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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타이완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천쓰홍의 최신작 <67번째 천산갑 (원제 第六十七隻穿山甲)>. 두 주인공, 동성애자인 '그'와 이성애자인 '그녀'의 복잡한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들의 서사는 우정 이상의 깊이를 가진 감정의 흐름을 탐구하며 인간의 고독과 치유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합니다.
표제작 천산갑은 희귀한 동물로 소설 속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희귀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천산갑처럼 그들 또한 사회적 소외와 상처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 소설은 '그'와 '그녀' 사이에 맺어진 독특한 관계가 독특합니다. ‘게이미(Gay蜜)’로 불리는, 동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 사이의 깊은 우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중화권에서 종종 사용되며, 성적 긴장이 없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우정은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지지하며 생겨난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각자의 상처를 서로의 존재를 통해 치유하려고 하며, 고통 속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합니다.
천쓰홍 작가는 타이완에서 동성애자들이 겪었던 억압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보수적인 성적 규범 속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그'를 통해 성소수자들이 당시 경험한 사회적 압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기대와 고통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결혼, 임신, 출산 등 여성에게 강요된 사회적 역할과 고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사회적 억압을 묘사하는 데 있어 섬세한 문체로 스토리를 끌어가는 작가입니다. 등장인물의 감정 속에 시대적 고통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사회적 분위기를 체감하도록 만듭니다.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더욱 섬세하게 전달합니다.
이성애자 여성 '그녀'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이자 배우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동성애자 남성 '그'는 연인 J의 상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감정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 사회적 압력을 상징하는 주변인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천산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주인공들의 상처와 기억을 이어주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희귀하고 소중한 천산갑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등장했던 천산갑은 그들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천산갑의 존재는 시간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기억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어린 시절 매트리스 광고에서 잠을 자는 연기를 하며 잠동무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 이 소설에서 '잠'의 의미는 남다릅니다. 단순히 육체적 휴식의 의미를 넘어서 주인공의 심리적 불안과 외로움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궁극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찾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누군가와의 연대와 신뢰를 통해 얻는 심리적 치유와도 같습니다.
성소수자와 여성 모두가 처한 구조적 억압을 교차하며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전 세계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67번째 천산갑>.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성소수자로서 겪는 사회적 억압과 고통은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까, 성 정체성의 차이를 넘어서는 우정과 이해란 무엇일까, 시간과 기억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 흔적을 남기고 변화를 가져올까. 성 정체성, 고독,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아시아 최초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룬 대만에서 이 주제의 소설이 등장했다는 건 의미 있습니다. 법적으로 허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문제나 편견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침내 안전하게 '잠들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