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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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생전에 쓴 소설, 꿈 기록, 설화, 우화 등 미공개 글을 한 권에 담은 <고독의 이야기들>. 마치 한 세기의 문학적 미로를 탐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철학자이자 비평가로서 학문적 저작으로만 알려졌던 발터 벤야민의 또 다른 얼굴, 바로 문학적 상상력이 빛나는 작가로서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책입니다.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사상가 벤야민의 사상과 상상력이 빚어낸 42편의 이야기들은 꿈, 여행, 놀이라는 세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모더니티의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만화경처럼 현실의 균열과 상상의 세계를 번갈아 비추며 독특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이야기 모음집에 가깝습니다.





파울 클레와의 협주는 문학과 예술의 융합을 오롯이 보여줍니다. <고독의 이야기들> 표지부터 본문 곳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이 50여 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벤야민의 이야기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1부 꿈과 몽상에서는 벤야민의 내밀한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가까운」 글에서 그가 느끼는 그리움에 대해 "상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그리움."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순간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한 감정의 그리움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갈망에 가까운 그리움. 벤야민은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종종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역설을 탐구합니다.


2부 여행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을 선보입니다. 공간과 경험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북유럽 바다」에서 벤야민은 "시간 창고 안에 들어가 보면 사용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여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라며 시간의 은유적 풍경을 그려냅니다.


「마스코테호의 항해」에서는 여행을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과 현실이 탄생하는 공간으로 그려냅니다. "여행은 문턱을 가시화한다"라는 문장은 경계의 유동성을 완벽하게 포착합니다.


여행은 우리가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경계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듭니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떠나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벤야민은 이 순간을 단순한 경계 인식이 아니라, 존재와 경험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여행 중에는 익숙했던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규칙과 현실이 등장하며,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거나 재발견하게 됩니다.


벤야민의 여행은 물리적 이동을 넘어 인식의 변화,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내면의 풍경을 탐험하는 방식이 됩니다. 이동을 통해 익숙함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엽니다.


각 작품은 마치 시적 산문, 철학적 우화, 꿈의 단편처럼 읽히면서도 깊은 사유의 힘을 지니고 있어, 아주 쉬운 글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수월하게 읽은 글은 벤야민의 서평들이었습니다. <고독의 이야기들>에는 프란츠 헤셀의 『내밀한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동요 모음집 등 벤야민의 서평이 몇 편 있습니다. 제 취향상 벤야민 스타일의 서평 문체가 꽤 매력적이더라고요.


3부 놀이와 교육론에서는 벤야민의 급진적인 사유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는 놀이를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식과 창조의 근본적인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어른들은 말장난과 놀이의 즐거움을 아이에게서 배워야 한다"라며 기존의 교육과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지 이야기」에서는 구술 전통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엿보입니다. 벤야민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단절된 경험의 전달 가능성을 고민하며, 이야기라는 형식이 단순한 오락이 아닌 인간 경험의 중요한 기록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픽션의 집합체가 아닌, 경험의 구슬입니다.


그의 저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일방통행로』에서 논의된 아이디어들이 이 문학작품집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벤야민이 풀어내는 짧은 이야기들을 한 편씩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방식을 추천드립니다. 벤야민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문학적 글쓰기와 비평적 글쓰기를 넘나드는 벤야민의 독특한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 모음집을 넘어, 생전에 출간한 그의 비평과 에세이의 사유와 아이디어의 공명판으로 기능하는 글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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