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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력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4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나이 듦의 본질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책 <노인력>. 노인력은 일본의 아티스트이자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瀨川 原平, 1937~2014)가 90년대 도쿄신문 문화란에 기고한 에세이에 등장한 독특한 개념으로, 노화의 징후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기존 관점을 뒤집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노인력은 물리적인 에너지 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노인력은 사실 마이너스의 힘입니다. 노인력이 착실하게 쌓일수록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망증, 한숨, 느릿느릿한 움직임 같은 노화의 특징을 새로운 능력으로 재해석하며,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삶의 지혜와 여유를 이야기합니다. 유쾌한 에세이를 넘어 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을 전합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일본의 현대미술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유머와 비평을 겸비한 독창적인 에세이스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후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활동하며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작업으로 일본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가 창안한 개념은 노인력 외에도 또 있습니다. '초예술(超芸術)'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는데, 일상의 사소한 것들 또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물건이나 공간에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는 실험적 예술 형태입니다.
그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현상이나 사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노상관찰학(路上観察学)'이라는 개념도 고안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통해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는 접근법으로, 일본 현대문화와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노인력> 1부에서는 노화 속에 숨은 유머와 철학을 전합니다. 저자는 노화의 대표적인 징후인 건망증을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하며 이를 하나의 능력으로 승화시킵니다.
“건망증 이즈 뷰티풀”이라는 문장은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건망증은 불편한 거잖아요? 하지만 저자는 건망증을 불필요한 기억을 자연스럽게 걸러내는 과정으로 보며,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부여한다고 말합니다. 지갑을 두고 외출하는 등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는 자신을 보며, 잊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조금씩 노망의 파도가 밀려왔다.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용건을 떠올리지 못하고, 날짜를 떠올리지 못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 노망 노인이라고 하면 왠지 쓸모없는 인간처럼 들리지만, 노망도 하나의 새로운 능력이라 할 수 있으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노인력은 어떨까. 그거 좋네, 노인력.
노인력.
이렇게 해서 인류는 처음으로 노망을 하나의 능력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건망증 이즈 뷰티풀.
- p13
두 번이나 지갑을 두고 외출하자 마치 내가 위풍당당한 대大인물이 된 듯해 만족스러웠다. 소小인물은 늘 좀스럽게 하나라도 빼놓고 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인물쯤 되면 지갑 정도는 깡그리 잊어버린다. 돈 따위 알 게 뭐야.
- p47

노화의 또 다른 상징인 한숨도 이 책에서는 유쾌하게 묘사됩니다. 의자에 앉으면서 “아고고고, 읏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을 노인력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단순히 피곤함의 표현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에너지를 아끼는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으로 해석된다고 말이죠.
2부에서는 노인력의 실질적인 활용과 사회적 시각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노인의 존재감이 가족과 사회에 미치는 가치를 담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냅니다.
노년기에 나타나는 느림, 여유, 그리고 시간의 다른 감각에 대해 언급합니다. 젊은 세대가 효율성에 매달리는 동안, 노인은 느린 걸음과 긴 호흡으로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노인이 동네를 천천히 산책하며 세밀한 변화를 발견하는 모습은 작가가 말하는 노인력의 핵심입니다.
노인의 느림과 반복적인 일상은 창의성과도 연결됩니다. 저자는 노인의 행동을 일종의 예술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집 근처를 걷는 산책이 단순한 루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노인의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세상을 재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이거야말로 일상 예술인 셈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가족과 사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조급한 젊은 세대에게 인내와 여유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노인은 현대 사회의 부족한 조각을 채워주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노인은 단순히 집 안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며 노인의 역할을 확장합니다. 노인이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집 밖의 세상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노인의 이야기는 세대 간 문화와 기억을 연결하는 대화의 형태라는 점도 짚어줍니다. 노인의 말은 때로는 비유적이고 우회적이지만, 그 속에는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노년의 슬로우 토크(slow talk)는 현대인이 잊기 쉬운 깊이 있는 대화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노년기의 경험과 행동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노인력>.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노년기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유머로 승화시키며, 노화의 징후를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전환하는 저자의 지혜가 꽤 멋져보였습니다.
<노인력>으로 배우는 인생의 여유를 맛보세요. 빠릿빠릿한 세상 속 느릿느릿의 아름다움, 노인력의 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버리는 기억의 미학도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유쾌하면서도 철학적인 이 책은 나이 듦이 두려운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웃음을 선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