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도, 프랑스, 미국.. 세 나라를 거치며 이 모든것이 겨우 두 달 반 동안에 시타에게 일어난다. 시를 읊거나 낱말 놀이를 하는 것도, 언니가 곁에 있는 척하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행복을 꿈꾸는 것도 그만. 그저 벽만 멍하니 쳐다보거나 납득할 수 없는 자신의 업보를 곱씹으며 시간이 갈수록 어둠이 그녀를 잠식한다.
신은 대체 어디 있는거지? - p331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불행에 둔감할 수 있는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권리를 박탈하는 Human Trafficking 인신매매. 악의 얼굴을 구별하기 힘든 세상에서 토머스가 이 책에서 쓴 시로 희생자들의 영혼을 보듬어주고 싶다.
우리는 태양을 건넌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자가
시간의 바늘에 드리워진다
우리를 낳은 빛이
명명하는 이름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